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집안내력, 유년기 및 보통학교 시절,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태평양전쟁 말기 및 해방 당시의 상황, 해방직후 평안북도의 상황, 소련군과 조선민주당에 대한 회고, 토지개혁과 해주로의 이동, 월남과 월남이후의 생활, 육군사관학교 입교와 소위 임관, 12연대 3대대 9중대 소대장 시절, 여순사건과 숙군, 1949년 옹진반도로의 파견, 한국전쟁 이전 삼판선인근의 상황
1회차 면담 / 2013-02-13 / 02:22:04
1. 면담개요
집안내력, 유년기 및 보통학교 시절,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태평양전쟁 말기 및 해방 당시의 상황, 해방직후 평안북도의 상황, 소련군과 조선민주당에 대한 회고, 토지개혁과 해주로의 이동, 월남과 월남이후의 생활, 육군사관학교 입교와 소위 임관, 12연대 3대대 9중대 소대장 시절, 여순사건과 숙군, 1949년 옹진반도로의 파견, 한국전쟁 이전 삼판선인근의 상황
2. 주요색인어
평양고등보통학교, 징병, 징용, 태평양전쟁, 월남, 소련군, 토지개혁, 육군사관학교, 구례, 여순사건, 숙군, 옹진반도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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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집안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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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 구술자의 형제관계는 3남2녀임.구술자의 조부가 1894년에 과거에 합격(승정원 주서)하고 부친은 일본에 유학(법정대학 경제학부)하고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는 등 유복한 집안이었음.구술자의 형은 1924년생으로 징병1기에 해당되어,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되었음.구술자는 징병2기로 소집장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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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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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기 및 보통학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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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이고 본관은 강원도 정선.8살 때 정주군 임해면에 있는 임해보통학교에 진학, 면에 위치한 보통학교는 4학년과정밖에 없었음. 이후 읍의 보통학교로 진학항 5,6학년 과정을 마침보통학교 졸업후 평양고등보통학교로 진학, 당시 읍에서 진학한 사람이 구술자 한명밖에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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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18 ~ 00:2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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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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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조선인 학교라서 전쟁분위기가 많이 느껴지진 않았음자전거로 통학했던 보통학교 시절과 달리 평양고보는 평양에서 자취를 하면서 다님.평양고보의 교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반반으로 구성, 교장은 일본인이었음교복을 입었지만 각반을 차고, 군대배낭을 메고 교련을 하는 등 학교문화가 군사문화적이었음. 상급생과 하급생의 관계 또한 군대와 비슷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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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41 ~ 00:3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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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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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평양전쟁 말기 및 해방 당시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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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활을 매우 고된 것으로 기억함,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음.저자가 평양고보에 다닐 무렵 형은 일본 상지대학에서 유학중이었음. 고등보통학교는 5년제였다가 2년뒤 4년제로 변경되고 학교이름도한 평양2중학교로 개칭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구술자는 중학교3학년에 재학, 학교에서 일본의 승전소식을 듣고, 만세를 부르기도 함.1944년 평양고보를 졸업했지만 조선인은 징병이 연기되지 않는등 진학에 장애가 많아서 고향으로 돌아옴.징병과 징용은 강제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었고, 평안도는 공장이 없어 함경도처럼 현지 징용은 없었음.저자는 집에 있는 라디오를 통해 1945년 일왕의 항복방속을 청취함해방 후 조선인들이 지서를 습격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고, 태극기를 들고 나가 만세를 부름.8월부터 이북엔 소련군이 진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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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52 ~ 00:4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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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직후 평안북도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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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의 형은 징집후 평양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 서주로 이동. 해방이 된 후 한 달이 걸려 육로를 통해 귀국함. 형은 귀국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월남.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시계를 뺏어서 차고다니고, 따발총을 들고다니며 위협함.이북에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고 이후 인민위원회로 변화.당시 소련군은 일본인 가옥에서 지냄, 구술자는 소련군의 인격과 자질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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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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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련군과 조선민주당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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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은 읍단위까지 주둔했고, 면단위에는 주둔하지 않았음.소련군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자위대를 구성함. 이북에 있던 일본인의 경우 소련군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했음.구술자는 조만식이 결성한 조선민주당에 입당하여 친위대 격으로 활동함. 조선민주당에 입당한 이유는 종교적 배경때문이 아니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음.조선민주당 창설과정에서 이미 좌우대립 양상이 있었음.구술자는 소련군의 행동과 토지개혁 등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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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25 ~ 00: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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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순사건과 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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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을 계기로 육군내에서 시작된 숙군에 대해서는 구술자는 아는 바가 별로 없음. 