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출생, 만주에서 훈륭공립보통학교와 신경공업학교를 졸업. 일본으로 건너가 국사관중학교를 거처 와세다대학에 입학.
와세다대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당하여 니가타 시바다부대에서 훈련. 간부후보 갑종 시험에 합격, 시코쿠 선박공병교육대 입소. 사관후보생으로 동경과 나가노현에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
귀국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 졸업 후 8연대에서 근무. 여순사건 당시 송치관근무. 한국전쟁이 발발 시에 미국에 주재. 귀국 후 육군본부 인사국장, 주미한국대사관 무관, 3군단 부군단장, 21사단 부사단장, 26사단장, 1군 참모장 등을 역임.
미국 지휘차모대학에서 수학함. 귀국 후 정훈감과 작전참모부차장을 역임. 장면 정권에 의해 1군 참모장으로 임명. 5.16쿠데타 이후 전역.
전역 후 도미, 귀국 이후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 석방이후 노스웨스트항공에서 근무. 한국산업안전주식회사를 설립.
1회차 면담 / 2009-11-18 / 00:38:05
1. 면담개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출생, 만주에서 훈륭공립보통학교와 신경공업학교를 졸업. 일본으로 건너가 국사관중학교를 거처 와세다대학에 입학.
와세다대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당하여 니가타 시바다부대에서 훈련. 간부후보 갑종 시험에 합격, 시코쿠 선박공병교육대 입소. 사관후보생으로 동경과 나가노현에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
2. 주요색인어
학병, 군사영어학교, 숙군, CSGNC, 천주교, 반혁명사건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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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및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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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함격북도 온성군 출생, 5남매 중 첫째.
- 중농집안으로 아버지는 토목건축을 사업.
- 만주국 건국 직후 아버지와 함께 만주(길림)로 이동 신경공업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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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00 ~ 00: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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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고등일본시절 및 일본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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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으로 유학, 6개월간 중학교 편입을 준비.
- 국사관 중학교로 편입하여 2년 반동안 수학.
- 중학교 졸업 후 와세다 대학 입학, 법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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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30 ~ 00:2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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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와세다 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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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와세다대학에서 한국인은 한 클래스에 한명.
- 조선인 학생들이 모이는 친목회가 있었음. 친목회에서는 독립, 전쟁에 과한 이야기를 했으나 구술자는 관여하지 않음.
- 대학시절 영어 공부에 열중.
- 게이오대와 친선 운동 경기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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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02 ~ 00:2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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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병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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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 부모로부터 징집관련한 편지를 받음.
- 조선인유학생회로부터 학도지원병 관련 모임 공고를 받음. 명치대학에서 열린 모임에는 최남선, 이광수 등이 연사로 참석 학병지원을 요청.
- 1944년 학병으로 징집, 나가타현의 시바다부대로 입영을 통보받음.
- 징집 이전 만주로 귀국하여 잠시 여행.
- 시바다부대에서 6개월 훈련 후 간부후보생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 2개월 후 갑종 시험에 합격, 공병과로 배정.
- 시고쿠에 있는 선박공병교육대로 이동하여 교육 이수.
- 졸업후 초급간부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동경에서 교육 이수
- 동경에서 해방을 맞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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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11 ~ 00:3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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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방 직전 및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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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당시 사관후보생.
- 해방 직전 동경에는 매일 공중 폭격이 있었고, 파괴 정도가 심했음.
- 학병시절 한국인을 모두 다른 내무반에 비치, 감시한 것으로 추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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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58 ~ 00:4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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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09-11-25 / 01:11:59
1. 면담개요
귀국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 졸업 후 8연대에서 근무. 여순사건 당시 송치관근무. 한국전쟁이 발발 시에 미국에 주재.
2. 주요색인어
학병, 군사영어학교, 숙군, CSGNC, 천주교, 반혁명사건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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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국 및 군사영어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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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일본으로 받은 퇴직금 선박을 구입, 하카다에서 부산으로 귀국
- 귀국 후 우익학병단체에 잠시 관여.
