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해방 이후 한미관계와 민간교류: 민간활동가 구술생애사 자료 수집
2. 구술개요
유년 시절, 선교사가 된 동기, 가족 관계, 신학교 재학 후 선교사가 된 과정, 1964년 한국 파견 과정, 파견 전 한국에 대한 이해, 한국어 교육, 영종도와 김포에서 사역, 서울 옥수동성당 봉직, 유신체제와 인혁당 사건 시기의 일화, 부산 반송동성당 봉직, 메리놀선교회의 선교 방침, 1992년 한국 재파견, 2000년대 중국 선교, 미국 귀국 후 이야기 등
1회차 면담 / 2020-02-05 / 01:40:30
1. 면담개요
1937년 2월 10일 펜실베니아주 Oil City에서 5남 1녀 중 5번째로 출생
위로 모두 형, 여동생, 어머니가 딸을 선호했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것은 여동생 덕분이라고 말함.
큰 형 2차 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 D-Day에 네덜란드 전선에서 비행기 낙하부대에서 활약하다가 18세의 나이로 전사
지역 천주교 학교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성당 부속학교에 다님
학교와 집, 성당을 오가는 생활, 차도 없고 걸어 다님.
본인이 선교사가 된 것은 큰 형의 전사라는 영향이 큼.
고교 졸업 후 선교회에 가입 모색, 그러나 교구 신부가 교구 활동 권유
Erie신학교(펜실베니아주) 재학후 Gannon College에서 2년 수학 후 선교사의 길.
본당 신부가 메리놀 일반 전교회 권유하여 시카고 근처 Glen Ellyn 메리놀 신학교 2년 수학하고 보스턴 근처 수련소에서 1년 공부 이후 뉴욕 Ossining 신학대학 4년 수학
고교 졸업 후 9년 수학 후 1964년 6월 13일 40명의 예비 신부와 함께 서품받음.
수영을 좋아하기 때문에 처음 파푸아 뉴기니 생각함. 아프리카도 고려 대상
선교회의 superior general(장상)이 한국에 가라고 함. 한국은 선교회 소속 선배에게서 들은 적은 있었음,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 배타고 한국행.
가족
아버지는 기차 공사 일 키크고 엄했지만 가족 이외 사람들에겐 인기. 정확하고 단순함, 무슨 일이든 천천히 하는 성격,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종교심은 많지 않음.
어머니는 정반대 활달·명랑하고 식사도 빨리 함. 독실한 신자. 집이 이웃이 모이는 장소. 친척들과 교유
아버지는 스포츠 좋아하지만 본인은 별로임. 말하는 게 서툴렀는데(말더듬음) 고등학교부터 잘함.
2년 위인 넷째 형님(Den?)은 스포츠, 공부 모두 잘함, 함께 한 방 쓰며 특히 친함.
전사한 첫째 형(Joe)과 자신, 그리고 여동생은 어머니 닯음. 자신이 특히 큰 형을 닮아 형 전사한 후에도 형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음.
현재 본인과 여동생만 생존, 집안이 장수하는 집안은 아님
대학교 때는 살이 찌지 않았으나 다시 한국가서 살이 찜
둘째 형은 변호사 독실한 신앙
자신은 형 대신해서 외국 가서 하느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
여동생은 수녀가 됨. 집에서 가족 기도, 잘 때에는 성수 뿌리고
아버지는 본인이 외국가는 거를 서운해 함. 아버지는 노조 활동, 그러나 자신이 노조 활동하듯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
어머니는 본인이 수도자가 되는 걸 아쉬워 했지만, 그보다는 딸이 수녀원(분도회)에 갈 때 더 충격받음.
당시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 여동생은 교사로서 일함.
신학교 외방전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한국에 대한 것으로 한국 전쟁, 가난 등 언급함.
전교회 신부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도 있었고 1923년부터 평양에서 메리놀전교회 잠깐 언급함.
1964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 타고 거의 한 달 걸려 9월 2일 인천 도착.
12명의 선교회 신부 함께 승선
일본 요코하마 거쳐 오끼나와에서 며칠 정박. 미군기지 물자 군수 관계인 듯.
고베 거쳐 부산항에서 5일 정박 동안 배 칠하고 녹 벗겨내는 작업 밤낮으로 실행. 아주머니들 작업 소리가 계속 들려 힘들었음. 질병 바이러스로 메리놀 선교회 부산 신부들이 방문했지만 승선한 신부들은 밖에 나가지 못하고 배에만 머뭄.
인천에 9월 2일 도착. 부산 아주머니 노동자 힘든 일. 부산이나 인천에서 작은 배로 다가와서 물건 사기를 권유. 가난한 한국인.
인천 도착해서 메리놀 소속 나길모 굴리엘모 신부(면담일 이틀 전인 2020년 2월 3일 미국에서 선종했다는 한국 신문 기사를 면담자가 봄)가 맞아 줌. 나 신부집과 차이나타운에 있는 신부 숙소에서 숙박함.
서울 중곡동 본부 학교 수도여학교(세종대학교) 골프장, 어린이대공원이 있었음. 비포장 흙길 화양동까지 걸어 다님 합승타고 시내까지 40분 - 1시간 걸려 오감.
