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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약관

제1장 총칙 제1조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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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 (약관의 효력과 변경)
  1. 1. 이 약관은 서비스 화면에 게시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공시함으로써 효력을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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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조 (약관 외 준칙)
  1. 이 약관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이 관계법령에 규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규정에 따릅니다.

제2장 회원 가입과 서비스 이용 제4조 (이용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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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조 (이용신청의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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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조 (계약 사항의 변경 및 정보 보유/이용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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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계약 해지 제9조 (계약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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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 (자격상실)
  1. 다음 각항의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 "연구원"은 사전통보 없이 이용계약을 해지하거나 기간을 정하여 서비스 이용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2. 1. 타인의 서비스 ID 및 비밀번호를 도용한 경우
  3. 2. 서비스의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한 경우
  4. 3.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을 고의로 유포시킨 경우
  5. 4. 회원이 국익 또는 사회적 공익을 저해할 목적으로 서비스이용을 계획 또는 실행하는 경우
  6. 5.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게시, 게재, 전자메일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전송 하여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한 경우
  7. 6. 수신자의 의사에 반하는 음란, 저속, 위협적인 내용이나 광고성 정보, 전자우편 등을 지속적으로 전송하는 경우
  8. 7. 정보통신설비의 오 작동이나 정보 등의 파괴를 유발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프로그램 등을 유포하는 경우
  9. 8. "연구원", 다른 회원 또는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
  10. 9.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 외부기관의 시정요구가 있거나 불법선거 운동과 관련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은 경우
  11. 10. 타인의 개인정보, 이용자ID 및 비밀번호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경우
  12. 11. "연구원"의 서비스 정보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연구원"의 사전 승낙 없이 복제 또는 유통시키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경우
  13. 12. 전기통신 관련법령 등에 위배되는 경우
  14. 13. 본 약관을 포함하여 기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한 이용조건 및 관계법령에 위반한 경우

제4장 책임 제11조 ("연구원"의 의무)
  1. 1."연구원"과 제휴를 맺은 사이트와 "연구원"의 사이트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정보를 제휴 사이트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공유를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컴퓨터에 쿠키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2. 2. "연구원"은 "서비스" 제공으로 알게 된 "회원"의 신상정보를 본인의 승낙 없이 제3자에게 누설, 배포하지 않습니다. 단,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합니다.
    1.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 사업법, 지방세법, 소비자보호법, 한국은행법, 형사소송법 등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2. - 통계작성/학술연구 또는 시장조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서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
  3. 3. "연구원"은 "회원"의 전체 또는 일부 정보를 업무와 관련 된 통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4. "연구원"은 "서비스"가 계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부득이한 이유로 "서비스"가 중단되면 지체 없이 이를 수리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단, 천재지변, 비상사태, 시스템 정기점검 및 "연구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거나 중지할 수 있습니다.

제12조 (회원의 의무)
  1. 1.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관리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2. 2. "회원"은 자신의 아이디를 타인에게 양도, 증여, 대여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3. 3. 자신의 아이디가 부정하게 사용된 경우, "회원"은 반드시 "연구원"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합니다.
  4. 4. "회원"은 게시물에 등록된 데이터를 이용한 영업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5. 5. "회원"은 "연구원"이 보내는 공지 메일을 수신해야 합니다.

제13조 (회원의 게시물)
  1. 1. 게시물이라 함은 "연구원"의 각종 게시판에 회원이 올린 글 전체를 포함합니다.
  2. 2. 회원이 게시하는 정보 (및 질문과 대답)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이나 문제는 전적으로 회원 개인의 판단에 따른 책임이며, "연구원"의 고의가 아닌 한 "연구원"은 이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습니다.
  3. 3. 회원의 게시물로 인하여 제3자의 "연구원"에 대한 청구, 소송, 기타 일체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회원은 그 해결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연구원"을 위하여 분쟁을 처리하여야 하며, "연구원"이 제3자에게 배상하거나 "연구원"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회원은 "연구원"에 배상하여야 합니다.
