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앨범에 있는 사진설명, 집안내력, 출생과 성장, 무산광산 재직시절, 식민지말기의 식량상황, 월남과 국방경비대 입대, 통위부 산하 보급기지창고에서의 근무, 육군사관학교 입학, 육군사관학교시절의 교육내용,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에 대한 회고, 김동영과 채병덕에 대한 회고, 대구 6연대 중대부관시절
1회차 면담 / 2011-02-09 / 01:51:57
1. 면담개요
앨범에 있는 사진설명, 집안내력, 출생과 성장, 무산광산 재직시절, 식민지말기의 식량상황, 월남과 국방경비대 입대, 통위부 산하 보급기지창고에서의 근무
육군사관학교 입학, 육군사관학교시절의 교육내용,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에 대한 회고, 김동영과 채병덕에 대한 회고, 대구 6연대 중대부관시절
2. 주요색인어
무산광산, 국방경비대, 통위부, 육군사관학교 대구 6연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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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앨범에 있는 사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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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삼팔선을 넘는 사진, 한국전쟁 중 미국고문관 송별회 사진, 한국전쟁 종결 후 이군사령부 병참참모시절의 사진, 60년도 미국 육군성 방문사진 등 구술자가 앨범의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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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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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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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안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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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함경북도 연상면 사지동에서 출생.구술자의 조부는 한의사로 56살에 구술자의 부친을 낳음.1919년 무렵 부친이 별세한 후 모든 가족이 북만주로 이동.부친은 만주에서 토지측량기사로 근무.부친의 남동생이 만주에서 아편중독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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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17 ~ 00:1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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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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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집안형편이 어려워져 다시 함경북도로 돌아옴.귀국 후에 구술자가 태어남.구술자는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로 내려옴. 서울에서 문화학원을 3년 동안 다님.일본의 전쟁선포 후 무산으로 돌아와 광산에 취직함.구술자는 징병 1기에 해당되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상황이 좋지 않아 징병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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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58 ~ 00:3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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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산광산 재직시절, 식민지말기의 식량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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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함경북도에는 소련군이 진주함.구술자가 일했던 무산광산은 미쯔비시의 계열회사로 2만명 가량이 재직하는 큰 회사였음.일본의 강압이 심해 광산에서 노동운동이 발생할 여지는 없었음.일제말기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생활을 계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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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11 ~ 00:4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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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월남과 국방경비대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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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초 해방을 맞아 기차, 선박등을 이용해, 안내인의 도움으로 월남함.북한지역에 자위대가 있었지만, 월남이 어렵지는 않았음.미군이 조직화되지 않아 DDT를 맞지는 않았음.서울에 미리 내려와있던 부친은 서대문구에 거주 중이었음.가정 형편이 어려워 국방경비대 모집에 응하고, 일연대로 입대함.입대당시 시험은 없었고 원용덕에게 면접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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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07 ~ 00:50: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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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통위부 산하 보급기지창고에서의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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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와 함께 입교한 인물로는 김종원, 백선엽, 김동영 등이 있음.하사관시절 영등포에 있던 통위부 산하 보급기지창고(특별부대)에서 근무함.당시 특별부대 사령관은 채병덕, 보급중대장은 유흥수.주로 경비나 노역을 관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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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1:00 ~ 00:5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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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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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군사관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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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피복계 담당으로, 보급문제로 발생한 시위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함.육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함, 1월에 입교해 4월에 졸업함.입학당시 생도대장은 오일균이었음.교관이 부족해 육군사관학교 1, 2기생들이 구대장을 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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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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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군사관학교시절의 교육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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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시절 전투훈련, 행군을 위주로 훈련이 이루어졌으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았음.미국고문관들은 훈련이나 교육에 직접관여하지는 않았고, 한국이 요청하는 자료들을 보급해줌.훈련교범으로는 번역된 교재를 사용했고, 일본군대의 방식으로 진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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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54 ~ 00:1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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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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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재학중 김창룡과 함께 있었지만 특별기수로 들어왔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음.김창룡과 같은 특별기수 중에는 최덕신, 김홍일, 김진이, 장두건, 박시창 등이 있었음.오일균, 홍순석, 김지회 등도 사관학교 시절에는 잘 알지 못했음.