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고향과 어린시절 소개, 학창시절과 대학입학, 서울대학 농과대학 입학, 4․19혁명 가담경위, 5․16쿠테타 직후 대학의 분위기, 대학졸업과 해병대 간부후보생 33기 입대, 소위 임관과 포병학교 입학, 포병학교 졸업 이후 베트남전 참전, 베트남전에서의 경험 푸옥록 전투의 서막, 푸옥록 전투의 전개, 푸옥록 전투에서 구술자의 활약, 푸옥록 전투의 결과, 미군 포병과 한국 해병대 포병의 화력협조(FSCC) 사례, 푸옥록 전투의 전공과 표창, 구술자의 짜빈동 진지 배치 경위, 짜빈동 전투 전야의 요란사격, 짜빈동 전투 중 포격 상황, 짜빈동 전투의 결과, 짜빈동전투에서 다른 해병대 장교들의 활약, 빈손군청 연락장교 근무, 귀국 이후 제대까지 근무 이력, 한국 해병대와 다른 현지 부대들과의 관계, 해병대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며 얻은 것들, 제대 이후의 생활
1회차 면담 / 2013-02-28 / 02:12:09
1. 면담개요
고향과 어린시절 소개, 학창시절과 대학입학, 서울대학 농과대학 입학, 4․19혁명 가담경위, 5․16쿠테타 직후 대학의 분위기, 대학졸업과 해병대 간부후보생 33기 입대, 소위 임관과 포병학교 입학, 포병학교 졸업 이후 베트남전 참전, 베트남전에서의 경험
2. 주요색인어
4․19 혁명, 5․16 쿠테타, 해병대 간부후보생, 포병학교,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어린시절과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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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9월 28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출생.
- 2남 4녀중 셋째임.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해서 수학함. 집안이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농대에 익숙했음. 농대를 졸업하지 않고, 해병대로 입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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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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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대학시절과 해병대 장교 입대, 한국전쟁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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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니 해병대에서 받아주려 하지 않아서, 필기시험에서 낙방함. 학보병에도 지원했지만 떨어져서, 졸업 후에 해병대 장교 시험을 봐서 해병대에 감.
- 고모부가 육사 8기생인데, 인천 방첩대(CIC) 대장을 함. 한국전쟁 초기에 위험할 뻔 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안정을 되찾음.
- 어린 눈으로 인민군 패잔병의 움직임 등을 본 기억,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 식사를 준비해 주던 것을 본 기억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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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39 ~ 00:2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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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창시절, 대학입학, 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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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고등학교로 진학함,
- 학교다닐 때 기억나는 사건은, 1950년대 관제데모에 동원된 일임. 각종 궐기대회에 동원됐었음.
- 1960년 3월에 대학에 입학해서. 4․19혁명을 경험함. 부정선거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다기 보다는, 선배들의 동원에 따라 데모에 나갔음. 수원에서 서울까지 걸어와서 서울의 문리대 학생들을 지원해 줬던 기억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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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1:58 ~ 00:3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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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H연구회 가입, 영어연구회 활동, 5.16쿠테타 이후 대학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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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H연구회 가입. 수원 일대에서 농촌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함.
- 대학 4학년이 되어서는 영어에 흥미가 많아져서 농과대학 산하의 영어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 4․19혁명 이후에 바로 5․16 쿠테타가 일어났기 때문에 대학분위기가 많이 바뀌지는 않음. 5․16 쿠테타 이후 지지와 반대 분위기가 극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당시 혼란한 사회상을 볼 때 어느정도 쿠테타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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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1:21 ~ 00:4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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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학졸업, 해병대 간부후보생 33기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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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대학졸업. 졸업을 하고 해병대 장교로 지원함. 해병대 장교는 육군 사병과 복무기간과 같기 때문에, 이왕 고생하는 거 월급을 더 받기 위해서 지원함. 당시 해군과 공군은 복무 기간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길었음.