명동의 명도원에서 한국어 공부 2년 그 이전에는 1년이었는데 지부장 방침으로 바꿈.
함께 온 12명 중 5명은 일본에서 내림. 2명은 기존 인원이고 6명 한국어 수업
오전 한국어 수업 오후에 tutor와 공부, 수업에 사용한 교재를 졸업하면서 간행
1년 지나 2년 들어가는 시점에서 주말에 성당에 가서 보조 신부 역할
라틴어로 미사하기 때문에 진행 가능.
2년 연수 마치고 인천 산곡동 부평1동 성당
당시 산곡동은 구 일본인 군인 거주하던 곳에 미군 병원, 미군 부대(에스캄?)
부평1동에 공소가 다수 있어서 한 달에 1번씩 방문, 김포 계산동
1월 영종도 주임신부인 James P. Sinnott가 병으로 자리가 비어, 대신하여 성당에서 3개월 생활, 전기도 없고 물도 펌프로 기르는 힘든 환경. 성산동 등 여러 섬 순회, 신문 두 곳만 구독(성당과 의사댁) 당시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등 소식이 많았음. 가는 곳마다 미역국 대접, 잠은 회장댁
3년 후 김포 면소재지 주임신부로 부임해서 6년 봉직.
신자들 대부분이 농사짓고 사는 오래된 성당. 전임 신부 두 사람 모두 1년 정도 있다가 떠나감, 신자 회장들 많음, 본인은 주로 신자들 이야기 경청하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
농민회, 신용조합, 양돈조합, 채소조합 등 여러 조합 활동, 협동조합, 카톨릭농민회 가입
농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조금 알게 됨. ‘좋습니다’ 신부로 불림.
농민들의 정부 정책 불신 (정부가 하라고 하는 것 하면 실패하고 반대로 하면 성공하다는 믿음)
지금도 한국에 오면 성당 구 회장들 만남. 회장 아들이 김포 시장 재선.
지금은 김포가 전철, 대학교 등 들어서 급격한 사회 발전
신도들이 이스라엘, 로마, 등등 가 보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생활 수준 향상.
1969년- 73년 가톨릭농민회, 신협, 생산 협동조합 젊은 사람 도시로 가고 노력하지 않음.
농사는 잘 모르지만 자신이 함께 있는 게 의미.
2. 주요색인어
메리놀 선교회, 외방전교회, 한국전쟁, 부산항, 인천 차이나타운, 제임스 시노트 (James Sinnott), 가톨릭농민회, 신용협동조합, 농업정책, Michael J. Bransfield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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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담시작 멘트/ 고향/ 유년시절/ 큰형의 전사/ 신학교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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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2월 10일 펜실베니아주 Oil City에서 5남 1녀 중 5번째로 출생. 위로 모두 형, 여동생, 어머니가 딸을 선호했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것은 여동생 덕분이라고 함.
- 큰 형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D
- Day에 네덜란드 전선에서 비행기 낙하부대에서 활약하다가 18세의 나이로 전사
- 지역 천주교 학교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성당 부속학교에 다님
- 학교와 집, 성당을 오가는 생활, 차도 없고 걸어 다님.
- 본인이 선교사가 된 것은 큰 형의 전사라는 영향이 큼.
- 고교 졸업 후 선교회에 가입 모색, 그러나 교구 신부가 교구 활동 권유
- Erie신학교(펜실베니아주) 재학후 Gannon College에서 2년 수학 후 선교사의 길.
- 본당 신부가 메리놀 일반 전교회 권유하여 시카고 근처 Glen Ellyn 메리놀 신학교 2년 수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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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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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리놀회 선택배경/ 한국파송 결정과정/ 부친과 모친/ 가정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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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 근처 수련소에서 1년 공부 이후 뉴욕 Ossining 신학대학 4년 수학
- 고교 졸업 후 9년 수학 후 1964년 6월 13일 40명의 예비 신부와 함께 서품받음.
- 수영을 좋아하기 때문에 처음 파푸아 뉴기니 생각함. 아프리카도 고려 대상
- 선교회의 superior general(장상)이 한국에 가라고 함. 한국은 선교회 소속 선배에게서 들은 적은 있었음,
-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 배타고 한국행.
- 아버지는 기차 공사 일 키크고 엄했지만 가족 이외 사람들에겐 인기. 정확하고 단순함, 무슨 일이든 천천히 하는 성격,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종교심은 많지 않음.
- 어머니는 정반대 활달·명랑하고 식사도 빨리 함. 독실한 신자. 집이 이웃이 모이는 장소. 친척들과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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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00 ~ 00: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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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형제관계/ 가정의 종교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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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스포츠 좋아하지만 본인은 별로임. 말하는 게 서툴렀는데, 고등학교부터 잘함.
- 2년 위인 넷째 형님(Den?)은 스포츠, 공부 모두 잘함, 함께 한 방 쓰며 특히 친함.
- 전사한 첫째 형(Joe)과 자신, 그리고 여동생은 어머니 닯음. 자신이 특히 큰 형을 닮아 형 전사한 후에도 형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음.