당시 7기생은 숙군에 관련된 사람이 거의 없었음.숙군과 관련된 인물은 백선엽, 김점곤, 김창룡이 유명했음.구술자가 육사생도인 시절, 구대장이 친북적 견해를 보였는에 이후 총살당했다는 얘기를 들음.12연대는 구례에서 인천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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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53 ~ 00:1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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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토지개혁과 해주로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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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1차숙청이 단행. 대지주들은 3일내에 100리 바깥으로 이주하라는 요구를 받음.구술자는 집안이 소유한 전답의 규모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주급이었음. 토지개혁이 일어나 고향에서 살수 없게 되자 1947년 구술자가족은 해주로 이동. 해주에는 누나가 결혼해 살고 있었음.해주에서 첫번재 월남을 시도했으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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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4 ~ 00:3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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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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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남과 월남 이후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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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해변가로 간 뒤 배를 타고 월남할 계획을 세움.총 세 번 시도했는데 처음 두 번은 발각됨. 발각되면 짐을 다 뺏기고 조사를 당함. 월남자가 너무 많아서 조사가 철저하게 진행되지는 않음. 소련 경찰에게 조사 받은 적도 있음.세 번째 시도에 월남 성공, 그런데 구술자의 어머니가 짐에 대한 미련으로 다시 월북함.월남이후 형님의 처갓집에서 생활. 생활고를 덜기 위해 교사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함.교사연수를 받던중 육군사관학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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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17 ~ 00:4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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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군사관학교 입교와 소위 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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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북한에 대한 원한을 갚는다는 생각하에 육군사관학교 모집에 응시, 당시 월남한 청년들중에는 서북청년회등 청년단체 활동을 하는 이가 많았음.수학, 영어등 시험을 치르고 조선경비사관학교입대.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개칭. 구술자는 7기로 입대. 당시 7기생은 구술자처럼 시험을 치룬 사람이 250여명, 기존에 군생활을 했던 사람 25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교육기간은 부대에서 6개월, 태능에서 3개월로 구성됨. 교육내용은 기초 군사훈련, 군사학임. 교관은 육군사관학교 윗기생 혹은 일본/만주 군관학교 출신들.1948년 11월 11일 임관, 바로 구례로 배치됨. 당시 여순사건 한달뒤로 구례에서는 빨치산 소탕작전이 시행중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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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15 ~ 00:5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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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연대 3대대 9중대 소대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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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후 구례 12연대 3대대 9중대 소대으로 부임사흘만에 소대원이름을 모두 외워 리더쉽을 발휘하고, 사병들과 친근해짐.구례에서는 남은 빨치산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함. 이미 교전은 종료된 상태였음.이후 십이연대에서 일개중대가 옹진반도를 나가게되었다는 소식에 동료의 권유를 받아 옹진으로 가는 것을 신청. 당시 옹진으로 함께간 칠기생 소대장 5명중 4명이 이북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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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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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9년 옹진반도로의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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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철수이후 북한에서 경비대 창설, 옹진반도에 주둔하던 미군도 철수하게 되면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 12연대에서 1개중대를 파견. 구술자는 지원해서 옹진반도로 감.구술자가 도착한 1959년 1월 당시 옹진반도에는 이렇다할 군사시설도 없고, 경계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보급은 주로 해로를 통해서, 옹진반도로 향하는 육로는 없었음.1949년부터 삼팔선부근에서 남북군의 충돌이 격화되고, 남한군이 월북하는 강,표사건 발생 등 혼란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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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53 ~ 00:2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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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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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전쟁 이전 삼팔선 인근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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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반도에는 총 200여명 규모의 중대가 파견, 옹진반도 전체를 경비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였음.당시 삼팔선에서 북한과의 무역이 성행. 채병덕 참모총장이 북한과 명태를 교역하고, 이에 대해 김석원이 항의함. 압수된 명태를 삼팔선 인근 부대에 나눠주어 구술자도 받음.김구가 남북협상을 하러 가지 못하도록 삼팔선에 긴장감을 만들기 위해 위협사격을 한 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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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53 ~ 00:3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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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13-02-14 / 02:46:31