- 해병대 사병으로는 서울대 학생은 잘 뽑히지 않았음. 혹시나 학벌이 높은 사병은 제대로 근무하지 못할까 하는 우려때문이었음.
- 해병대 간부후보생 33기로 입대함.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기 위해서 필기, 체력 시험 등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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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25 ~ 00:5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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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병대 간부후보생 시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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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간부후보생 입대 경쟁률은 8:1로 졸업한 사람은 총 160명으로, 일반인들 가운데 시험을 쳐서 들어온 사람 외에 하사관 출신도 있었음.
- 하사관 출신은 약 10명으로, 대개 미국에서 미국 해병대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임.
-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해도, 강도 높은 훈련을 감당하지 못하고 퇴소하는 사람도 많음. 총9개월의 훈련을 받음.
- 처음에 견습사관이라는 계급을 달고 4주간 신병훈련을 받고 나면, 소위로 임관함. 임관 이후에는 8개월 동안 OBC(office basic course)라는 장교교육을 받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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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1:23 ~ 01:0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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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위 임관, 소총중대 배치, 포병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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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로 임관해서 보병을 지원함. 소총중대 1연대 1대대 2중대에 배치됨. 2중대 화기소대장을 맡음.
- 1대대 본부중대의 106mm 소대장으로 보직 변경. 1년 동안 포항에서 근무하다가, 포병학교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음.
- 1966년도에 포병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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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51 ~ 00:2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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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포병학교 수학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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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포병학교 입학. 교육은 약 4개월간 진행됨. 포병학교는 원래 육군이 운영하는 학교임. 기초적인 포사격 훈련을 받음.
- 포를 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관측병임. 탄착 지점을 파악하고, 계산에 맞도록 포를 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
- 포의 지원이 있어야지만 상륙작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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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50 ~ 00:4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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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베트남전 참전2-포병 7중대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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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처음 베트남에 도착한 곳은 퀴논이었음.
- 일단 포병대대로 베트남에 도착했다가, 포병 7중대로 배치받음. 포병 7중대의 근무지는 추라이로, 보병 3대대와 같은 지역에 있었음.
- 보병은 소총소대인 반면, 구술자는 포병 내에서 관측장교로 갔기 때문에 대개 통신병과 둘만 움직여서 외로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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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1:35 ~ 00:5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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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해병대 간부후보생 시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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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의 교육체계는 해병학교가 있고, 그 산하에 해병하사관 학교, 해병 간부후보생 학교가 있음.
- 간부후보생들을 관리하는 직급은 대위로, 대위를 보좌하고 학생들을 직접 관리하는 구대장이 3명 있음. 구대장은 당시 해병대의 최고 엘리트들이었음.
- 교육과목은 각개전투, 소총소대, 소총중대운영, 공격의 원칙, 포병대 운영방식 등으로 구성됨.
- 사격훈련에서 수류탄 투척, 박격포 작동법까지 모두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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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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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병학교 진학, 청룡부대의 베트남전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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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병학교로 차출된 것은 사령부 차원에서 관할한 일임. 대개 엘리트 출신들을 보낸 것으로 추정됨.
- 해병대 간부후보생 출신들 중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빨리 제대하기 때문에 이들을 더 훈련시킬 방안을 고민한 것.
- 1965년 한국군의 첫 베트남전 파병이 결정되면서, 암암리에 해병대 1연대가 파병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음. 그러나 우선 2연대가 먼저 베트남으로 출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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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02 ~ 00:3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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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병학교 졸업, 베트남전 참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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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6월에 포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으로 이동해 8월에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됨.
- 원래는 베트남전 파병이 1년에 한 번씩 교체하기로 됐었는데, 1965년에 첫 파병된 부대에서 인원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1년이 되기 전인 8월에 보충 파병이 이뤄짐.
- 베트남전에는 포병연대 소속으로 파병이 됨.