- 민병권으로부터 군사영어학교를 소개받음.
- 해방 직후 지원병 · 학병 · 일본 육사 출신간의 파벌이 존재.
-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 입학.
- 군사영어학교 입학시험은 영어시험 만 치름.
- 군영에서는 주로 영어를 공부.
- 입학 한달 후 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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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13 ~ 00:1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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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관 및 연대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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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3월 김형일과 춘천의 8연대로 부임.
- 군번은 임관순서대로 부여됨.
- 1946년 6월 8연대 연대장으로 하우스만 대위가 부임, 김종갑 연대장과 복수체제.
- 8연대에서는 사병모집에 주력, 경찰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음. 사병 모집은 면접을 위주로 이루어짐.
- 8연대에서는 사병모집에 주력, 경찰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음. 사병 모집은 면접을 위주로 이루어짐.
- 구술자는 좌익사상을 가진 지원자는 배제했으나 다른 장군들은 딱히 사상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 좌익사상을 가진 지원자를 뽑는 좌익계열 장군도 존재.
-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괜찮은 편이었음
-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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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16 ~ 00:30: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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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부 발령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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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9월 하우스만의 전화를 받은 후 본부로 발령. 임선한의 전출로 빈 공석을 채움.
- 인사담당으로 하우스만과 함께 일함.
- 육군본부에서는 고급 부관으로 3년 6개월 재직.
- 송호성에 대한 평가와 일화소개.
- 유동렬에 대한 평가와 일화소개.
- 이범석 장군과 민족청년단(족청)파벌에 관한 평가와 일화 소개.
- 당시 군에서는 족청계에 대한 차별대우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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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58 ~ 00:4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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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숙군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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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내부에서 숙군작업이 진행됨.
- 구술자는 숙군당시 군법회의의 송치관으로 재직.
- 숙청당한 최남근에 대한 평가.
- 박정희 또한 좌익전력으로 군법회의 회부되어 사형판결을 받음. 정일권, 백선엽등의 고위간부의 관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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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7:06 ~ 00:5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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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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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4월 정일권의 보좌관 자격으로 미국 시찰, 미국에 있던 중 한국전쟁 발발, 장면총리의 명령으로 7월 상순 경 귀국.
- 총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 참모총장인 정일권의 스페셜어시스턴트로 재직.
- 후퇴하면서 미 24사단 연락장교 재직 후 인사국장으로 임명.
- 1951년부터 미국 대사관 무관으로 임명. 당시 주미대사는 양유찬, 해군무관은 현시학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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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5:58 ~ 00:5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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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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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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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4월 정일권의 보좌관 자격으로 미국 시찰, 미국에 있던 중 한국전쟁 발발, 장면총리의 명령으로 7월 상순 경 귀국.
- 총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 참모총장인 정일권의 스페셜어시스턴트로 재직.
- 후퇴하면서 미 24사단 연락장교 재직 후 인사국장으로 임명.
- 1951년부터 미국 대사관 무관으로 임명. 당시 주미대사는 양유찬, 해군무관은 현시학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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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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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 대사관 무관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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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무성으로부터 무관으로 정식임명을 받아, 워싱턴의 통신감실에서 근무.
- 무관 재직 시, 미국 육군성의 군인 훈련 영화의 한글 더빙 작업을 진행.
- 한국 정부에 위클리 리포트 제출, 미 8군과 한국군의 교섭을 중재.
- 미국에서 하우스만과 함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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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09 ~ 00: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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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국과 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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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한국으로 소환당한 후 조사가 1년 정도 진행된후 면직.
- 당시 군내에는 관북· 관서 · 이남의 세 개 그룹이 존재, 학병 일본군 등의 출신이력보다도 출신지역에 따른 파벌이 강함.
- 구술자는 관북그룹의 핵심인물. 이종찬을 위시한 이남파의 모함으로 면직됨.
- 구술자와 같은 관북파인 정일권, 강문봉, 최홍희도 함께 면직됨. 관서파의 인물도 면직됨.