- 현재 본인과 여동생만 생존, 집안이 장수하는 집안은 아님
대학교 때는 살이 찌지 않았으나 다시 한국가서 살이 찜둘째 형은 변호사 독실한 신앙- 자신은 형 대신해서 외국 가서 하느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
- 여동생은 수녀가 됨. 집에서 가족 기도, 잘 때에는 성수 뿌리고
- 아버지는 본인이 외국가는 거를 서운해 함. 아버지는 노조 활동, 그러나 자신이 노조 활동하듯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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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 ~ 00:2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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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송 전 한국에 대한 이해/ 한국으로의 파송과정(일본 오키나와-오키나와-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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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본인이 수도자가 되는 걸 아쉬워 했지만, 그보다는 딸이 수녀원(분도회)에 갈 때 더 충격받음.
- 당시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 여동생은 교사로서 일함.
- 신학교 외방전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 한국에 대한 것으로 한국 전쟁, 가난 등 언급함.
- 전교회 신부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도 있었고 1923년부터 평양에서 메리놀전교회 잠깐 언급함.
- 1964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화물선 타고 거의 한 달 걸려 9월 2일 인천 도착.
- 12명의 선교회 신부 함께 승선
- 일본 요코하마 거쳐 오끼나와에서 며칠 정박. 미군기지 물자 군수 관계인 듯.
- 고베 거쳐 부산항에서 5일 정박 동안 배 칠하고 녹 벗겨내는 작업 밤낮으로 실행. 아주머니들 작업 소리가 계속 들려 힘들었음. 질병 바이러스로 메리놀 선교회 부산 신부들이 방문했지만 승선한 신부들은 밖에 나가지 못하고 배에만 머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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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00 ~ 00:3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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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부임과정(부산-인천)/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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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에 9월 2일 도착. 부산 아주머니 노동자 힘든 일. 부산이나 인천에서 작은 배로 다가와서 물건 사기를 권유. 가난한 한국인.
- 인천 도착해서 메리놀 소속 나길모 굴리엘모 신부(면담일 이틀 전인 2020년 2월 3일 미국에서 선종했다는 한국 신문 기사를 면담자가 봄)가 맞아 줌. 나 신부집과 차이나타운에 있는 신부 숙소에서 숙박함.
- 서울 중곡동 본부 학교 수도여학교(세종대학교) 골프장, 어린이대공원이 있었음. 비포장 흙길 화양동까지 걸어 다님 합승타고 시내까지 40분
- 1시간 걸려 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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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00 ~ 00:4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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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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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도원과 한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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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의 명도원에서 한국어 공부 2년 그 이전에는 1년이었는데 지부장 방침으로 바꿈.
- 함께 온 12명 중 5명은 일본에서 내림. 2명은 기존 인원이고 6명 한국어 수업
- 오전 한국어 수업 오후에 tutor와 공부, 수업에 사용한 교재를 졸업하면서 간행
- 1년 지나 2년 들어가는 시점에서 주말에 성당에 가서 보조 신부 역할
- 라틴어로 미사하기 때문에 진행 가능.
- 2년 연수 마치고 인천 산곡동 부평1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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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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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종도와 김포에서의 사역/ 미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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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산곡동은 구 일본인 군인 거주하던 곳에 미군 병원, 미군 부대(에스캄?)
- 부평1동에 공소가 다수 있어서 한 달에 1번씩 방문, 김포 계산동
- 1월 영종도 주임신부인 James P. Sinnott가 병으로 자리가 비어, 대신하여 성당에서 3개월 생활, 전기도 없고 물도 펌프로 기르는 힘든 환경. 성산동 등 여러 섬 순회, 신문 두 곳만 구독(성당과 의사댁) 당시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등 소식이 많았음. 가는 곳마다 미역국 대접, 잠은 회장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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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00 ~ 00: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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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협동조합/ 김포에서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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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후 김포 면소재지 주임신부로 부임해서 6년 봉직.
- 신자들 대부분이 농사짓고 사는 오래된 성당. 전임 신부 두 사람 모두 1년 정도 있다가 떠나감, 신자 회장들 많음, 본인은 주로 신자들 이야기 경청하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
- 농민회, 신용조합, 양돈조합, 채소조합 등 여러 조합 활동, 협동조합, 카톨릭농민회 가입
- 농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조금 알게 됨. ‘좋습니다’ 신부로 불림.
- 농민들의 정부 정책 불신 (정부가 하라고 하는 것 하면 실패하고 반대로 하면 성공하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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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 ~ 00:2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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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포생활/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Michael Brans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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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한국에 오면 성당 구 회장들 만남. 회장 아들이 김포 시장 재선.
- 지금은 김포가 전철, 대학교 등 들어서 급격한 사회 발전
- 신도들이 이스라엘, 로마, 등등 가 보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생활 수준 향상.
- 1969년
- 73년 가톨릭농민회, 신협, 생산 협동조합 젊은 사람 도시로 가고 노력하지 않음.