  4. 4. "연구원"은 "회원"의 게시물이 다음 각 항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사전통지 없이 삭제 합니다. 그러나 "연구원"이 게시물을 검사 또는 검열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1. 1) 제3자를 비방하거나 중상 모략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우
    2. 2) 공공질서,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인 경우
    3. 3) "연구원"의 저작권, 제3자의 저작권등 기타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
    4. 4) "연구원"에서 규정한 게시기간을 초과한 경우
    5. 5) 상업성이 있는 게시물이나 돈벌이 광고, 행운의 편지 등을 게시한 경우
    6. 6) 사이트의 개설취지에 맞지 않을 경우
    7. 7) 기타 관계법령을 위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5. 5. "연구원"은 "회원"이 등록한 게시물을 활용해 가공, 판매, 출판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제5장 정보제공 제16조 (정보의 제공)
  1. "연구원"은 "회원"에게 필요한 정보나 광고를 전자메일이나 서신우편 등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회원"은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가입신청 메뉴와 회원정보수정 메뉴에서 정보수신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정보 수신 거부한 "회원"에게도 제13조5항의 "연구원" 공지 메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제6장 손해배상 및 면책 제14조 (책임)
  1.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연구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회원"에게 발생한 어떠한 손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2.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한 정보, 제품, 서비스, 소프트웨어, 그래픽, 음성, 동영상의 적합성, 정확성, 시의성, 신빙성에 관한 보증 또는 담보책임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제15조 (면책)
  1. "연구원"이 천재지변 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서비스"를 중단할 경우, "회원"에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제16조 (관할법원)
  1.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소송이 제기될 경우 "연구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법원 또는 대한민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른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니다.
  2. 본 약관의 해석과 적용 및 본 약관과 관련한 분쟁의 해결에는 대한민국법이 적용됩니다.

부 칙
  1. 이 약관은 2008년 10월 6일부터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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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Collection구술테마 컬렉션/민주화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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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 / 1953.11.03

생산기관 한신대_동국대 면담자 최동순 면담자정보
검독자 전재성 면담 총시간 04시간 14분01초
조회수 1572 스크랩수 0
면담일(장소) [ 총2회 ]
  • 2010-08-13 (자택)
더 보기 ▼
간략 소개

  • 구술자료 상세
1. 과제개요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 참여한 기독교, 천주교, 불교의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역동한국의 자화상을 재구성하며, 주요 사건들에서 종교인들이 행한 역사행동과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교리적 근거를 밝히는 구술면접이다. 이로써 종교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보여준 역할과 동기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와 산업화 이면에 작동하고 있던 내면 동력을 추적하여 종교와 사회 사이에 역학관계를 조망한다. 기대효과는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상 뒤에서 역사적 역할을 하며 민주화와 산업화의 내면적 동력을 추동시킨 종교인들의 의식, 목표, 의지, 갈등, 투쟁, 돌봄 등의 가치를 드러내는 내용을 발굴한다.
2. 구술개요
1.4후퇴에 이은 부산 정착과정에서 판자촌 열악한 상황에서 발생한 전신화상은 고된 인생역정의 시작이다. 성장과정에서 대학, 그리고 이어지는 인생행로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 해결 방법을 불교에서 찾았고, 개인의 고뇌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통도 함께 해결하려는 의지가 그의 구술 내내 보이고 있다. 대불련 활동이나 민중불교의 확산, 그리고 독일 유학도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관점이다. 불교의 ‘고(苦)’같은 의미로 맺어진다. 이후 독일에 유학하여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남방불교 경전인 니까야 번역에 매진한다. 니까야는 연기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관계성 회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1회차 면담 / 2010-08-13 / 02:35:58
1. 면담개요
전재성 자신은 전쟁의 피해자라 생각한다. 1.4후퇴에 이은 부산 정착과정에서 판자촌 열악한 상황에서 발생한 전신화상은 고된 인생역정의 시작이다. 성장과정에서 대학, 그리고 이어지는 인생행로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 해결 방법을 불교에서 찾았고, 개인의 고뇌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통도 함께 해결하려는 의지가 그의 구술 내내 보이고 있다. 대불련 활동이나 민중불교의 확산, 그리고 독일 유학도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관점이다. 불교의 ‘고(苦)’같은 의미로 맺어진다.