- 이남파는 상대적으로 늦게 군으로 들어온 집단.
- 이종찬과 군내 파벌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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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24 ~ 00:2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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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면담 / 2009-12-02 / 01:15:07
1. 면담개요
귀국 후 육군본부 인사국장, 주미한국대사관 무관, 3군단 부군단장, 21사단 부사단장, 26사단장, 1군 참모장 등을 역임.
미국 지휘차모대학에서 수학함. 귀국 후 정훈감과 작전참모부차장을 역임. 장면 정권에 의해 1군 참모장으로 임명. 5.16쿠데타 이후 전역.
전역 후 도미, 귀국 이후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
2. 주요색인어
학병, 군사영어학교, 숙군, CSGNC, 천주교, 반혁명사건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3-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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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면직과 면직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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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싸움의 과정에서 면직.
- 면직의 이유는 화폐개혁을 빌미로 군자금을 유용했다는 것.
- 면직 이후 다른 활동없이 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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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15 ~ 00:2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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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결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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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9월에 고향지인의 중매를 통해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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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42 ~ 00:2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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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직과 1군단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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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준장으로 복직, 삼군단의 부군단장으로 임명.
- 6개월 후 21사단 부사단장, 3개월 후 26사단 사단장을 역임.
- 백선엽장군의 요청으로 1군 사령부의 참모장이 됨.
- 1년 후 미국 육군대학 유학 시험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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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41 ~ 00:3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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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으로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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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캔사스 시티에 있는 콜럼버스 조지아 인텐시브 스쿨에서 유학.
- 장군 3사람과 영관급 3사람이 함께 감.
- 당시 4, 5개월의 영관급이 듣는 단기코스와 13개월의 장기코스가 있었음, 구술자는 13개월의 정규코스를 밞음
- 미국정부에서 준 일당으로 생활비를 충당.
- 숙소는 학교 내 기숙사.
- 교육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2~3시까지, 교육 후에는 인접대학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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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49 ~ 00:4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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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귀국과 정후감, 작전참모부 차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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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귀국하여 정훈감을 맡고 이후 작전참모차장에 재직.
- 정훈감 당시 대공교육에 가장 힘씀. 미국의 교재를 번역해서 사용, 군단장 등을 초청 특강을 하기도 함.
-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활동할 당시 부장은 장창국 → 한병선으로 변동.
- 1959년까지 계속 차장으로 활동.
- 작전에 대한 장기계획, 단기계획, 중단기 계획 등을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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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21 ~ 00:4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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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19 당시 군의 동향 및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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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좌익세력에 의한 잠입 등에 신경을 썼음.
- 3, 4선 개헌 이후 이승만에 대한 군의 평가가 부정적이 됨. 그렇다고 어떠한 수단을 모색한 것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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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14 ~ 00:4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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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창룡 암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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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군 사령부 참모장 재직시 김창룡 암살사건이 발생.
- 김창룡은 관북출신이지만 이보다는 이승만과의 친분이 두터웠음.
- 김창룡과 정일권이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정일권은 암살사건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음.
- 김창룡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정일권과 친한 강문봉은 재판을 받음, 그러나 어떤 증거는 없음.
- 김창룡에 대한 군내부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구술자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음.
- 군내부에서 315부정선거 관련 강요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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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8:59 ~ 00:5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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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면정권기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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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8월 이한림이 일군사령관으로 부임, 구술자는 한달 후 참모장으로 부임.
- 장면, 이한림과는 천주교를 통한 친분이 있었으나, 종교관계지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음. 이승만정권에서의 감시가 있었음.
- 장면과는 미국대사관 무관시절 잠시 만남.
- 구술자가 장면에게 참모총장으로 이한림을 추천했으나 장도영이 참모총장이 됨. 이사건의 배후에는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이 있음.
- 장도영은 장면과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군내부에서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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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51 ~ 00:5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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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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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면정권기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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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8월 이한림이 일군사령관으로 부임, 구술자는 한달 후 참모장으로 부임.