- 농사는 잘 모르지만 자신이 함께 있는 게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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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00 ~ 00:3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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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ichael Brans Field/ 바티칸 공의회/ 자조(self-help)/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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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생각이 크게 달라졌음
- 노동자와 나병환자들을 돕는 영성의 의미(spiritual meanings)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교활동이 전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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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00 ~ 00:5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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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20-02-05 / 01:38:59
1. 면담개요
1973년 서울 본당 옥수동성당 설립
김포 있을 때 강화 자주 놀러감
천 미카엘 신부 (Michael Bransfield) 선배 신부, 강화성당. JOC 여부는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노동자를 대상으로 활동
배급(구호물자) 이용해서 양돈, 간척 등 여러 사업 활발하게 추진한 분. 한국에서 선종.
그러나 그 세대와 도 신부 세대의 의견 차이, 자신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영향, 그 이전과 이후 세대가 다름. 이전 세대는 배급, 구호물자 이용해서 성당 짓고 병원, 고아원, 보육원 등 사회 시설 적극 추진했지만 자신은 그게 한국 신도의 자율적 발전인가에 대해 회의적
옥수동 성당으로 전출 이유는 한국메리놀선교회 부지부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옥수동과 중곡동을 오감.
금호동 분리해서 옥수동성당 분립, 금호동 신부는 반기지 않음.
2층집 얻어서 시작, 사제관과 2층 건물 건립, 그 땅에 나중에 지하철이 들어옴,
4년 동안 봉직 (1973-76년), 당시 옥수동은 빈촌, 주민 대부분은 산넘어 시내에 나가 장사
전라남북도 이농민이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음.
신용협동조합, JOC 18-22세 공장 근로자 모임 장소는 사제관에서
환자들 돌보고 가정 방문 나가 일하기 때문에 밤7 – 12시에, 노동자 아버지가 암으로 고통, 성당 다니는 공장 여공의 아버지가 암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데 함께 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 (눈시울을 붉힘). 아버지는 병자성사 후 입교하고 죽음.
자신이 신품받을 때 27살, 당시 35세의 나이.
JOC, 20명 내외 청년으로 상호부조, 함께 모여 친목 도모
1976년 부지부장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되면서 중곡동 본부에서 근무
James P. Sinnott 근무. 함세웅 신부와 동기, 영종도 본당신부, 자신이 부지부장 당시에 추방(1975년 4월 인혁당 사형에 대한 항의로 한국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함),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3선개헌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민주주의 인권에 대한 지원은 50인 모임에서 월요 모임으로 발전) 도 신부는 월요 모임 언급. (무슨 요일인지는 잊었다고 함)
1976년부터 83년까지 메리놀선교회 한국지부 지부장 선출
명동성당, 광주, 원주 지학순 지교 투옥, 기도, 미사
정의구현사제단 기도모임 참석
지학순 주교, 최 Benedict 신부, Benedict Zweber
(미네소타 출신으로 시골에서 집안이 좋음. 덕적도 오래 있으면서 성당 건립 등 활동
인천 본당 신부 주임, 1959년에 천 미카엘 신부와 함께 신품 받음. 한국에 이어 러시아 사할린에서 포교 활동)
한국 KCIA는 거주면허증의 시간 조절(3개월 – 1년)로 반정부 활동 선교사 통제
시노트 신부 추방 당시 선교회에서는 비행기표 구입하지 않겠다고 버팀
시노트 추방 이유는 인혁당 사건 비판, 거주면허증 박탈해 놓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체류라는 이유.
당시 자신은 지부장으로 중곡동 메리놀선교회 집수리 중.
카터 대통령 방한 반대 서명 운동
개신교, 가톨릭 포함하여 외국인 선교사 33명 서명, 이 중에서 13명이 메리놀선교회 소속
이 사실을 한국정부가 알게 되어 서명자 모두 추방 방침을 세움.
미대사관과 김수환 추기경 등의 노력으로 추방은 면함.
그럼에도 카터 방한 (1979년 6월) 이루어짐.
자신은 가톨릭 대표 두 명 (메리놀과 골롬반) 중의 한 명으로 청와대 만찬 참석.
말도 하지 못하고 악수만, 그러나 수행원과 미 대사관에서 한국 사정 청취
지부장으로 다른 나라 방문,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한국 문제, 사건 등 교류, 노동자 문제나 서로 동향 소식 전함.
3년에 한 번 미국 방문. 1, 2달 체류 후 귀환.
다른 나라와 한국의 비교
한국은 민심 후함 생활 리듬이 느리고. 그러나 지금은 경쟁, 서로 바빠서 만나기도 힘든 생활.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함.
1983년 10월 1일 지부장 그만 두고 부산 반송동본당 신부로 3년 재직.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이질적, 서로 다투고 반목
청년회, 신용협동조합이 이미 존재. 부산 본당으로 오기 이전에도 부산에는 수영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종 방문.
반송동 – 타지 사람, 인천 – 김포는 지역이 안정되어 있지만 부평은 서울보다 인천이 직장이라 서울 사람이 많았음. 서울 옥수동은 전라도
한국은 계통(위계질서, 손위아래 관계 등)가 심함, 나중에 보니 중국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편함.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 때 등에서 신경 쓸 일이 많음. 중국 생활은 오히려 ‘시원’
한국도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각박해 짐.
메리놀 선교회. 평양에서 청주교구, 인천교구로.
파리외방선교회, 골롬반회, 왜관 분도회 등과 함께 한국 선교.
기존 한국 성당에서 개척해서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한국 교구로 양도하고 다시 개척하는 형태.