2. 주요색인어
1.4후퇴, 법불회, 서울대 총불, 민중불교, 야학 선생, 경전번역, 대각사 반정부 시위, 민중불교론,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할아버지 사시던 곳, 부친의 직업. 출생과 전신화상을 입다
    부모님 고향 함경도이며, 할아버지 천도교 신봉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어서 동네에서 식자층으로 통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아마 재산을 팔아 천도교에 기부한 것으로 보이며, 화전민으로 살았다. 아버지는 일본에 가서 철광에서 선반일 같은 것 하셨으며, 러시아에 가서 일을 했다. 해방 이후 돌아왔다. 큰아버지 소 팔러 갔다가 강도 만나 사망했다. 1.4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부산으로 왔다. 부친은 미군부대 공병대 밑에서 일을 했고, 1.4후퇴 전에 결혼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4남1녀 가운데 두 번째이다. 부산 산동네 하꼬방에서 살았으며, 전신화상을 입었다. 문을 열고 엄마 물줘 할 때 형이 뒤에서 밀었다. 끓는 물에 전신화상 입었다. 죽을 줄 알았던 내가 살아났다.
00:00:00 ~ 00:10:28 동영상 재생
2. 화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왔다. 성장기 불교를 접하다.
    옷을 벗기다보니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 당시 피난 시절 약도 구하기 쉽지 않앗다. 온 몸이 곪아서 형편없었다. 소주 바르는 등 민간요법에 의지해서 치료해 살아났다. 죽음 가가이 갔다가 왔다. 이것도 전쟁의 후유증이다. 개인적 고통의 시작이다. 사춘기 때도 그렇고, 대학 입학해서도 장애는 그대로 정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그래서 아마 중학교 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기독교나 성당 같은 곳은 거부감이 있었다. 민족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싶었다. 석굴암 부처님 모습을 내 방에 모시기도 했다.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생물 선생이 참선지도 명상지도를 했다. 이 대 불교관이 어렴풋이 생긴 것 같다.
00:10:29 ~ 00:20:41 동영상 재생
3. 서울대 입학, 농대 불교학생회 구성. 총불 가입
    고3 때 벼락치기 공부하여 서울대 농대 입학했다. 농화학과였는데, 아버지의 화학 직업에 영향받은 것 같다. 농화학과는 상당히 재미 없었다. 개인의 실존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목욕탕에도 가기 어려웠던 신체 특성 때문이다. 수영장 같은 곳엔 갈 엄두도 없었으며, 사람 사귀지도 못했다. 학교 공부도 별로 관심 없었고, 서울대 법불회가 있어도 문리대 불교학생회 생긴지도 얼마 안 되었다. 나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던 유달영 박사를 찾았다. 그는 불교인은 아니었다. 원예 쪽이지만 개방적 생각을 가졌고, 불교학생회 창립을 조언했다.수원 캠퍼스 농화학과에서 불교학생회를 구성했다. 너가 조직했으니까, 너가 회장 맡으라 해서 (회장을) 맡았다. 다른 써클은 2~30명에 불과했는데, 우리는 80~90명이었다. 내 안에 리더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울대 내 총불이 발족되었다. 당시 총불회장 건국대 성태영 교수가 했다. 법불회가 모범이 되어 여타 불교회가 창립했고, 총불로 이어졌다.
00:20:42 ~ 00:34:23 동영상 재생
4. 고뇌가 이어졌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야학을 했다.
    대불련과도 관계한다. 12년차는 윤세원이며, 나는 13차 회장이다. 당시 강창일, 지금 국회의원, 서울대 총불교학생회에서 강의원 만났죠. 당시도 불교회 활동 많이 했지요. 출가하려 오대산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괴로우니까 무작정 아무 것에나 집착해 버리는 경우이다. 어릴 때부터 고통에 익숙했고, 이것이 불교관을 길렀다. 사립대 가면 돈이 없으니까 가기 어려웠고, 다행히 서울대 입학했지만 고뇌는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심연(深淵)’이라는 말을 쓴다. 서울대 총불회에서 야학을 했다. 은평구 녹번동 쪽이다. 고아원에 가서 밤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요즘 방과후학교와 비슷한 것이다.
00:34:24 ~ 00:44:19 동영상 재생
1-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야학 선생하다, 애들이 잘 따라줬다.