- 장면, 이한림과는 천주교를 통한 친분이 있었으나, 종교관계지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음. 이승만정권에서의 감시가 있었음.
- 장면과는 미국대사관 무관시절 잠시 만남.
- 구술자가 장면에게 참모총장으로 이한림을 추천했으나 장도영이 참모총장이 됨. 이사건의 배후에는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이 있음.
- 장도영은 장면과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군내부에서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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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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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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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발발 이전부터 군 내부에 쿠데타 관련 소문이 있었음.
- 구술자는 미 8군 사령관 맥그루더로부터 온 공문
- 박정희와 박병권을 제대시키라
- 에 대해 알고 있었음. 이 후 박정희를 지방으로 전근시키는 조치를 취함.
- 장도영은 쿠데타 관련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 확실한 태도나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 5.16발발 당시 구술자가 장도영에게 수십 번 전화를 했으나 출동관련 지시는 전혀 내려오지 않음.
- 5월 15일 지휘관회의를 하고, 다음날 아침 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음.
- 쿠데타관련자로부터 함께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불응.
- 구술자는 이한림에게 쿠데타진압하자는 제의를 여러 번 했지만, 상부로부터 지시가 없는 상황이라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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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55 ~ 00:1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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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편과 미국으로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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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예비역 준장으로 예편당함.
- 당시 혁검부장인 박창암으로부터 심문을 받았으나 체포를 당하지는 않음.
- 예편 이후 미국으로의 유학을 준비했지만, 혁명정부의 반대로 여권이 나오질 않음. 미국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1961년 9월 출국.
- 아리조나 주립대학으로 유학, 국제정치학, 공공행정학, 국제법을 공부.
-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왕복여비와 생활비, 학비를 일체 지원 받음.
- 함께 출국한 이한림은 L.A.로 구술자와 분리됨. 이에 대해 구술자는 미국정부와 혁명정부의 타협점이라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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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33 ~ 00:2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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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혁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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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9월 미국에서 귀국.
- 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사장으로 지원했으나 함경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발령이 되지 않았음.
- 한국산업안전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운영.
- 박일만, 김동하와의 모의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찾아왔고 수배되어 도피생활.
- 도피과정에서 UPI통신의 기자와 만나 군정연장을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신문에 나온 대로 미국에 군정연장을 저지하는 행동을 요청은 하지 않았음.
- 도피 당시 미국인인 로랜스 이반 베이커의 집에서 숙박. 구술자는 안면이 없던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소개받음.
- 로랜스 이반 베이커는 정보계통에 있던 사람으로 추측됨. 그의 집에서 1, 2달정도를 숙박하던 중 중앙정보부에 체포당함.
- 방원철과 함께 혁명저지를 모의하고 과도내각 명단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체포됨. 그러나 구술자는 방원철, 박일만 등과 만나본적이 없음.
- 박정희를 공산당이라 했다는 이유로 허위사실 유포 혐의를 받음.
- 북한에서 온 간첩인 황태성의 존재를 친구들을 통해 들음. 황태성과 박정희를 접촉하게 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음.
- 1963년 선거에서 사상논쟁 발생, 국회에서 구술자의 이름이 거론됨. 그러나 야당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음.
- 귀국 이후 생활이 어려워 정치쪽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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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59 ~ 00:3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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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 면담 / 2009-12-16 / 01:26:11
1. 면담개요
석방이후 노스웨스트항공에서 근무. 한국산업안전주식회사를 설립.
2. 주요색인어
학병, 군사영어학교, 숙군, CSGNC, 천주교, 반혁명사건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4-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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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혁명사건 이후의 삶과 노스웨스트 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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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서실장 황종갑의 주선으로 1963년 9월 귀국.
- 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사장으로 지원했으나 함경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발령이 되지 않았음.
- 그 후 개인교사 등으로 생업을 이어감 .
- 1964년 노스웨스트 항공회사의 일반 직원으로 일함.