2. 주요색인어
메리놀 선교회, 옥수동 본당, 무허가판잣집, 지역조직(신용조합, JOC), 도시빈민, 가정방문, 지부장, 중곡동, James Sinnott, 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주교, 베네딕트 즈웨버(Benedict Zweber), 거주면허증, 인민혁명당, 중앙정보부(KCIA), 추방사건, 김수환 추기경, 박정희 유신체제,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한국의 인심, 부산 반송동 성당, 반송동, 화장터, 본당 개척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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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수동 본당/ 무허가판잣집/ 지역조직(신용조합, J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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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서울 본당 옥수동성당 설립
- 김포 있을 때 강화 자주 놀러감
- 천 미카엘 신부 (Michael Bransfield) 선배 신부, 강화성당. JOC 여부는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노동자를 대상으로 활동
- 배급(구호물자) 이용해서 양돈, 간척 등 여러 사업 활발하게 추진한 분. 한국에서 선종.
- 그러나 그 세대와 도 신부 세대의 의견 차이, 자신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영향, 그 이전과 이후 세대가 다름. 이전 세대는 배급, 구호물자 이용해서 성당 짓고 병원, 고아원, 보육원 등 사회 시설 적극 추진했지만 자신은 그게 한국 신도의 자율적 발전인가에 대해 회의적
- 옥수동 성당으로 전출 이유는 한국메리놀선교회 부지부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옥수동과 중곡동을 오감.
- 금호동 분리해서 옥수동성당 분립, 금호동 신부는 반기지 않음.
- 2층집 얻어서 시작, 사제관과 2층 건물 건립, 그 땅에 나중에 지하철이 들어옴,
- 4년 동안 봉직 (1973
- 76년), 당시 옥수동은 빈촌, 주민 대부분은 산넘어 시내에 나가 장사
- 전라남북도 이농민이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음.
신용협동조합, JOC 18- 22세 공장 근로자 모임 장소는 사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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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시빈민과 그 죽음/ 가정방문/ 지부장이 됨/ 중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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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들 돌보고 가정 방문 나가 일하기 때문에 밤7 – 12시에, 노동자 아버지가 암으로 고통, 성당 다니는 공장 여공의 아버지가 암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데 함께 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 (눈시울을 붉힘). 아버지는 병자성사 후 입교하고 죽음.
- 자신이 신품받을 때 27살, 당시 35세의 나이.
- JOC, 20명 내외 청년으로 상호부조, 함께 모여 친목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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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00 ~ 00: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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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옥수동 시절 사람들과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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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40년 만에 다시 찾은 옥수동의 모습
- 옥수동 시절 만난 사람들과의 재회
- 전태일 분신에 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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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James Sinnott/ 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주교/ 베네딕트 즈웨버(Benedict Zweber)/ 거주면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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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부지부장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되면서 중곡동 본부에서 근무
- James P. Sinnott 근무. 함세웅 신부와 동기, 영종도 본당신부, 자신이 부지부장 당시에 추방(1975년 4월 인혁당 사형에 대한 항의로 한국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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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00 ~ 00:3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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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민혁명당 사건/ 중앙정보부(KCIA)/ 추방사건/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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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부터 83년까지 메리놀선교회 한국지부 지부장 선출
명동성당, 광주, 원주 지학순 지교 투옥, 기도, 미사- 정의구현사제단 기도모임 참석
- 지학순 주교, 최 Benedict 신부, Benedict Zweber
(미네소타 출신으로 시골에서 집안이 좋음. 덕적도 오래 있으면서 성당 건립 등 활동- 인천 본당 신부 주임, 1959년에 천 미카엘 신부와 함께 신품 받음. 한국에 이어 러시아 사할린에서 포교 활동)
- 한국 KCIA는 거주면허증의 시간 조절(3개월 – 1년)로 반정부 활동 선교사 통제
- 시노트 신부 추방 당시 선교회에서는 비행기표 구입하지 않겠다고 버팀
- 시노트 추방 이유는 인혁당 사건 비판, 거주면허증 박탈해 놓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체류라는 이유.
- 당시 자신은 지부장으로 중곡동 메리놀선교회 집수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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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00 ~ 00:4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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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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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유신체제/ 인혁당사건/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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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터 대통령 방한 반대 서명 운동
- 개신교, 가톨릭 포함하여 외국인 선교사 33명 서명, 이 중에서 13명이 메리놀선교회 소속
- 이 사실을 한국정부가 알게 되어 서명자 모두 추방 방침을 세움.
- 미대사관과 김수환 추기경 등의 노력으로 추방은 면함.
- 그럼에도 카터 방한 (1979년 6월) 이루어짐.
- 자신은 가톨릭 대표 두 명 (메리놀과 골롬반) 중의 한 명으로 청와대 만찬 참석.
- 말도 하지 못하고 악수만, 그러나 수행원과 미 대사관에서 한국 사정 청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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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의 인심/ 바쁜 한국인/ 부산 본당 주임신부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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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부장으로 다른 나라 방문,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 한국 문제, 사건 등 교류, 노동자 문제나 서로 동향 소식 전함.
- 3년에 한 번 미국 방문. 1, 2달 체류 후 귀환.