문상길과 같은 내무반을 썼는데, 당시 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의 사상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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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42 ~ 00:2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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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동영과 채병덕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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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보면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명김동영은 처음으로 포트베닝에 도미유학을 옴. 이후 미군고문관들의 신임을 얻어 참모총장으로 내정되었음. 김동영의 내정사실에 채병덕이 크게 불만을 가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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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31 ~ 00:3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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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구 6연대 중대부관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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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이 시작되면서 문상길이 좌익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됨.1947년 제주도에서 훈련중인 문상길을 만났고, 구술자가 제주도에서 통위부로 돌아온 뒤 박진경 연대장 시해사건이 발생함임관 후 대구로 내려가 6연대 중대 부관직을 맡아 행정관계를 담당했음.6연대는 대구방직공장 건물에 주둔했음.당시 한 달에 한가마니씩 쌀 배급을 받았음.모병은 끝난 상황이었지만 훈련은 체계적이지 않은 상황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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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58 ~ 00:4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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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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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술면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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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와 다음 면담시간을 논의하는 내용이라 상세목록을 작성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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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6:25 ~ 00:5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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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11-02-10 / 01:48:35
1. 면담개요
최남근, 김창룡과 특무대에 대한 회고, 통위부 시절과 대구 부관시절에 대한 회고, 초기 육군의 물자 보급상황, 문상길에 대한 회고, 한국전쟁 초기, 한국전쟁 초기 보급창의 상황, 1951년 보병학교, 2군단 병참부장, 군수참모 시절, 전쟁당시 물자 보급상황, 육군본부 보급과생활, 육군대학 입교, 2군 사령부 병참부장 시절, 대전 교육총본부 병참부장 시절, 미국 버지니아 병참학교 유학시절. 귀국, 1군사령부 병참부장 시절
2. 주요색인어
통위부, 한국전쟁, 보병학교, 2군단, 육군대학, 미국 버지니아 병차학교, 1군사령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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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남근, 김창룡과 특무대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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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이었던 최남근은 당시 사상적으로 특이점을 보이지 않았으며, 인간적으로 훌륭했음.당시 한국군의 주력은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었음. 반면 광복군의 영향력은 높지 않았음.당시 국방경비대와 경찰 사이에 알력다툼이 있었지만, 군이 보다 우위에 있었음. 군의 우위를 유지시켜준 것이 김창룡의 특무대였음. 김창룡은 이승만을 업고 육군본부 정보국장의 지시를 무시했고, 육군 헌병대와 의 사이도 좋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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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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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위부 시절과 대구 부관시절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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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하사관으로 서울의 통위부에서 근무함.1947년 8월 대구로 내려가 중대부관, 11월경에는 백인엽이 대대장으로 있는 대대에서 근무함.당시 한국군은 일본군 무기를 사용했고, 구술자가 사관학교를 졸업할 무렵 미국산 무기들이 도입됨. 군복은 일군의 재고품를 보급.1948년 대구에서 서울로 돌아와 다시 통위부에서 근무함. 당시 군수국장은 김도영에서 최홍희, 유재흥으로 변화함.1949년 부평에 있던 미군기지의 보급품을 인수하는 책임자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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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10 ~ 00: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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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 육군의 물자 보급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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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중대를 구성하는 사병들은 주로 1연대에서 차출됨.대방동에 군수기지 사령부, 특별부대 본부가 있었음.4.3, 여순사건 당시 토벌부대의 보급품은 6연대에서 제공됨.보급품은 육군본부와 제조업자들간의 계약을 통해서 생산됨.여순사건이후 숙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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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14 ~ 00:2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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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상길에 대한 회고, 한국전쟁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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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훈련차 제주도에 내려갔을 때 문상길을 만났지만, 특별한 얘기를 듣지 못함. 이후 반란사건에 대한 토벌이 진행될 때도 제주도에 갔지만, 문상길을 만나지는 못했음.한국전쟁 발발 당시 인천 보급창에서 근무 중이었음.전쟁소식을 듣고 수원으로 가서 육군본부로부터 옹진에 보급품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음. 이후 명령은 보류됨.보급창은 모두 후퇴철수한 뒤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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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17 ~ 00:3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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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 초기 보급창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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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인천에서 항로를 통해 후퇴하던 도중 옹진에서 후퇴중인 17연대 백여명을 만나 함께 후퇴.당진, 군산,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후퇴함.부산에서 포로수용소장을 맡게 되었으나 명령이 철회됨. 당시 육군본부의 명령이 하루동안에도 자주 번복되었음.당시 부산에는 보급창과 피복창이 있었는데, 구술자는 보급창에서 근무함.대구에 보급창의 중대장으로 발령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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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40 ~ 00:4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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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51년 보병학교, 2군단 병참부장, 군수참모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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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중대장을 타인에게 인수인계하고 광주에 설치된 보병학교에서 재교육을 받음. 