- 1973년까지 10년동안 슈퍼바이저, 매니저등의 직급으로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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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46 ~ 00:1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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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산업안전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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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말 노스웨스트에서 퇴사하여 경험을 살려 한국산업안전주식회사를 창립. 항공수송, 티켓팅, 후방지원등을 맡아보는 회사임.
- KNA납치사건이 발생한 뒤 국가로부터 항공치안 업무를 위임받음.
- 1991년까지 회사를 운영하고 퇴직.
-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 정부로부터 지원과 방해 둘다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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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4:48 ~ 00: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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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관련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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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비판적이었으나 후반에 가서는 긍정적으로 판단했음.
- 그러나 삼선이후에는 군 퇴역인사 사이에서도 비판여론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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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19 ~ 00:2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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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군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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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부터 이치업장군의 주도로 백선엽, 원용덕, 정일권 등의 지원으로 창군동우회가 조직됨.
- 구술자는 1992년경부터 간사직을 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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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01 ~ 00: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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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20 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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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는 귀국이후 삼청동에 있는 학병동맹이 잠시 나갔으나 이념적으로 맞지 않아 우익성향의 학병단에 나감.
- 학병단을 모태로 120동지회 창립. 1월 20일이 학병으로 징집된 날이었음.
- 현역군인이던 시절에는 참여하지 않음. 학병동지회는 주로 군대를 안간사람, 예편한 사람의 주도로 운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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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27 ~ 00:3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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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만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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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에는 독립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
- 만주에 가기 전부터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음
-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비적, 마적이라고 불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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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46 ~ 00:3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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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와세다 대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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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시작되자 와세다 대학에 있던 일본인학생들도 문과계통을 우선으로 징집됨, 이과는 징집연기가 있었음.
- 조선인의 경우도 이과는 학병에 징집되지 않음.
- 전시에도 와세다 대학의 분위기는 자유로웠음, 상대적으로 중하류계층의 학생이 많았음.
- 대학시절 고등계형사가 조선인학생의 하숙집을 감시하기도 함.
- 명치대학에서 열린 지원병 권유 모임에서 조선인학생들의 입장은 찬반으로 나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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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4:53 ~ 00:4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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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군사영어학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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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영어학교는 교육기간이 한 달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신탁통치와 같은 정치와 관련한 논쟁은 거의 없었음.
- 구술자는 우익계열의 학생들과만 어울림.
- 군사영어학교는 내무반제도 없이 모든 학생이 출퇴근했음. 오전 중에 일과가 끝나고 나머지는 자유 시간.
- 봉급은 그 당시 돈으로 1300원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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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05 ~ 00:4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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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8연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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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연대당시 봉급은 군사영어학교 시절보다 많이 높았음.
- 8연대는 춘천의 방직공장(적산)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
- 모병을 위해서 면사무소, 군청, 경찰서에 가서 부탁을 함, 모병에 군이 직접 관여하지 않아서, 모병방법,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함.
- 8연대 예산은 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아닌 통위부에서 지급됨.
- 1948년 경 월북사건이 발생, 부산의 5연대로부터 지원을 받았을 수 있으나, 구술자가 재직한 당시에는 다른 부대로부터 지원받은 일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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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52 ~ 00:5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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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우스만과의 관계 및 하우스만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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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7월경에 하우스만이 8연대 연대장으로 부임.
- 3개월 후 하우스만이 본부로 이동했는데, 함께 일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음.
- 미국에 갔을 때에도 하우스만을 만나는 등 친분을 유지
- 구술자는 하우스만이 한국군의 조직, 성장, 전쟁 중 많은 공헌을 했다고 평가.
- 하우스만은 1952년 미국으로 귀국한 후 미 8군 문관으로 다시 한국에 옴.
- 한국군내부에 하우스만과 친한 사람도 있었지만,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음.
- 구술자는 5.16직후 유학을 위한 여권이 나오지 않을 때, 하우스만에게 도움을 받음.
- 하우스만은 원조 및 재정과 관련하여 미국을 비판하기도 함.
- 하우스만은 한국의 권력자들과 친분이 두터움.
