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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회원 가입과 서비스 이용 제4조 (이용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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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조 (계약 사항의 변경 및 정보 보유/이용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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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계약 해지 제9조 (계약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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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 (자격상실)
  1. 다음 각항의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 "연구원"은 사전통보 없이 이용계약을 해지하거나 기간을 정하여 서비스 이용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2. 1. 타인의 서비스 ID 및 비밀번호를 도용한 경우
  3. 2. 서비스의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한 경우
  4. 3.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을 고의로 유포시킨 경우
  5. 4. 회원이 국익 또는 사회적 공익을 저해할 목적으로 서비스이용을 계획 또는 실행하는 경우
  6. 5.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게시, 게재, 전자메일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전송 하여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한 경우
  7. 6. 수신자의 의사에 반하는 음란, 저속, 위협적인 내용이나 광고성 정보, 전자우편 등을 지속적으로 전송하는 경우
  8. 7. 정보통신설비의 오 작동이나 정보 등의 파괴를 유발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프로그램 등을 유포하는 경우
  9. 8. "연구원", 다른 회원 또는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
  10. 9.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 외부기관의 시정요구가 있거나 불법선거 운동과 관련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은 경우
  11. 10. 타인의 개인정보, 이용자ID 및 비밀번호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경우
  12. 11. "연구원"의 서비스 정보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연구원"의 사전 승낙 없이 복제 또는 유통시키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경우
  13. 12. 전기통신 관련법령 등에 위배되는 경우
  14. 13. 본 약관을 포함하여 기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한 이용조건 및 관계법령에 위반한 경우

제4장 책임 제11조 ("연구원"의 의무)
  1. 1."연구원"과 제휴를 맺은 사이트와 "연구원"의 사이트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정보를 제휴 사이트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공유를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컴퓨터에 쿠키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2. 2. "연구원"은 "서비스" 제공으로 알게 된 "회원"의 신상정보를 본인의 승낙 없이 제3자에게 누설, 배포하지 않습니다. 단,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합니다.
    1.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 사업법, 지방세법, 소비자보호법, 한국은행법, 형사소송법 등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2. - 통계작성/학술연구 또는 시장조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서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
  3. 3. "연구원"은 "회원"의 전체 또는 일부 정보를 업무와 관련 된 통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4. "연구원"은 "서비스"가 계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부득이한 이유로 "서비스"가 중단되면 지체 없이 이를 수리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단, 천재지변, 비상사태, 시스템 정기점검 및 "연구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거나 중지할 수 있습니다.

제12조 (회원의 의무)
  1. 1.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관리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2. 2. "회원"은 자신의 아이디를 타인에게 양도, 증여, 대여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3. 3. 자신의 아이디가 부정하게 사용된 경우, "회원"은 반드시 "연구원"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합니다.
  4. 4. "회원"은 게시물에 등록된 데이터를 이용한 영업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5. 5. "회원"은 "연구원"이 보내는 공지 메일을 수신해야 합니다.

제13조 (회원의 게시물)
  1. 1. 게시물이라 함은 "연구원"의 각종 게시판에 회원이 올린 글 전체를 포함합니다.
  2. 2. 회원이 게시하는 정보 (및 질문과 대답)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이나 문제는 전적으로 회원 개인의 판단에 따른 책임이며, "연구원"의 고의가 아닌 한 "연구원"은 이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습니다.
  3. 3. 회원의 게시물로 인하여 제3자의 "연구원"에 대한 청구, 소송, 기타 일체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회원은 그 해결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연구원"을 위하여 분쟁을 처리하여야 하며, "연구원"이 제3자에게 배상하거나 "연구원"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회원은 "연구원"에 배상하여야 합니다.
  4. 4. "연구원"은 "회원"의 게시물이 다음 각 항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사전통지 없이 삭제 합니다. 그러나 "연구원"이 게시물을 검사 또는 검열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1. 1) 제3자를 비방하거나 중상 모략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우
    2. 2) 공공질서,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인 경우
    3. 3) "연구원"의 저작권, 제3자의 저작권등 기타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
    4. 4) "연구원"에서 규정한 게시기간을 초과한 경우
    5. 5) 상업성이 있는 게시물이나 돈벌이 광고, 행운의 편지 등을 게시한 경우
    6. 6) 사이트의 개설취지에 맞지 않을 경우
    7. 7) 기타 관계법령을 위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5. 5. "연구원"은 "회원"이 등록한 게시물을 활용해 가공, 판매, 출판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제5장 정보제공 제16조 (정보의 제공)
  1. "연구원"은 "회원"에게 필요한 정보나 광고를 전자메일이나 서신우편 등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회원"은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가입신청 메뉴와 회원정보수정 메뉴에서 정보수신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정보 수신 거부한 "회원"에게도 제13조5항의 "연구원" 공지 메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제6장 손해배상 및 면책 제14조 (책임)
  1.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연구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회원"에게 발생한 어떠한 손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2.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한 정보, 제품, 서비스, 소프트웨어, 그래픽, 음성, 동영상의 적합성, 정확성, 시의성, 신빙성에 관한 보증 또는 담보책임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제15조 (면책)
  1. "연구원"이 천재지변 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서비스"를 중단할 경우, "회원"에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제16조 (관할법원)
  1.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소송이 제기될 경우 "연구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법원 또는 대한민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른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니다.
  2. 본 약관의 해석과 적용 및 본 약관과 관련한 분쟁의 해결에는 대한민국법이 적용됩니다.