    불교학생회에서 시도를 별로 안 했는데, 서울대 총불회에 시작했다. 그 당시 고아원에 둬도 도망갔다가 다시 오고 그랬다. 내가 고통이 많으니까, 고통 있는 그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애들이 잘 따라줬다.
00:39:57 ~ 00:46:33 동영상 재생
2. 야학 1년 정도 했다. 불경 번역의 필요성을 이 때 느겼다.민청학련 연루되어 감옥 생활하다.
    학생들 가르치다보니 책을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아들이, 적어도 중고생들이 읽을 불교책을 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불경을 가르치다보니 너무어려웠다. 쉽게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선생이지만, 영어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다. 불교 얘기를 하려 해도 어려웠다. 쉽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빨리 대장경이나 불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야학을 1년 정도 한 것 같다. 그것이 보람이기도 하지만, 즐거움이었다.당시 간화선 하시던 스님들이 주장자를 치면서 할을 했는데, 그 당시는 멋있어도 다시 세속으로 오면 고통이 되살아났다. 한편 불교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민중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믿었다. 모임에서도 산중불교나 기복불교를 비판했다. 1974년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74년 총무부장하면서 관련된 거죠. 당시 강창일 선배와 황인범 등과 감옥에서 만났다. 긴급조치 4호 터지고 1000명 이상 검거되었지. 용산경찰서에 한 달 반 정도 있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했다. 감옥에서 생활이 힘들었다. 화장실 사용 또한 매우 불편했다.
00:00:00 ~ 00:09:41 동영상 재생
3. 용산경찰서에서 서대문형무로소로 이동. 감방새활 소개. 선거를 통해 대불련 회장이 되다. 김상진 할복
    일반 잡범들과 함께 수감 생활했다. 불편했던 수감생활 길게 구술하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 김지하와 여정남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사실 당시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의 본질을 잘 몰랐다. 노동운동하던 박석운도 거기서 만났다. 여기서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통도 알게 되었다. 개인의 실존문제를 사회에 투영했다. 출소하여 가을 선거운동을 광주에서 했는데, 고대나 동국대 이런데서 와서 나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사실 얼떨결에 대불련 회장이 되어 1975년도를 보냈다. 당시 서울대 김상진 할복 장면을 목격했다.
00:09:41 ~ 00:21:21 동영상 재생
4. 민중불교회 사건으로 구속 2달만에 풀려나다. 개인의 고통 해결 위해 책을 보았고,민중불교론 쓰다.
    강창일 의원 소개로 여익구를 만났다. 여익구도 민청학련 가담했다가 풀려난 것을 알고 잇었다. 민중불교회가 당시 이름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국에 대한 토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국에 포착되었고, 국가변란을 꾀할 목적이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고, 여익구와 함께 중부서에서 두 달 있다가 나왔다. 억울하게 검거되었다. 이런 고통을 왜 나가 당해야 하나, 그리고 이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당시 동국대 원의범 교수는 나의 민중불교론을 칭찬했다. 동국대 대학원에 올 것을 요청하였다.개인의 실존적 고통이 항상 따라 다녔다. 군대에 가야할 시기이다. 온몸에 화상을 입어 고통을 받고 있지만, 또 늑막염이나 결핵 등 다른 병들이 함께 나를 고통으로 몰아 넣었다. 그 고통 때문에 많은 책을 읽었고, 민중불교론을 쓰게 되었다. ‘민중불교론’을 써서 황석영 선배에게 부탁했지만, 1년여 가지고 있다가 1977년 10월 폐간호에 게재하였다. 당시 송건호가 편집장이었다. 표지에 지학순 주교의 노동권보장하라 라는 구호와 나의 민중불교론이 크게 활자화 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계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찾아왔다. 또한 이 글을 읽고 불교운동이나 민주화에 나선 이들도 많다.
00:21:22 ~ 00:30:51 동영상 재생
5. 전서암 필명으로 기고. 강원룡 목사 주최 워크샵에 참석. 인도철학에 관심 갖게 된 계기.