1. 면담개요
임관 후 구례 근무(1) / 임관 후 구례 근무(2) / 옹진지구로 전보 / 옹진전투(1) / 옹진전투(2) / 개성으로 전보 / 전쟁 발발 / 전쟁 발발 후 겪었던 경위(1) / 전쟁 발발 후 겪었던 경위(2) / 전쟁 발발 후 겪었던 경위(3) /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경험(1) /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경험(2) /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경험(3) / 272.4고지 전투
2. 주요색인어
구례, 빨치산, 1사단, 옹진지구, 옹진전투, 사곶, 냉정리, 국사봉, 은파산, 용당포, 해주, 18연대, 개성, 송악산, 동인천, 파주, 임진강, 문산, 수원, 시흥, 스미스부대, 낙동강, 진해, 반성전투, 다부동전투, 유학산, 왜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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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관 후 구례 근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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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에 임관 후 12연대에 갔을 당시 연대장은 임선하.구술자가 부임하기 전 연대장 백인기가 빨치산에게 포위당해 자결한 사건 발생.부연대장 백인엽에 대한 일화 소개.연대장의 자결로 당시 부대 분위기는 매우 비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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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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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관 후 구례 근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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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겪은 빨치산 토벌 경험을 전반적으로 구술.12연대 부임 후 소대를 이끌고 노고단을 세 차례 등정.구술자는 1사단 소대장으로 부임 후 휴전까지 쭉 1사단에서 근무해서 하사관 등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됨.빨치산 혐의자들의 사살을 강요당했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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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04 ~ 00:2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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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옹진지구로 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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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군산, 인천을 거쳐 1949년 정월 초 옹진지구로 전보.인천에서 LST를 타고 옹진 사곶리에 도착.미 7사단 일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냉정리를 인계받음.국사봉에서 인민군과 대치, 실제로 지도상으로는 애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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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05 ~ 00:3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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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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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옹진전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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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가 겪은 옹진전투의 발발원인과 과정 등을 전반적으로 구술함.당시 미군은 38선 길목에서 보초만 섰을 뿐 본격적으로 경비한 것은 아니었음.국사봉전투가 옹진전투의 시발이 됨.옹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후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이 직접 방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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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6:07 ~ 00:4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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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옹진전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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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후 전투사령관으로 김백일 장군 부임.전투사령부, 지휘소(CP)의 개념을 설명.김백일 장군한테 직접 훈장을 받음.고지전투 당시 향도의 역할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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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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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성으로 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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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 근무 후 개성으로 전보되어 11연대 예비대로 근무.개성 및 인근 백천, 청단 등의 부대 배치에 대해 설명.구술자는 군 경험 기간 내내 주로 작전계통에 근무.송악산에서의 남북 대치에 대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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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27 ~ 00:2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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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쟁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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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쟁 발발 전의 여러 징후들 소개.전쟁 발발 사흘 전 38선 너머 인민군이 ‘사흘 후에 보자’고 했던 일화 소개.전쟁 발발 당일 영내에서 일직을 서다가 전방 5중대장으로부터 남침 보고받았던 경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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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07 ~ 00:3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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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쟁 발발 후 겪었던 경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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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보고를 듣자마자 보고를 위해 연대본부로 이동.12연대는 지연전을 하면서 강화도 쪽으로 후퇴.전쟁 발발 당시는 각 부대가 워낙 넓은 지역을 감당해야 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방어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음.