당시 육군사관학교 2~5기생은 전부 다 재교육을 받음.보병학교의 교장은 최덕신.3~4개월의 재교육이 끝나고 화천 2군단 병참부장으로 부임.얼마 후 군수참모로 발령받음.정일권과 상당히 가까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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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35 ~ 00:5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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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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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당시 물자 보급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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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구술자는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진 않았고, 보급품 상황을 보기위해 일선에 나간적은 있음.전방부대에 대한 보급상황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음.부관부 인사과에 의해 전방부대에 대한 위문공연이 이루어짐,전쟁 당시 부대 근처에 음식품, 주류, 일용품을 파는 주보가 있었음. 주보에서 메탄올로 제조한 밀주를 팔았는데, 밀주를 먹고 선임하사관이 죽는 사건이 발생.1952년 이승만이 2군단에 방문을 와서 정일권이 보급상황을 브리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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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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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군본부 보급과생활, 육군대학 입교, 2군 사령부 병참부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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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육군본부 보급과장으로 발령.이후 재산관리를 관장하는 운영과의 과장으로 발령.당시 운영과의 가장 큰 업무는 전후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설의 처리 문제.1954년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 당시 총장은 이종찬.1955년 대구 2군사령부의 병참부장으로 발령. 사령관 강문봉, 1년 8개월간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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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51 ~ 00: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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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교육총본부 병참부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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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업무는 이권과 관련되어 있어, 부정부패의 가능성이 높음.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최영희가 보급품을 방매해 정치자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함. 이를 거부하고 병참부장을 사임함.1956년 대전의 교육총본부 병참부장으로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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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56 ~ 00:2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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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 버지니아 병참학교 유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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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미국 버지니아주 병참학교 유학구술자는 40명으로 구성된 유학단의 인솔단장이었음. 유학생들은 시애틀까지 함게 이동하고 다시 병과별로 나눠짐.병참학교에서는 병참에 관한 일반적인 훈련을 받음. 수업은 영어로 진행됨. 당시 한국 외에 15개국이 유학을 왔음.1958년 인솔단장으로 유학생들을 이끌고 선박편으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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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56 ~ 00:3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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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귀국, 1군사령부 병참부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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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1월 귀국과 동시에 1군사령부 병참부장으로 발령.발령과정에서 송요찬의 반대가 있었음.1군사령부는 원주에 있었고, 사령관은 유재흥, 참모장은 박정희였음.1960년 3.15선거 당시 자유당, 상부, 특무대에서 선거에 대합 압력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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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4:54 ~ 00:4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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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16발발 직전 1군사령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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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발발 전 박정희로부터 참모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음.1961년 4월 미국으로 1개월간 시찰을 감.시찰에서 돌아온 뒤 5.16발발. 1군사령부 사령관이 이한림에서 박임항으로 교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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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04 ~ 00:5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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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면담 / 2011-02-10 / 01:48:01
1. 면담개요
5.16발발 직전 1군사령부 상황, 5.16발발 직후 1군사령부 상황, 1961년 예편, 예편 후 충주비료 재직시절, 한국전쟁 당시 보급상황,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전쟁기 보급물자 조달체계, 병참관련 인물에 대한 평가, 미고문관과의 관계, 김창룡 암살사건, 장면정권기 군의 상황, 5.16 전후 군의 상황, 한국전쟁 발발 직전·후 병참부대의 상황, 미국 이민 후의 생활
2. 주요색인어
5.16, 1군사령부, 충주비료, 국민방위군, 장면정권, 김창룡암살사건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3-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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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16발발 직후 1군사령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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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5일에 창립기념일 체육대회가 있었음.당시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은 박정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1961년 5월 16일 사령관이었던 이한림이 참모회의를 소집하고 혁명 참여여부를 논의함. 다음날 1군 사령관 명의로 지지성명을 발표.발표가 서울에 전달되는 것이 늦어, 이한림 사령관이 체포됨.이한림 체포당시 미고문관들의 반대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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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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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1년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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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발발 이후 육군본부로 발령이나고, 1961년 7월 1일 예편.구술자가 예편할 당시 20여명이 함께 예편함. 당시 아랴 장교들의 승진을 위해 윗사람들이 나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음.