    당시 전서암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기고했다. 본명인 전재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함석헌 선생이라든가 김동길 선생 등과 함께 글을 썼다. 비록 학생이었지만 원로들과 함께 글을 쓰다. 당시 강원룡 목사가 주최하는 워크샵 에 참여했다. 사회의 빈부 양극화에서 그 격차를 줄여보른 노력에 나도 참여했다. 각 종교단체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도 참석하였다. 인도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시는 함석헌 선생 밑에 조수아, 요가철학 빠라마사 요가난다라는 자서전을 읽고 요가수행도 하였다. 그 조수아가 ‘민중불교론’을 보고 나에게 와서 절을 하였다. 자신의 집에 초대되어 갔고, 빠라마한사 자서전을 건네받았다. 영어 원서도 함께 받았다. 이 때 인도철학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다른 세상이 보였다. 그를 만난 것은 1977년 아니면 1978년으로 생각된다. 빠라마한사 요기난다라는 사람이 지은 건데 밤새 사전을 찾아 읽었다.
00:30:52 ~ 00:41:23 동영상 재생
6. 불교 이름을 걸고 서울대 총불에서 데모 주도. 안양천변에서 특수한 신체적 경험.
    ‘민중불교론’ 발표 후 얼마 안 있어 총불회에서 주최하는 (종로)대각사 시국 데모에서 대부분 잡혀 들어간 적이 있다. 나도 종로경찰서에 들어가 고생했다. 대각사 데모는 연대 김유철, 서강대 모 교수이다. 불교 이름을 걸고 시국 데모를 한 것이 이례적이었다. 이 때 ‘민중불교론’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나는 1979년도 졸업을 했고, 병이 자꾸 재발되어 자주 당산동 쪽 안양천변을 걸었다. 당시 제정구씨가 국회의원하다가 돌아와 가톨릭 빈민운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강물이 시커먼 색깔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 때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호흡이 아주 느려졌고, 나에게 기적이 내리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결심하고 안양천변에 앉아있는데, 당시 호흡이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코로 드나들었다. 특수한 경험이었다. 이후 건강이 회복되었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때부터 무슨 책을 보면 그 의미가 매우 명확하게 들어왔다.
00:41:24 ~ 00:49:52 동영상 재생
1-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함석헌 선생과 인연, 조수야 씨와 인연. 인도철학으로 방향.
    함석헌과의 인연 구술. 함석헌 선생과 함께 인도 고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스터디하다. 그 강의를 6개월 정도 들었다. 조수아와 함석헌 선생과의 인연으로 인도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80년대 들어오면서 이전 (1979) 10.26에 이어, (1979) 12.12사태, (1980) 5.17의 변란이 발생하였고, 나는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 입학하게 된다. 이 때 부터 시위 등 운동권과 인연을 끊게 된다.
00:49:53 ~ 00:54:41 동영상 재생
2. 안양천변 특수 체험 후 동국대 인도철학과 입학, 졸업 후 독일 퀼른 대학 유학
    제정구 선생이 빈민운동 하던 안양천변 특수한 신체 체험으로 인해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인도철학과 합격했지만 등록금 없었다. 대학에 가서 사정하고 우여곡절 끝에 입학하게 된다. 산학협동장학금을 받았다. 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기 전 이대 출신 여학생이 독일 갈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학생과 사귀었는데, 내가 자주 중부서와 종로서 등에 드나드니까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독일 가는데 같이 가자고 제안하였다. 독일 퀼른 대학에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에 가서 입학하게 된다.
00:00:00 ~ 00:10:47 동영상 재생
3. 거지성자 페터 노이야르 만나다. 불교 및 각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끝없이 대화
    비자를 받기 위해 우여곡절, 쾰른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다. 쾰른 대학 인도철학과 입학, 그러나 다음 해 본 대학으로 옮겼다. 우연히 페터 노이야르 만나다. 책 <거지성자>의 주인공이다. 그는 거리에서 사는 사람이다. 집 없이 돈 없이 여자 없이 사는 사람이다. 자신이 불교 수행자라는 것이다. 페터 노이야르와의 만남과 다양한 대화 오고 갔다. 불교를 비롯한 각각 종교에 대해 끝없이 대화하다.
00:10:48 ~ 00:20:35 동영상 재생
4. 거지성자 페터노이야르.
    페터 노이야르는 쾰른 쪽에서는 전혀 인지도가 없는 사람이다. 홈리스 정도이다. 페터 노이야르 하는 일, 독일에 들어온 외국 노동자 보살피는 역할.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페터로부터 도움 받은 이야기. 무소유로 살아가는 그의 행동을 표현하다. 그를 보고 <거지성자> 책을 써야 겠다고 계획하다. 빨리어, 범어 등 불경번역 계획을 세우다. 나중에 페터 선생 스페셜에서 방영하기도 하였다.