- 부산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베트남까지 이동. 당시 청룡부대와 백마부대 1진이 함께 이동했음. 배 안에서 특별한 교육같은 건 없었음. 베트남에 대한 정보, 전쟁의 원인 등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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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01 ~ 00:5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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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베트남전 참전3-포병 중대 현황, 푸옥록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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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에 도착한 첫날, 한국군이 베트남군의 이동 요충지를 대상으로 하는 요란사격으로 인해 잠을 거의 자지 못함. 그걸 보면서 전쟁터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됨.
- 포병대대에는 본부중대 와 5,6,7중대로 구성되어 있음.
- 포병 5중대는 보병 1대대, 포병 6중대는 보병 2대대, 포병 7중대는 보병 3대대와 결합이 되어 움직임.
- 각 중대에는 포가 6문이 배치되어 있음.
- 베트남전에 참여한 초기에는 게릴라전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되어 큰 전투를 벌이지 못하다가, 푸옥록 전투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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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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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13-03-06 / 02:45:08
1. 면담개요
푸옥록 전투의 서막 / 푸옥록 전투의 전개 / 푸옥록 전투에서 구술자의 활약 / 푸옥록 전투의 결과 / 미군 포병과 한국 해병대 포병의 화력협조(FSCC) 사례 / 푸옥록 전투의 전공과 표창 / 구술자의 짜빈동 진지 배치 경위 / 짜빈동 전투 전야의 요란사격 / 짜빈동 전투 중 포격 상황 / 짜빈동 전투의 결과 / 짜빈동전투에서 다른 해병대 장교들의 활약 / 빈손군청 연락장교 근무 / 귀국 이후 제대까지 근무 이력 / 한국 해병대와 다른 현지 부대들과의 관계 / 해병대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며 얻은 것들 / 제대 이후의 생활
2. 주요색인어
해병대, 청룡부대, 베트남전쟁, 푸옥록전투, 용안작전, 항공함포연락팀(ANGLICO), 짜빈동전투, 짜빈박전투, 11연대, 미8군, 백마부대(9사단)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푸옥록 전투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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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1월경 구술자가 속한 해병대 부대에서 용안작전 벌임.
- 용안작전은 베트콩 게릴라를 수색 및 격멸하는 작전이었으나, 양민과 게릴라를 식별하기 힘들어 애를 먹음.
- 푸옥록 전투의 계기. 수색지대가 습지대여서 불가피하게 며칠 동안을 같은 고지대에서 숙영하게 됨.
- 구술자는 포병 관측장교로서 미리 고지 주변에 화집점을 설정해놓았고, 그것이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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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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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푸옥록 전투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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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와 같이 일하던 통신병 세 명은 적의 첫 기습 사격 때 모두 사망.
- 공격한 측은 북베트남 정규군 부대였음.
- 교전 초반에 구술자가 미리 설정한 화집점에 포격했는데 공교롭게 그곳이 북베트남 대대 CP였음. 이외에도 다른 화집점이 적 진격로였기 때문에 커다란 피해 입힘.
- 구술자와 같이 있던 3소대가 먼저 후퇴해버리는 바람에 구술자는 적과 아군 사이에 놓임. 구술자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전진하는 적병들에게 기습 사격을 가한 후 자력으로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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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03 ~ 00: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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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푸옥록 전투에서 구술자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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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와 같이 일했던 미 해병대 항공함포연락팀(ANGLICO) 설명.
- 푸옥록 전투는 정찰 나온 아군 해병대 2개 소대 병력이 적 2개 대대 병력과 맞붙어 싸웠던 것.
- 포대에서 포격을 위해 조명탄을 쐈는데 그것 때문에 구술자가 위험에 처하기도 했음.
- 구술자가 있던 호에 적의 방망이수류탄이 여러 개 떨어졌으나 모두 불발이어서 살았음.