구술자는 대대장과 같이 철수해서 김포반도를 상륙, 강을 건너 후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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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13 ~ 00:4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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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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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 발발 후 겪었던 경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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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농역에서 기습 성공 후 철수하면서 행주나루터로 이동.서울에서 피난 오는 피난민을 만남.2개 중대 100여 명의 병력이 고깃배에 나눠 타고 김포 방면으로 후퇴.인민군 함정을 만나 격퇴에 성공한 일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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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06 ~ 01: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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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쟁 발발 후 겪었던 경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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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하구로 나오는 중 또 다시 미군 비행기를 만나 적으로 오해 받고 폭격을 받음.천신만고 끝에 육지로 올라왔다가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후퇴, 한국 해군 함정을 만나 무사히 철수하게 됨.수원으로 가서 아군 본대를 만나고, 스미스부대도 목격하게 됨.이후 상주에서 본대를 다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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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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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경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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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사단장이 대전에서 포로가 된 것에 대해 설명.대대본부를 따라 상주에 있다가 연대장 명령으로 미 25사단 연락장교로 가라는 명령을 받음.당시 연락장교의 역할에 대해 설명.미군의 우수한 기동력에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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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27 ~ 00:2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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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경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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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장교 근무하다가 다시 다부동 연대본부로 복귀.행정요원까지 전투병으로 보내야 했던 다부동전투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3중대장이 전사하여 후임 중대장으로 전보.중대장 근무 중 적에게 야간기습을 당했던 일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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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12 ~ 00:3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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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경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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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험이 없는 미 기병사단의 중대장과 진지 교대.272.4고지에서 돌격에 성공했던 경험 소개.이 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의 해병대 상륙부대하고 연결하는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의미를 설명.미군의 화염방사기를 사용해 적 격퇴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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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4:07 ~ 00:4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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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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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72.4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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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으로 겪었던 272.4고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이어감.재일학도의용군으로 추정되는 사병들에 대한 기억 소개.272.4고지 전투 성공 후 1사단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10월 1일 동해안 양양 38선을 돌파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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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6:05 ~ 00:5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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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면담 / 2013-02-25 / 04:06:29
1. 면담개요
산학교 출신 인물, 한국전쟁 중 다부동 전투 소개(1)/ 한국전쟁 중 다부동 전투 소개(2), 북진/ 평양점령/ 북진, 중공군의 참전/남하, 미군의 공중폭격, 1.4후퇴, 고지전투/ 연천부근 근무, 노리고지 전투/ 광주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수학,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 미국에 대한 첫인상/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근무/ 부연대장 근무, 육군대학 교관, 육군본부 감찰감실 배치/ 육군본부 감찰감실 활동, 수도사단 26연대장/ 5.16 쿠테타/ 수도사단 26연대장 시절, 훈련소 연대장 배치, 국방대학원/ 1군 군수참모 차장, 20사단 부사단장, 장군진급/ 2군 군수참모, 베트남전 참전(1)/ 베트남전 참전(2) - 대민심리전/ 베트남전 참전(3) - 대민심리전, 중대기지전술/ 베트남전 참전(4)- 포로/ 베트남전 참전(5) - 건설지원단, 월급문제/ 귀국, 33사단장 취임, 간첩선 나포/ 간첩선 나포 과정/ 소장진급/ 군단 부군단장 임무, 소장 예편/ 군인으로서의 삶/ 훈장, 하나회, 인터뷰 마무리
2. 주요색인어
다부동 전투, 평양 점령, 중공군, 1․4후퇴, 고지전투,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5․16 쿠테타, 베트남전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3-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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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산학교 출신 인물, 한국전쟁 중 다부동 전투 소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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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는 정주 출신으로, 정주에는 오산학교가 유명함.
- 백인제, 방응모 등의 유명인사들이 오산학교 출신임.