00:20:36 ~ 00:29:55 동영상 재생
5. 독일의 녹색당과 생태환경운동. 사회 제문제 대한 고민과 사회문제에 대한 책 번역. 만해의 영향.
    독일에서 귀국하였고, 상당히 민주화 되었다. 독일에서 또 하나 녹색당이 있었고, 환경운동이 당시에도 보편화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태환경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또한 불교 기초학을 위한 사전편찬이나 언어 정리, 경전번역은 매우 중요함을 깨닫고 각종 정보를 얻었다. 국내 있으면서도 감옥을 오가면서도 불경 번역과 이론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국내에서 70년대에 활동할 때 여익구 선생은 사회적인 것이었고, 정치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정치 쪽엔 무관심했다. 당시 민중불교론 발표 후 허우성 교수와 인도의 암베르카르 신불교운동에 대한 내용. 일본책을 번역하였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인 하리잔에 대한 내용. 그리고 월폴라 라훌라의 <불교학개론> 번역. 독일에서는 1910에 번역되었는데 한국에서 당시에도 번역 안 되었다. 그리고 만해의 유심론에 영향을 받았다.
00:29:56 ~ 00:41:39 동영상 재생
1-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민중신학에 관심. 원효의 민중불교가 나의 민중불교운동의 연원.
    라틴 아메리카 민중신학. 독일의 본 회퍼, 파올로 프레리의 교육철학 등에서 배우고 저항 정신을 알았다. 민중불교도 그러한 내용을 공부한 후에 쓸 수 있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원효 스님의 천촌만락을 다니면서 노래한 것이 민중불교라고 해석한다. 불교 법난 때 나는 논문을 쓰기 바빴고, 시위에 가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80년대 불교계에서 시위하거나 운동하던 이들이 <민중불교운동론>을 읽었다고 확인하였다. 번역을 위해 써클 활동이나 불교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00:41:40 ~ 00:54:45 동영상 재생
2회차 면담 / 2010-08-20 / 01:38:03
1. 면담개요
전재성의 민중불교운동론은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화>지 폐간호에 지학순 주교의 활자와 함께 전재성의 ‘민중불교론’이 표지를 장식하였고, 이는 80년대 불교인들의 민주화 운동은 물론 승려들에게도 민주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는 계기였다.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불교의 법난(法亂)은 민중불교운동을 확산시켰고, 그 이론적 토대가 전재성(전서암)의 원고였다. 그러나 그는 1980년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현장 중심의 민주화가 아닌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철학과 논리를 찾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여기서 거지성자 페터노이야르를 만나며, 전재성은 그의 철학적 깊이를 더하였고, 연기(緣起)논리를 발견한 후 니까야 번역에 매진한다.
2. 주요색인어
맛지마 니까야, 삼보법회, 풍전호텔, 심연(深淵), 베트남불교, 연기(緣起), 불평등 사회 해소, 티벳불교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서울농대 입학. 당시 휴폐업으로 인해 전국을 방랑.
    개인 소개. 전쟁 휴유증 부산 피난 시절 기술자인 부친 슬하에서 성장. 고압 압축 기술을 가진 부친. 정밀한 계산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정밀성이 나중에 자신이 학문하는데 이용되었다고 추정한다. 나로호 발사 때도 압축기를 납품했다고 한다. 대학시절 고압가스 화학기능사 기사. 조상에 대한 내용 구술. 할아버지의 종교적 성향 이어받았다고 생각. 할아버지는 한학의 대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서울로 올라왔다. 보광초등학교, 서울대농화학 입학. 수원캠퍼스. 당시 1972년 유신헌법 발표되고, 학생들 데모, 학교 휴폐업이 되던 시절. 공부보다는 오히려 불교 서클활동하면서 전국을 다녔다. 밤에 황룡사 터에서 잠을 자고 이렇게 하면서 전국 사찰 순례하기도 하고. 산사 순례 같은… 민청학련 연루로 감옥에 갔다. 감옥에 갔다 오니 대불련 회장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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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청학련관련 구속되었다가 8.15특사로 풀려났다. 그해 가을 대불련회장으로 당선되다.