부 칙
  1. 이 약관은 2008년 10월 6일부터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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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현 / 1929.07.21

생산기관 서울대 면담자 이동원 면담자정보
검독자 이동원 면담 총시간 18시간 40분46초
조회수 2423 스크랩수 0
면담일(장소) [ 총7회 ]
  • 2014-05-27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술자 자택)
더 보기 ▼
간략 소개

  • 구술자료 상세
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1회: 출생과 가족/신의주동중 입학과 근로 동원/신의주동중 시절의 일화들/해방 후 오산중학 전학/소련군 진주와 반공학생사건/아버지의 조선민주당 활동과 토지개혁/이대용 장군과의 인연/속성사범과 수료/임해인민학교 부임과 학교 상황/정주중학교 부임과 고향 집 압류/고향의 짐 정리/해주를 거쳐 월남/개성을 거쳐 서울에 정착/교사 지원과 육사 지원/48년 전쟁 예감과 아버지의 평양 생활/월남한 가족과 남겨진 가족 2회: 조선어신철자법의 보급과 중단/봉양고등공민학교 부임과 열악한 교육 여건/전쟁 발발과 피난/입대와 중대 서무 임무/육군종합학교 3기 수료와 소위 임관/6사단 상황과 704고지 전투/998고지 전투/중공군과 전투 후 후퇴/용문산전투/용문산전투의 의의와 1사단 중심의 전사/1050고지 주둔과 보급 문제/중위 진급과 고지전/초등군사반 선발과 문화 충격/초등군사반의 구성과 효과/초등군사반의 생활 3회: 한국전쟁기 성군기 문란/이형석 장군에 대한 기억/김홍일 장군에 대한 기억/한국전쟁기의 기억/한국전쟁 휴전 전후/어려웠던 생활/이강석 소위 진급문제/장군 진급 적체문제/포병대장 시절 부정부패 목격/정규군인신분개정안 연구위원회/국가재건 최고회의 근무 4회: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회 담당관/군인사법 작성/육군대학 졸업/26사단 작전참모/육군참모총장 비서실 근무/인사참모부 근무/6군단 작전참모./1.21사태/28사단 포병사령관 5회: 베트남 파병과 주월한국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시절/정보참모 시절의 활동/정보참모 시절 미월 월경작전에 대한 정보 수집(1)/정보참모 시절 미월 월경작전에 대한 정보 수집(2)/구정공세, 닉슨독트린 전후 베트남 전쟁의 변화/작전참모시절/작전참모 및 기획참모부장시절/주월한국군사령부의 편제와 기획참모의 역할/철군준비/전투능력평가단장/베트남에서의 대민작전/귀국과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북한과장 임명/베트남전쟁 당시의 월급체계/베트남에서의 일상생활/한국군의 파병 사전 교육, 한국 귀빈들의 베트남 방문/베트남전 당시 군인들의 식생활, 베트남의 종교문제/합참 정보국 북한과장 시절(1)/합참 정보국 북한과장 시절(2) 6회: 베트남전쟁에 대한 추가적인 기억(1)/베트남전쟁에 대한 추가적인 기억(2)/북한과장 역임과 준장 승진/6군단 포병사령관(1)/6군단 포병사령관(2)/육군본부 부대훈련처장/한국군 장비 현대화사업/사단장 근무(1)/사단장 근무(2)/사단장 근무(3)/사단장 재직 시 기억(1)/사단장 재직 시 기억(2)/사단장 재직 시 기억(3)/사단장 재직 시 기억(4)/12·12 전후의 기억 7회: 12․12 사태에 대한 회고/5․18 당시의 상황/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재직(1)/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재직(2)/3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5․18에 대한 보충적 회고와 평가/10․26을 