- 대구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고, 한국군 사망자․부상자 수도 엄청났음. 가장 유명한 전투가 다부동 전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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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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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 중 다부동 전투 소개(2),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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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의 격렬함은 사망자 수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대략 4000명이 전사함. 부상자는 거의 3배에 이름. 당시 일일전투보고서를 써야하는데, 전투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마저 전투에 투입되어, 보고서마저 작성이 불가능한 상태였음. 사실상 대구에서의 전투는 남한사람들끼리의 싸움이었음. 왜냐면 이미 북한의 인민군은 전사자가 많았고, 인민군에 남한 청년들이 대거 의용군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임. 인천상륙작전 이후, 아산에서 미군 기병사단과 결합해 북진하기 시작함. 10월 1일에 양양 등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0일에는 고랑포, 원산까지 올라감. 당시 한국군은 미 1군단에 소속되었음. 평양점령을 위한 전투가 한국전쟁 전투 중 가장 보람찬 전투로, 한국군이 선두로 평양을 점령했다는 것은 의미가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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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25 ~ 00: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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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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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방식은, 우선 탱크에 포로를 앞세워서 지레의 피해를 포로가 당하게 함. 그리고 탱크를 뒤따라서 항공연락장교가 공군에 연락을 하면, 공중에서 비행기가 와서 조준지역을 미리 폭격을 함. 항상 비행기가 엄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군의 전투가 수월했음.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함. 평양시민들은 한국군을 환영했음. 평양점령과 관련해서 1사단이 먼저냐, 7사단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 정식의 명령계통을 통해서 작전을 수행한 것은 1사단임.북한군은 황해도 상원 지역에서는 조금 저항했지만, 대개는 지연작전 이상의 대응을 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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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3 ~ 00:3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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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진, 중공군의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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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점령 후, 개천지역으로 이동. 개천에서 신안주를 통해 운산까지 북진함. 11월 초에 운산부근에서 중공군을 만남. 전(前) 국민당군 출신들의 중공군의 귀순도 있었음. 중공군과 맞닥뜨린 다음에는 밀리기 시작함. 특히 유재홍 장군이 이끌던 3군단의 피해가 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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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16 ~ 00:4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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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하, 미군의 공중폭격, 1․4후퇴, 고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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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참전 직후에 미군과 한국군을 밀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인해전술 덕이었음.그러나 미 공군의 공중폭격으로 인한 중공군의 피해도 컸음. 1․4후퇴 당시에 1사단은 안산까지 내려감. 휴전선 부근에서 전투가 고착된 이후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계속됨.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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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27 ~ 00:4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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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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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천부근 근무, 노리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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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이 될 때까지, 연천부근에서 근무함. 노리고지 전투에서, 아군 진지에다 포를 쏘면, 그 안에 숨어 있는 중공군을 잡을 수 있었음. 이 전투가 유명함. 이 전투를 지휘한 김만술 대위의 용맹을 칭찬해야 함. 에피소드 중 하나는, 소속 부대원이 보초를 서다 졸다가 중공군에게 잡혀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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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29 ~ 00:5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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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주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수학,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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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후 광주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학함. 3개월 정도 수학.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시험에 합격해서, 도미함.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 과정에서 전술학을 주로 배움. 당시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은 육사 3기와 5기생이 주로 갔고, 육사7기생은 막내로 많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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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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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에 대한 첫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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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갈 때, 미 해병대의 수송선을 타고 감. 배 안에서 호화스러운 미국식 문화를 경험하고, 미국에 도착에서 도시 발달정도를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음. 미국에서 전술학뿐만 아니고, 기본적인 식사예절 등 에티켓을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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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52 ~ 00: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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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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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16 쿠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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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단 26연대장으로 있을 때, 5․16 쿠테타가 일어남. 8기 특별 출신인 이석재란 인물이 찾아와 5․16 쿠테타 가담을 권유했으나 거절함. 5․16 쿠테타 당시 수도사단은 일선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력동원이 없었음. 