    1974년 여름 8.15특사로 출소하다. 출소하자마자 황석영 집에 자주 찾아 다녔고, 고준환 선배와도 어울렸다. 그 이전에 여익구 선배도 만났다. 개운사에서 탄허 스님 계신 곳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당시 김광한 사장도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국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정식으로 민중불교회나 어떤 회, 모임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았다. 민중불교회는 주도세력이 되었기에 나중에 갖다 붙인 이름이다. 민중불교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김상진 할복 자살 장면을 목격하다. 긴급조치 발동되고 몇 명이상 모일 수 없으니, 학생운동 자체가 어려웠다. 4차 화랑대회 말씀해 주시죠. 완주 송광사 근처 초등학교 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의범 지도교수도 가셨지요. 택시를 타고 송광사까지 갔지요. 당시 동국대 원의범 교수가 인도철학과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대불련대회 보통 4박5일이었다. 당시 제가 발표장에서 ‘민중불교운동’에 대해 발표했다.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당시 배춘상 전남대 의대 교수 전보삼 선배가 발표자로 나섰다. 최주홍 등. 호국불교나 화엄사상과 달리 미륵사상이나 이런 거를 아마 내 세워서 민중불교와 연관시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00:10:01 ~ 00:20:00 동영상 재생
3. 대불련에 대한 지원 이한상. 민중불교론 집필과 게재
    민중불교 이전 대불련 선배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72년도 때 고준환 선배라든가 철저히 민족주의자였고, 민중불교운동 때는 민족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배춘상 씨의 발표는 기억 난다. 미륵사상과 연관시킨 것이다. 전보삼씨는 민족적 입장에서 다룬 것이다. 민족의 정기를 선양한다는 의미에서 만해를 내 세우지 않았나 고려된다. 대불련에 대한 지원은 삼보법회 이한상 거사의 지원. 삼보호텔(풍전호텔)을 경영하고 있었으니까. 삼보법회에 탄허 스님 오시고. 내가 대불련 회장 할 때(1975년도)에도 지원이 있었어요. 당시 육백만원을 지원받았죠. 그러나 그 다음해부터 지원이 끊어졌지요. 그 다음부터 정부로부터 반정부단체와 같이 낙인 찍혀서 지원이 끊겼다. 다음 회장인 최연에 이르기까지 민중불교운동 기조였으나, 그 다음 동국대 김영헌 회장부터 불교운동 방향이 바뀐 것이다.1977년 <대화>지 폐간호에 민중불교운동론이 게재되었다. 황석영 선배에게 부탁하여 우여곡절 끝네 출간되어 세상에 나왔다. 원고는 1년 전에 썼는데, 그제서야 빛을 본 것이다. 폐간호에 지학순 주교가 노동자 인권을 보장하라고 큰 자막으로 실렸다. 헤드라인에 민중불교론이 함께 게재되었다. 산중 불교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가졌다. 산중 스님들이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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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인도 불가촉천민 해방자 암베르 카르에 대한 관심
    1970년 당시 불교계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고, 매우 답답했다. 이 때 월폴라 라훌라의 책과 암베르카르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간디와 암베르카르를 놓고 비교하였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및 계급에 대한 문제와 인권에 대하여 구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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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불교운동의 모델로서 보살. 베트남불교의 대사회인식과 분신
    불교운동의 모델을 보살의 맹세로 삼았다. 자비로 중생에 봉사하는 보살이야말로 사회를 아우르는 불교의 사회과학적 원리가 있다. 대불련 하면서도 북한산 무덤가에서 6개월 정도 보내다. 특히 유식과 중관사상의 모순점 해결에 매진하다가 심연(深淵)이라는 단어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서양철학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만해 스님의 종교운동 및 대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와 함께 베트남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베트남 승려의 분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여학생이 분신에 대한 연구도 이어졌다. 월남 승려(틱광툭)의 분신과 민족이라는 부분에 관심을 집중했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이 아쉬웠다.