- 적 부대는 아군 해병대가 후퇴할 때를 대비하여 매복을 펴고 있었으나, 아군 부대가 전혀 후퇴하지 않은 덕에 승리할 수 있었음.
- 전투 참가 장교들. 중대장 김윤형, 1소대장 김원식. 3소대장 전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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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48 ~ 00:3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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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푸옥록 전투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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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옥록 전투에서 이영구 선임하사의 독전이 인상적이었음.
- 푸옥록 전투 벌인 아군 해병대 2개 소대의 병력은 80~90명 선. 전사자는 15명.
- 푸옥록 전투의 전과가 한국에도 크게 알려짐. 청룡부대장 오윤진, 참모장 장대길 등이 부대를 방문하기도 함.
- 푸옥록 전투 후 철수를 하는데 공중수송 하지 않고 도보 행군으로 이동하게 됨. 그러나 그 이동지역은 얼마 전 해병대 2개 소대 병력이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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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35 ~ 00:3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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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군 포병과 한국 해병대 포병의 화력협조(FSCC)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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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가 속한 부대는 철수 중에 또 다시 적의 기습을 받음.
- 구술자가 해병대 포병대대에 지원포격 요청을 했으나 작전참모 이명규 대위로부터 사거리가 안 된다는 답을 들음.
-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측에 강력하게 요구하여 포병부대에게 미군의 최신 무전기를 지급한 바 있음.
- 전투 중에 구술자는 요행을 바라며 미군 주파수를 찾아 미군 포병부대에게 지원사격 요청. 미군은 화력협조(FSCC)체계 통해 구술자 신원 확인하고 포격 요청에 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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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25 ~ 00:4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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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푸옥록 전투의 전공과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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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이 쏜 포는 시설 폭격 용도의 8인치 전략포였음. 미군의 지원 포격 덕분에 아군 부대는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음.
- 복귀 후 구술자는 경비중대로 배속됨.
- 구술자는 푸옥록 전투의 전공으로 해병대사령관 표창을 받음. 대대장 이갑석 대령은 따로 구술자에게 위스키를 선물로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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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47 ~ 00:5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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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대 이후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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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련교사로 근무하다가 1980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영문과 입학. 졸업 후 인덕공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
- 1970년대 교련교사로 근무한 경험. 구술자는 학생들에게 전쟁 관련 이야기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음.
- 국가에서 베트남전쟁 기념에 소홀한 것을 안타까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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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5:12 ~ 00:4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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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구술자의 짜빈동 진지 배치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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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단장 이취임식(이봉출→김연상)에서 구술자가 표창을 받았음.
- 지휘부 장교들이 구술자의 ‘전운’이 좋다고 이야기하며 구술자를 11중대에 배치하여 짜빈동 진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함. 1967년 1월 하순 짜빈동에 배치됨.
- 푸옥록 전투를 벌였던 9중대는 불과 두 달 후인 1967년 1월 투망작전 중 짜빈박에서 적의 기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음.(짜빈박전투)
- 구술자는 적이 짜빈동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당시에 접한 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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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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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짜빈동 전투 전야의 요란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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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중대 1소대장 신원배. 2소대장 김성부. 3소대장 이수현. 박격포 포반 반장 김세기 대위, 이정국 중위(사격지휘반).
- 2월 14일 밤 적의 정찰로 교전 벌어짐. 비상대기 상황에서 구술자는 포병 관측장교로서 이상한 낌새를 직감하고 자정쯤 진지 앞의 제방 쪽에 요란사격을 요청.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곳에서 기습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적군 1개 대대 병력이 포격을 받아 거의 전멸. 이 때문에 적의 기습이 자정에서 새벽 4시로 지연됨. 이 사실은 나중에 귀순해온 북베트남군 신병훈련소 소장의 증언으로 알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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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44 ~ 00: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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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짜빈동 전투 중 포격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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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빈동전투 당시 북베트남군도 포격을 가했음. 해병대도 구술자가 대포병작전을 위해 미리 설정해 놓은 적군 박격포예상진지에 대응 포격을 가했음.