채명신 장군은 5사단장으로, 5사단장은 예비사단이기 때문에 병력동원이 가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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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42 ~ 00:5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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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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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기획과로 발령받음. 예비사단 창설, 관구 설정 등의 역할을 맡음. 1년간 근무함. 당시 1954년은 예비사단을 편성할 즈음이라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기획과의 역할이 중요했음.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근무 마치고 9연대장을 맡아서 1년 정도 근무하고, 육군대학에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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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1:23 ~ 00:2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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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연대장 근무, 육군대학 교관, 육군본부 감찰감실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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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에 있던 76연대 부연대장 근무. 1957년에 육군대학에 교관으로 감. 당시 육군대학 운영체제는 초급반에 150명을 선발해, 50명씩 한 반을 이루고, 6개월을 훈련시킴. 이들 중 1개 반 인원만 고급반으로 올라감. 고급반도 6개월 코스로, 총 1년 과정임. 육군대학 고급반에서 군단전투 전술학을 가르침. 2년간의 육군대학 교관을 마치고, 육군본부 감찰감실에 배치됨. 감찰감실을 단지 군의 기강확립을 위한 내사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술문제도 다루는 역할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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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56 ~ 00:4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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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육군본부 감찰감실 활동, 수도사단 26연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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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장군이 감찰감으로 오고, 구술자는 검열과장으로 배치됨. 검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군내부의 비리문제 척결에 앞장섬. 당시 군에서는 ‘보급투쟁’이라는 이름 하에 쌀을 얻기 위한 비리활동들을 저지르곤 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교 군의 비리를 지적하는 활동이 탐탁치 않아서, 그만두고, 1959년에 수도사단 연대장으로 나감. 다른 연대장들과 달리 수도사단 26연대장을 2년 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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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47 ~ 00:5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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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도사단 26연대장 시절, 훈련소 연대장 배치, 국방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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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전차에 대적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대전차 다섯 대를 수입해 왔는데, 그 중 두 대가 26연대에 배치되어 있었음. 그만큼 수도사단 26연대가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 그래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근무했음. 23개월간의 26연대장을 마치고, 사단의 참모장으로 감. 사단장이 바뀌면서, 참모장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둠. 훈련소 연대장으로 배치되어 1년간 근무. 훈련소 연대장을 마치고 국방대학원에 들어감. 국방대학원에서 1년 반 동안 담임교수로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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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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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군 군수참모 차장, 20사단 부사단장, 장군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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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테타의 정통파인 황인권, 정인환의 주선으로 1군 군수참모 차장으로 가게 됨. 그러나 4달 만에 1군사령관의 명령으로 20사단 부사단장으로 나가게 됨. 당시 1군사령관은 육사 7기가 8기보다 진급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차장 역할을 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일선 부사단장으로 내보내려고 한 것임. 부사단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할 생각으로 있을 때, 장군으로 진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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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44 ~ 00: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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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군 군수참모, 베트남전 참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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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진급 이후, 2군 군수참모로 명령을 받음. 1년 반 가량 근무함. 67년 8월에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됨. 9사단 백마부대 작전부사단장으로 가게 됨. 이때는 부사단장이 작전부사단장 1명이었지만, 이후 작전부사단장과 행정부사단장으로 부사단장이 2명으로 바뀜. 작전부사단장의 역할은 사단장이 전사하면 사단장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고, 평시에는 부대를 지키기 위한 정찰활동, 매복활동을 감독하는 것임. 사실상 별다른 작전은 없었음. 1년 정도 작전부사단장으로 활동하다가, 건설지원단 단장으로 보직이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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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40 ~ 00:2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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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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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전 참전(4) -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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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를 전선에서 생포하면, 헌병을 통해서 후송시켜, 포로신문팀에서 따로 관리함.한국군 포로가 많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군에게 병영생활 이외에 따로 자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임. 건설지원단 단장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이전에 건설된 학교, 교량을 보수하는 작업을 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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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1:52 ~ 00:5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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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첩선 나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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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아산만에서 간첩선을 인지하고. 사단장 책임으로 공군과 해군, 경찰에 공동협조를 요청하고, 사격을 명령하고, 간첩선을 나포함. 이후 몇 달 뒤, 충청남도에서 간첩이 잡힘. 