제대식은 육군본부 광장에서 진행됐고 제대금으로 150만원이 지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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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59 ~ 00:1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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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편 후 충주비료 재직시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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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편 후 국영기업체인 충주비료 총무부 차장으로 입사. 함께 예편한 사람들도 여타 공장, 원호처 등에 재직함.총무부 차장은 일반 행정, 인사를 관장.1969년까지 충주비료에서 10년간 근무.1969년 울산 카프로락탐 석유화학회사에 임원진으로 추천됨. 당시 사장이었던 장경순이 구술자를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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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50 ~ 00:2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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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편 후 충주비료 재직시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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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비료 재직 시절 충주에 온 박정희와 회동한 적이 있음.충주비료는 1960년 무렵 건설됨, 건설과정에 군이 관여하지는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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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21 ~ 00:3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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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 당시 보급상황, 국민방위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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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에 있는 어머님과는 월남 이후 만난 적이 없음.한국전쟁당시 미군 물자가 북진하는 부대에 보급됨, 보급상황은 좋았음.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보급품의 생산이 이루어짐.국민방위군에게는 보급품의 양도 적었고, 중간에서 횡령이 많았음. 국민방위군 관련자 사형 현장에 참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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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18 ~ 00:4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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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전쟁기 보급물자 조달체계, 병참관련 인물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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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본국과 한국의 보급 중대 사이의 다리역할을 KMAG이 맡았음, 한국군이 미8군과 직접 접촉하는 일은 없었음.민사원조처사령부와 군원은 상관관계가 없음.통위부장인 유동렬, 김동영, 최홍희 등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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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8:58 ~ 00:5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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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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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고문관과의 관계, 김창룡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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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 등의 미고문관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음.장우주에 대한 회고1949년 숙군당시 수감을 위해 영등포 기지에 영창이 설립됨.1956년 김창룡 암살사건에 대한 회고. 당시 이승만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했고, 김창룡을 매우 신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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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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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면정권기 군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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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19 직후 군의 상황. 당시 군은 학생들 중심의 통일운동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음.5.16직후 반혁명사건, 김훙수에 대한 회고장면정권기 족청계가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실제 행동에 옮겨지지는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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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40 ~ 00:1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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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16 전후 군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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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전부터 군 내부에는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음.구술자도 박정희가 육군사관학교 5, 8기생들과 접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장면정권이 쿠데타를 막지못한 이유는 군을 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5.16이후 전역에 대해 군내부에 불만이 있었지만, 구술자 본인은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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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41 ~ 00:2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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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전쟁 발발 직전․후 병참부대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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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북어사건의 경우 병참계통이 관여한 바는 없음.1950년 6월 24일 육군장교클럽 낙성식에 구술자는 참가하지 않음.한국전쟁 발발 당시 보급기지창에 대한 사전지침, 보급품 후송계획이 체계적이지 않았음.한국전쟁 발발 당시 인천 보급창에는 미고문관이 없었음.1981년 직장을 구하고자 미국으로의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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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23 ~ 00:3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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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국 이민 후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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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직장을 구하고자 미국으로의 이민.전두환 정권에 대한 재미표들의 반응은 다양했는데, 교민들은 생업에 바빠 정치적인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음.1990년대 말부터 재미교포들이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짐.워싱턴의 재향군인회, 6.25참전동위회가 있으나 구술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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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49 ~ 00:5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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