- 구술자는 각 소대의 요청에 따라 적 병사들이 밀고 들어오는 곳, 적의 사격이 활발한 곳 등을 포격함.
- 전투 중 저격병에 총격 당하여 머리를 부상당함. 미 해병대 앵그리코의 짐 폴타 중사가 구술자를 발견하여 응급치료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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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18 ~ 00:2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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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짜빈동 전투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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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적이 퇴각을 시작하자 구술자는 계속 포격하며 피해를 줌. 106mm 무반동총을 직접 조작하여 쏘기도 했음.
- 공식 전사에 따르면 짜빈동전투에서 적 243명 사살. 아군 전사는 15명. 진지를 견고하게 쌓았기 때문에 희생자가 적었던 것.
- 저격병에 총격 당해 부상당한 이야기. 철모까지 관통당했는데 찰과상만 입은 것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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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12 ~ 00:3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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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짜빈동전투에서 다른 해병대 장교들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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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의 주도로 해병대 차원에서 짜빈동전투승전기념식을 3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음.
- 해병대가 수행한 월남전 9대작전 소개. 이중 푸옥록전투와 짜빈동전투 포함.
- 화기소대장 김기홍의 활약이 대단했음. 그는 충무훈장 받았으나 구술자는 태극훈장감이라고 평가.
- 신원배, 김성부, 이수현, 김세기, 이정국 등 당시 장교들의 활동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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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23 ~ 00:4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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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빈손군청 연락장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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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당한 구술자는 다낭의 미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해병대 수용중대로 옮겨져 회복한 뒤, 포병 7중대로 원대복귀.
- 얼마 후 월남 빈손군청의 연락장교로 배치됨.
- 빈손 군수(월남군 대위)의 가족과 매우 친하게 지냈음.
- 구술자가 사이공으로 위로휴가를 나간 사이 빈손지역이 베트콩의 습격을 받음. 구술자 대신 근무하고 있던 서용구 대위가 전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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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8:22 ~ 00:5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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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귀국 이후 제대까지 근무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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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9월에 귀국함. 포항 11연대에서 군수참모 근무.
- 김포의 포병대대로 옮겨 가 중대장으로 근무하다가, 여단본부 인사과 상전과장과 미8군의 해병대 연락장교를 겸임.
- 1969년 2월 28일부로 제대.
-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 해병대와 현지 베트남인들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구술자와 ‘렁’이라는 이름의 베트남 사람과의 인연 소개.
- 한국 해병대는 베트남인 학살한 적 없다. 전투 과정에서 선량한 베트남인들이 피해 입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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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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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해병대와 다른 현지 부대들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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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룡부대와 백마부대 등이 같이 행동하는 경우는 없었음. 해병대원들은 백마부대를 고깝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청룡부대가 힘들여 평정해 놓고 이동하면 그곳에 백마부대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 한국 해병대와 미 해병대는 매우 관계가 좋았음. 구술자 역시 현지에서 같이 일했던 미 해병대원들과 현재까지도 교류하고 있음.
- 해병대는 3개 연대여서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한 사람이 최고 세 번까지 파병된 적도 있음. 연속으로 몇 년씩 근무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음.
- 봉급 이야기. 중위였던 구술자는 한 발에 128불 받았음.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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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43 ~ 00:2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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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병대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며 얻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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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해병대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군기와 자신감이 많이 향상되었다고 평가.
- 장비 문제. 해병대는 베트남 참전 이전까지 M
- 1 썼으나 베트남 참전 이후 M
- 16을 장비하게 됨.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모든 해병대원들의 총을 최신품 M
- 16으로 바꾸었음.
- 구술자가 귀국 후 근무했던 김포지역은 해병대에서는 후방에 해당하므로 특별한 훈련이나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음.
- 전역 후 교련교사로 근무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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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01 ~ 00:3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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