아마 6월 28일에 나포된 간첩선과 충청남도에 잠입한 간첩이 접촉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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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1:02 ~ 00:3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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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장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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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소장으로 진급됨. 사단장 시절 간첩선을 잡은 공로를 인정받은 것임. 간첩선을 나포한 것은 이 사건이 최초였음. 1970년 간첩선 나포 외에 간첩 1명을 생포한 전공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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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33 ~ 00:4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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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베트남전 참전(2) - 대민심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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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부대의 주둔위치는 나트랑 부근 닌호아였음. 주월사령부는 사이공에 있었지만, 나트랑에는 주월사령부 부사령부가 있었음. 건설지원단은 사이공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주둔하고 있었음. 구정공세가 있을 때, 사이공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음. 베트콩의 약간의 기습공격만 있었음. 베트남에서의 전투는 게릴라식 전투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베트콩이 오가는 길을 확인하고 그 길에 매복을 하는 식의 전투를 벌임. 사단차원에서 적아를 구분하기 위한 대민심리전에 공을 많이 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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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42 ~ 00:4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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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베트남전 참전(3) - 대민심리전, 중대기지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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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차원에서 대민심리전을 담당하기 위해서 민사군수참모가 있었음.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콩이 대개 가족들이었기 때문에, 한국군을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음. 베트남전에서는 중대기지전술이 사용되었는데, 중대는 약 160명 정도로 곳곳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어 기지를 만들고, 여기서 주둔하면서 전투를 벌임. 보급은 헬기를 통해서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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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15 ~ 00:5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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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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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전 참전(5) - 건설지원단, 월급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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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지원단부대 시설을 외부 한국인 민간 기업인들에게도 개방해서, 수영장 같은 시설을 이용하게 함. 건설지원단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트콩의 공격을 받음. 이는 베트콩들이 건설지원단장이 교체된다는 정보까지 입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 한국인 병사들은 퍼듐을 받지만, 그 돈 전체를 월급으로 현장에서 받는 게 아니라, 베트남에서 쓸 돈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받게 됨. 건설지원단 단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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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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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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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국, 33사단장 취임, 간첩선 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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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한국으로 귀국함. 귀국 이후 관구부사령관으로 나감. 팔당댐에서 김포지역까지 한강변에 토치가를 990여 개를 설치함. 관구부사령관 임무를 마치고 33사단(현재 17사단) 사단장으로 보직변경.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약 2년여를 근무했음. 1970년 6월 28일, 북한의 간첩공격을 사전에 인지하고 막아냄. 아산만을 통해서 들어오는 간첩선을 나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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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52 ~ 00:2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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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군단 부군단장 임무, 소장 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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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으로 진급된 이후. 3군단 부군단장으로 나가서 2년여 근무를 함. 3군단은 인제부근에 위치함.그 후, 육군본부에 와서 예비군 참모부장을 맡음. 1970년대 초가 한창 예비군을 창설할 즈음이라 할 일이 많았음. 소장 임기를 마치고 1978년에 예편함. 육사 7기는 8기에 밀려 진급을 못한 불행한 기수임. 12․12 이후 보직이 확대되면서 장군의 수도 많아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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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20 ~ 00:5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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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군인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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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일선에서 군인의 삶을 살았음을 회고함. 하나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림.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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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1:34 ~ 00:5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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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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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훈장, 하나회, 인터뷰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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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훈장, 충무훈장, 화랑훈장, 삼등근로훈장 등등을 받음. 12․12가 일어날 때, 당시 군인이었지만 하나회란 조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음. 5․16쿠테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음. 다만 정치군인은 잘못됐다는 평가가 남기고 싶음. 예편한 이후에 국영기업체인 울산석유에서 자리를 하나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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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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