- 다른 나라와 한국의 비교: 한국은 민심 후함 생활 리듬이 느리고. 그러나 지금은 경쟁, 서로 바빠서 만나기도 힘든 생활.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함.
- 1983년 10월 1일 지부장 그만 두고 부산 반송동본당 신부로 3년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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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00 ~ 00: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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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산 반송동 성당/ 등산/ 신용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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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이질적, 서로 다투고 반목
- 청년회, 신용협동조합이 이미 존재. 부산 본당으로 오기 이전에도 부산에는 수영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종 방문.
- 반송동 – 타지 사람, 인천 – 김포는 지역이 안정되어 있지만 부평은 서울보다 인천이 직장이라 서울 사람이 많았음. 서울 옥수동은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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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송동의 화장터 건설 반대운동/ 위계질서/ 한국과 중국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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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송동에서 화장터 건설 반대운동이 있었음.
- 한국은 계통(위계질서, 손위아래 관계 등)가 심함, 나중에 보니 중국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편함.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 때 등에서 신경 쓸 일이 많음. 중국 생활은 오히려 ‘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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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00 ~ 00:3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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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메리놀 선교회의 본당 개척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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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놀 선교회. 평양에서 청주교구, 인천교구로.
- 파리외방선교회, 골롬반회, 왜관 분도회 등과 함께 한국 선교.
- 기존 한국 성당에서 개척해서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한국 교구로 양도하고 다시 개척하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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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00 ~ 00:5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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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면담 / 2020-02-12 / 01:44:03
1. 면담개요
1986년 미국 뉴욕 Westchester county의 Ossining에서 vocation director로 6년 근무
주말에는 구역 내 한국 교포 사목 미사 주재
미국에 오래 있다가 한국인 생활 체험 즐거움. 이주 한국인들은 한국의 한국인들과 비슷했지만 아이들은 많이 다름. 미국 학교 다니고 한국말 서투름.
Westchester county는 미국에서 부유한 구역이라 전반적으로 학군이 좋은 편이지만 한국인들은 그중에서도 좋은 곳을 찾아 감.
한국인들은 시내 흑인 동네에서 사업, 서로간에 충돌이나 문화적 갈등. 한국인들이 미국 국민과 대화, 생활하려는 노력이 아쉬움.
1992년 한국에서 인천 산곡5동 성당 보좌로 근무
현대아파트 단지. 신자들 대부분은 부인들이고 남자들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 인천에 있지만 지역과 별로 관계가 없이 서울에서 근무하고 생활
한국인은 이사가 잦음. 신도시로 이주하려는 경향 이해하기 힘듬. 경제적 이유가 큰 것같다.
6년 전에 비해 한국인들은 바쁘고 경쟁적으로 살아간다는 느낌. 모이는 시간 많지 않고 미래 계획을 세워야 만날 수 있다.
중국으로 가게 된 동기.
한국 신부가 많아지고 메리놀에서 본당 운영할 동기가 사라짐.
북한에 관심 연장에서 중국 동북지역(만주) 중국 신부가 한국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파견.
외국인의 종교 활동은 금지되었지만 연변지역은 허락, 조선족 신자 돌봄.
길림성에서 이미 메리놀 소속 미국인 신부 4명이 활동
길림시에서는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거주는 신학교에서 했으나 공안이 허락하지 않아 따로 나와 숙소를 구해야 했다.
비자를 얻기 위해 취직이 필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있는) 사립학교 영어교사, 신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침. 1주일에 2번 신학생들과 생활
신학생 중에 조선족은 4명, 신학생 전체는 100명 이내(80명 정도) 나머지는 한족. 길림 본당에서 미사, 5년 지남.
중국 정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있는 줄은 알고 있는 상태
메리놀 선교회는 길림성, 광동성
1993년 처음 장춘 동북사범대학에서 1년 동안 중국말 배움.
1994 - 2001년 길림성에서 7년 생활
2001년도부터 요녕성에서 5년 거주
이전에 메리놀이 설립한 여러 교구가 있다가 당시는 1개 교구(푸산, 무산? 교구)
심양교구, 신학교, 심양공업대학 영어 강사.
800만 인구에 대성당 1개(주교좌 성당), 중국인 신자, 진 주교
바티칸과 중국 정부 사이에 미묘한 관계
나중에 다른 신부들이 와서 함께 생활.
동북대학에서 메리놀 선교회 소속 신부 몇 사람이 일함.
중국 정부는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막지도 않았다.
심양대학이 길림대학보다 약간 큼. 진 주교가 죽고 나서 미국에서 공부한 배 신부가 이어받음.
2006년 남쪽으로 가기를 원해(춥고 대기 오염 심해) 광동성 장문(강문시)
community college에 2년 (1년 단위 비자 갱신) 70세 이상이면 취업 비자 발급 어려움.
강문시에 신학교는 없고 수녀원, 성당
메리놀 선교회가 중국에 제일 먼저 들어간 곳으로 홍콩, 마카오가 가까움.
만다린이 아니고 광동어 사용 날씨는 따뜻하지만 습기가 많음. 공장지대 동북부보다 부유한 지역
광동어, 만다린 사용하고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 가르치는 데 어려움.
2008년 다시 연변으로 감.