- 구술자는 박정희가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하우스만을 이용했을 거라고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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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22 ~ 00:5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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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숙군관련 개인들에 대한 평가와 일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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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석은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오키나와에서 전투, 채병덕 장군에게서 창군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음. 반미감정을 가진 것은 확실하나 조직적으로 한 것은 아님.
- 오일균의 경우 반미감정이 있는 것은 확실하나 좌익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함.
- 최남근의 경우도 오일균과 비슷.
- 조병권은 만나본 적이 없음.
- 송치관은 혐의나 이런 것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함.
- 숙군과정에서 박정희와 같이 사형을 받았는데 풀려난 사람은 거의 없음.
- 숙군대상이 2,3천명이었으나 실제로 재판까지 간 경우는 많지 않음.
- 김종석의 사형 집행 시 입회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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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8:50 ~ 00:5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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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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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군관련 개인들에 대한 평가와 일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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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석은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오키나와에서 전투, 채병덕 장군에게서 창군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음. 반미감정을 가진 것은 확실하나 조직적으로 한 것은 아님.
- 오일균의 경우 반미감정이 있는 것은 확실하나 좌익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함.
- 최남근의 경우도 오일균과 비슷.
- 조병권은 만나본 적이 없음.
- 송치관은 혐의나 이런 것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함.
- 숙군과정에서 박정희와 같이 사형을 받았는데 풀려난 사람은 거의 없음.
- 숙군대상이 2,3천명이었으나 실제로 재판까지 간 경우는 많지 않음.
- 김종석의 사형 집행 시 입회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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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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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급부관역임 당시의 임무 및 청년단체와 군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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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부관은 군 인사행정을 담당함.
- 고급부관은 G1하고만 연관이 있음.
- 국군준비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이 군대로 전환한다는 이야기가 많음.
- 창군초기 군내부에 청년단 출신이 많았던 것은 사실.
- 파벌이 있었지만 근무에 지장이 될 정도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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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50 ~ 00: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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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전쟁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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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5월부터 참모회의에서 정보당국이 북한의 움직임이 수상치 않다는 보고를 함. 미군으로부터도 북한 동태와 관련된 정보가 있었음.
- 미군이 북진을 우려하여 무기를 주지 않아 실질적인 대비를 할 수 없었음.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인 충돌은 주로 북한의 도발로 시작됨. 남한은 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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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31 ~ 00:1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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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관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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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군단 부단장 시절의 군단장이 강문봉장군.전형적인 군인이지만 정치적으로도 관여하고 있었음. 정일권, 이승만과도 접촉. 김창룡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4.19로 인해 석방됨. 군대로 다시 복귀하진 않고 이후 5.16당시 복권, 외국대사 등으로 임명.
- 김창룡사건은 정인택과 그 부하들이 조사.
- 21사단 부사단장 시절의 사단장 백남권, 정치는 모르고 그저 군대밖에 모름. 전두환정권 때 부정축재에 연루되어 군을 떠남.
- 일군참모장 당시 사령관 백선엽. 공평하고, 정치적인 면이 있음. 당시 이승만이 서북, 관북의 리더인 백선엽과 정권을 상호 견제시켰음.
- 작전참모부 차장시절 부장 장창국. 일본육사출신으로 호인이다. 연참총장재직후 5.16이후에 예편.
- 작전참모부 차장시절 부장 함병선. 지원병 출신으로 호인이다. 참모부장하다가 예편.
- 이한림장군.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 적이 많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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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5:03 ~ 00:2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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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면정권에 대한 평가, 황태성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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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정권기 감군문제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없음.
- 구술자는 민주당정권이 무능했고, 정쟁 때문에 허송세월하다가 군부의 쿠데타에 밀려났다고 평가.
- 장도영 대신 이한림을 참모총장으로 했다면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
- 황태성 사건에 대해서는 김완룡을 통해서 들음. 피상적인 수준으로 알고 있음.
- 황태성과 박정희가 손을 잡아 공산화 될 것인다에 대한 우려만 있었음.
- 황태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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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56 ~ 00:3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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