00:29:35 ~ 00:40:52 동영상 재생
2-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불교와 인연 맺게 된 동기로서 전신화상.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불교적 고찰
    또 다른 관점에서 개인사 회고하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왔고, 전신화상을 입고 개인적 고통 속에서 성장하다보니, 고통에 대하여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개인 고통과 사회의 고통을 알았고, 이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불교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모델을 찾았다. 더 큰 철학적 모델을 찾고자 독일 유학을 시도했고, 이는 시위와 감옥을 오가는 현실에서 도피했던 이유도 있었다. 불교가 갖는 내면의 깊은 철학적 바탕을 연구했으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의 고민 속에서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실제로 평등을 강조했을 때, 평등을 위해 오히려 권력이 집중되는 모순을 안는다는 것. 자유를 외치지만 그것이 독점되면 또 다른 불평등을 예고하는 모순이 나타난다. 이것이 부자유하다는 사회구조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운동이라는 점이다. 불교의 연기(緣起)사상이야말로 모순점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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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사회적 고찰에 의한 연구로서 연기(緣起)-니까야 연구로 연계
    연기에 기초한 불교, 즉 초기경전으로서 남방계 불경인 니까야이다. 그래서 니까야를 연구하고 번역한다. 사회에 대해 절대적 평등이나 자유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의한 대상의 인정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불교의 토대로서 힌두 연구. 그리고 서양철학이 매우 직관적이며 비약이 심하다고 보았다. 진정한 불교를 보는 관점을 기르기 위해 독일유학과 서양철학을 통한 불교 접근을 필요로 했다. 당시 독일 도서관에 번역된 니까야을 읽었다. 불교가 성했던 우리나라도 번역하지 않은 니까야를 독일에서 읽다니. 거리의 수행자 페터 노이야르는 이민자 봉사에 매진하며 무소유로 사는 삶이었다. 이같은 삶을 조명하고 싶었고, <거지성자>라는 책으로 써서 출판했다. 니까야 번역이든, <거지성자> 출판이든 대 사회적 고민의 결과이다. 특히 쾰른에서 본까지 도보 여행하면서 그들이 버린 빵조각으로 연명했던 체험을 회고한다. 청정한 영혼에서 우러나는 관점으로 라인강과 그 자갈들을 보게 되다.
00:10:44 ~ 00:23:30 동영상 재생
3. 페터 노이야르를 통한 영혼의 울림. 니까야 번역 소개
    니까야 연구 및 페터노이야르를 통해 불교적 관점을 키웠고, 그 초기불교의 관점을 다시 티벳 대승불교로 시야를 확대한다. 티벳의 밀라레빠가 체험한 신비처럼, 페터 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자연 속에 있다는 체험을 가질 수 있었다. 페터선생의 생활 속에서 석가모니의 생활상을 느꼈다. 국내 활동에서 힘이 부칠 때 독일 페터 선생을 만나러 가기도 한다. 번역된 니까야 경전 소개.
00:23:31 ~ 00:31:35 동영상 재생
2-5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사회에 대한 갈등 해소로서 부처와 이교도와의 대화 고찰. 대승경전 번역으로 전환.
    자신이 번역한 니까야 책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부처님과 바라문 사제들과의 대화에서 나타는 지혜는 승원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내용들이다. 특히 이교도와의 대화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관점의 극복을 내 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빨리 한글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전을 제작하였다. 전 세계에 번역된 <금강경>을 모아 연구하다가 대승경전이 발생한 토대를 알게 되었다. 상당히 타락한 사회에서 편찬된 것임을 알게 된다.
00:31:36 ~ 00:44:19 동영상 재생
2. 경전 번역의 이유. 정밀한 논리성에 기반한 사회적 문제 해결에 그 목적
    대승경전 편집은 사회의 타락상을 반영하며, 불교가 종교적으로 뿌리 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 대승경전 핵심이 니까야이다. 중국불교는 중국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격의(格義)불교화, 도가사상 도입이 일어난 측면이 있다. <반야심경>의 오온(색.수.상.행.식) 번역도 티벳과 중국이 다르다는 것이다. 티벳불교는 중국불교보다 논리적이고 직관적이 측면이 많다. 인도는 경전을 버렸지만, 티벳은 온전히 보관하고 있다. 거대한 분량이 남아 있으나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정밀한 논리성에 역점을 두었다.
00:44:20 ~ 00:50:24 동영상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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