가난하고 젊은 사람들 거의 없음. 연변 조선족에 대신하여 점차 중국인 이입. 처음에는 조선족이 많았으나 지금은 한족이 절반 정도 차지할 정도로 늘어남.
이전에 가르친 신학교 학생들이 신부.
3개월마다 관광 비자 갱신, 경찰 보고 북한 사람들, 탈북자들 만남.
이들이 가끔 성당이나 교회와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음.
잦은 이동으로 관계를 지속하기도 힘듬. 한국어를 다시 사용해서 좋았음.
신부 임용 50주년 기념
2013년 심양에서 다시 5년 근무
신학교, 수녀원 100명 중에서 영어 가르침
대성당에서 영어 미사. 외국인 유학생 특히 아프리카, 유럽(독일, 프랑스, 폴란드), 필리핀 등에서 온 학생, 그리고 현지에 있는 BMW공장 관계자.
각 학교에 영어 강좌, 외국인 특히 한국인 자녀 교육과 사업 등으로 많음. 국제 도시화
중국문화와 한국문화 비교
비슷한 점,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점은 한국은 순서나 계급, 상하에 따라 움직이고 민감.
중국인은 높임말도 없고 자유로움.
장춘에서 현지인은 한국사람 이해 못한다고 말함. 높고 낮은 것 따지느라 재미없음.
중국·미국 생활이나 말은 비슷. 한국은 약간 다르다.
그러나 지부장 시절 다른 나라 다녀보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비슷. 세계가 더 ‘짧아지는’ 것같다(긴밀해진다는 의미임)
K-pop, 음악, 한류, 아이돌
2017년 성탄 지나고 2018년 초부터 시카고 메리놀 선교회에서 3년 째 신학생 지도
부모의 가계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할머니 대에 미국으로 이주. 외할머니의 아일랜드 고향 마을에 몇 번인가 가봄.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도 아일랜드계이기는 하지만 계보를 잘 모름.
아버지의 외할머니 쪽은 독일계
해방신학 들어봄. 한국에서 민중신학
James Sinnott신부 인천교구 부주교. 검소, 간결한 삶 지향, 조용하고 얌전, 책읽기 좋아함.
한국에서 감옥가고 탄압받는 것 목격하고 활동에 나서게 됨.
김대중 시대(혹은 김영삼 시대?) 한국으로 돌아와서 메리놀 선교회에서 일생을 마치고 한국에 묻힘.
최 베네딕트 신부, 시노트 신부와 같은 인천교구 소속으로 함께 반정부(라고 하지 않고 자유, 정의, 평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말함.
메리놀 선교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양립(진보는 13인 서명자)
도 신부 본인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본인도 진보쪽이라고 말함.
메리놀 선교회는 파리외방선교회 전교 방식 그대로 따름. 콜롬반도.
교구 중심 선교 인천, 청주, 부산, 한국외방전교회
어느 나라에 가든지 주교단, 교구를 위해 일하다가 마치게 되면 다른 곳으로 감. 지금은 방글라데시, 네팔, 태국 등에서 활동
한국에서의 mission은 마쳤다는 판단에서 동남아시아로 감.
한국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끈끈한 친구 관계가 인상적.
2. 주요색인어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 부평 산곡동, 중국 길림(吉林)의 신학교, 조선족, 길림신학교, 동북사범대학교, 심양 교구, 커뮤니티 컬리지(community college), 연변, 탈북자, 심양, 영어 미사, 아프리카인, 필리핀인, 미국 귀국, 민중신학,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시노트 신부, 즈웨버 신부, 한국선교경험(총평)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3-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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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 부평 산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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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미국 뉴욕 Westchester county의 Ossining에서 vocation director로 6년 근무
- 주말에는 구역 내 한국 교포 사목 미사 주재
- 미국에 오래 있다가 한국인 생활 체험 즐거움. 이주 한국인들은 한국의 한국인들과 비슷했지만 아이들은 많이 다름. 미국 학교 다니고 한국말 서투름.
- Westchester county는 미국에서 부유한 구역이라 전반적으로 학군이 좋은 편이지만 한국인들은 그중에서도 좋은 곳을 찾아 감.
- 한국인들은 시내 흑인 동네에서 사업, 서로간에 충돌이나 문화적 갈등. 한국인들이 미국 국민과 대화, 생활하려는 노력이 아쉬움.
- 1992년 한국에서 인천 산곡5동 성당 보좌로 근무
- 현대아파트 단지. 신자들 대부분은 부인들이고 남자들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 인천에 있지만 지역과 별로 관계가 없이 서울에서 근무하고 생활
- 한국인은 이사가 잦음. 신도시로 이주하려는 경향 이해하기 힘듬. 경제적 이유가 큰 것같다.
- 6년 전에 비해 한국인들은 바쁘고 경쟁적으로 살아간다는 느낌. 모이는 시간 많지 않고 미래 계획을 세워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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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길림(吉林)의 신학교,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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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으로 가게 된 동기: 한국 신부가 많아지고 메리놀에서 본당 운영할 동기가 사라짐.
- 북한에 관심 연장에서 중국 동북지역(만주) 중국 신부가 한국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파견.
- 외국인의 종교 활동은 금지되었지만 연변지역은 허락, 조선족 신자 돌봄.
- 길림성에서 이미 메리놀 소속 미국인 신부 4명이 활동
- 길림시에서는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거주는 신학교에서 했으나 공안이 허락하지 않아 따로 나와 숙소를 구해야 했다.
- 비자를 얻기 위해 취직이 필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있는) 사립학교 영어교사, 신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침. 1주일에 2번 신학생들과 생활
- 신학생 중에 조선족은 4명, 신학생 전체는 100명 이내(80명 정도) 나머지는 한족. 길림 본당에서 미사, 5년 지남.
- 중국 정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있는 줄은 알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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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길림신학교, 동북사범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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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놀 선교회는 길림성, 광동성
- 1993년 처음 장춘 동북사범대학에서 1년 동안 중국말 배움.
- 1994
- 2001년 길림성에서 7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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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심양 교구, 동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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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도부터 요녕성에서 5년 거주
- 이전에 메리놀이 설립한 여러 교구가 있다가 당시는 1개 교구.
- 심양교구, 신학교, 심양공업대학 영어 강사.
- 800만 인구에 대성당 1개(주교좌 성당), 중국인 신자, 진 주교
- 바티칸과 중국 정부 사이에 미묘한 관계
- 나중에 다른 신부들이 와서 함께 생활.
- 동북대학에서 메리놀 선교회 소속 신부 몇 사람이 일함.
- 중국 정부는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막지도 않았다.
- 심양대학이 길림대학보다 약간 큼. 진 주교가 죽고 나서 미국에서 공부한 배 신부가 이어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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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문의 커뮤니티 컬리지(community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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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남쪽으로 가기를 원해(춥고 대기 오염 심해) 광동성 장문(강문시)
- community college에 2년 (1년 단위 비자 갱신) 70세 이상이면 취업 비자 발급 어려움.
- 강문시에 신학교는 없고 수녀원, 성당
- 메리놀 선교회가 중국에 제일 먼저 들어간 곳으로 홍콩, 마카오가 가까움.
- 만다린이 아니고 광동어 사용 날씨는 따뜻하지만 습기가 많음. 공장지대 동북부보다 부유한 지역
- 광동어, 만다린 사용하고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 가르치는 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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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00 ~ 00:4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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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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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변의 조선족과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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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다시 연변으로 감.
- 가난하고 젊은 사람들 거의 없음. 연변 조선족에 대신하여 점차 중국인 이입. 처음에는 조선족이 많았으나 지금은 한족이 절반 정도 차지할 정도로 늘어남.
- 이전에 가르친 신학교 학생들이 신부.
- 3개월마다 관광 비자 갱신, 경찰 보고 북한 사람들, 탈북자들 만남.
- 이들이 가끔 성당이나 교회와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음.
- 잦은 이동으로 관계를 지속하기도 힘듬. 한국어를 다시 사용해서 좋았음.
- 신부 임용 5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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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제도시 심양, 대성당에서의 영어 미사, 아프리카/필리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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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심양에서 다시 5년 근무
- 신학교, 수녀원 100명 중에서 영어 가르침
- 대성당에서 영어 미사. 외국인 유학생 특히 아프리카, 유럽(독일, 프랑스, 폴란드), 필리핀 등에서 온 학생, 그리고 현지에 있는 BMW공장 관계자.
- 각 학교에 영어 강좌, 외국인 특히 한국인 자녀 교육과 사업 등으로 많음. 국제 도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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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귀국, 가족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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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성탄 지나고 2018년 초부터 시카고 메리놀 선교회에서 3년 째 신학생 지도
- 부모의 가계: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할머니 대에 미국으로 이주. 외할머니의 아일랜드 고향 마을에 몇 번인가 가봄.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도 아일랜드계이기는 하지만 계보를 잘 모름. 아버지의 외할머니 쪽은 독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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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중신학,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시노트 신부, 즈웨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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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신학 들어봄. 한국에서 민중신학
- James Sinnott신부 인천교구 부주교. 검소, 간결한 삶 지향, 조용하고 얌전, 책읽기 좋아함.
- 한국에서 감옥가고 탄압받는 것 목격하고 활동에 나서게 됨.
- 김대중 시대(혹은 김영삼 시대?) 한국으로 돌아와서 메리놀
- 선교회에서 일생을 마치고 한국에 묻힘.
- 최 베네딕트 신부, 시노트 신부와 같은 인천교구 소속으로 함께 반정부(라고 하지 않고 자유, 정의, 평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말함.
- 메리놀 선교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양립(진보는 13인 서명자)
- 도명헌 신부 본인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본인도 진보쪽이라고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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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메리놀회 선교지역, 교구, 한국선교경험의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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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놀 선교회는 파리외방선교회 전교 방식 그대로 따름. 콜롬반도.
- 교구 중심 선교 인천, 청주, 부산, 한국외방전교회
- 어느 나라에 가든지 주교단, 교구를 위해 일하다가 마치게 되면 다른 곳으로 감. 지금은 방글라데시, 네팔, 태국 등에서 활동
- 한국에서의 mission은 마쳤다는 판단에서 동남아시아로 감.
- 한국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끈끈한 친구 관계가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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