둘러싼 인물들 및 하나회 세력에 대한 회고와 평가/신군부 세력에 대한 회고(1)/신군부 세력에 대한 회고(2)/전두환 정권 시절에 대한 평가/포병학교 교장 시절 훈장을 양보한 일화/포병학교 교장 및 3사관학교 교장 시절의 일화/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는 과정/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1)/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2)/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3)/인생 전반에 대한 회고
1회차 면담 / 2014-05-27 / 02:37:24
1. 면담개요
출생과 가족/신의주동중 입학과 근로 동원/신의주동중 시절의 일화들/해방 후 오산중학 전학/소련군 진주와 반공학생사건/아버지의 조선민주당 활동과 토지개혁/이대용 장군과의 인연/속성사범과 수료/임해인민학교 부임과 학교 상황/정주중학교 부임과 고향 집 압류/고향의 짐 정리/해주를 거쳐 월남/개성을 거쳐 서울에 정착/교사 지원과 육사 지원/48년 전쟁 예감과 아버지의 평양 생활/월남한 가족과 남겨진 가족
2. 주요색인어
신의주학생사건, 오산학생사건, 근로동원, 조선어 폐지, 조선어 철자법, 북조선민주당, 우리청년회, 전시 강간, 전시 범죄, 토지개혁, 초등군사반, 여순사건, 육사8기, 평양 은평제재소, 이산가족, 임해인민학교, 정주중학교, 신의주, 정주, 덕천, 해주, 개성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출생과 가족
  • 1929년 7월 21일 평북 정주군 임포면 동로동 출생.
  • 1936년 임해보통학교 입학.
  • 조부 전몽인은 평북 태천의 박운암을 사사하였음.
  • 아버지는 신의주동중학교에서 동맹휴학으로 퇴학을 당하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졸업을 하였음. 이후 일본 미카게사범을 나와서 평북에서 교원 생활을 함.
00:00:01 ~ 00:10:23 동영상 재생
2. 신의주동중 입학과 근로 동원
  • 1939년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 조선어가 폐지되었음.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 일본화가 진행되었음.
  • 1942년 신의주동중 입학. 신의중동중은 일본인이 조선인들을 초급공무원을 만들기 위해서 세운 학교라고 생각함. 2학년 때부터는 학교의 근로동원이 심했음.
  • 비행장 건설이 싫어서 학교에 안 가고 만주로 넘어가 술을 마시기도 했음. 술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학교 선배를 만났는데, 밥을 얻어먹었음. 나중에 월남해서 그 선배를 학교에서 다시 만남.
00:10:24 ~ 00:21:51 동영상 재생
3. 신의주동중 시절의 일화들
  • 신의주동중의 교사 중 2/3 정도가 일본인이었음.
  • 학창 시절 사고를 쳐서 불려가서 야단을 맞았음.
  • 교련 담당 중위는 학생을 때릴 적에도 원칙을 가지고 절제하는 태도로 때렸음. 그게 자신에게 인상 깊었음.
  • 1학년 때 게다를 신고 다니다가 상급생에게 따귀를 맞았음. 그만큼 당시 중학생들은 성숙했음.
  • 교장이 훈화 시간에 이승만, 김규식, 김일성을 언급했고 아버지가 조선독립을 위해 힘쓰는 분들이라고 알려주셨음.
  • 집안에 한글 소설들이 있었고, 아버지가 엽서에 한글로 써서 구술자에게 보냈기 때문에 구술자가 식민지 교육을 받으면서도 한글을 잊지 않을 수 있었음.
00:21:52 ~ 00:32:18 동영상 재생
4. 해방 후 오산중학 전학
  • 해방 후 아버지가 구술자를 오산중학으로 전학시킴. 당시 오산학교는 오산학생사건이 발생한 직후여서 구술자가 공산당 밀정으로 오해받기도 하였음.
  • 오산중학을 우등졸업해서 하급생들이 하숙집을 포위하니까 하숙집 주인이 중개해서 졸업식이 끝나고 다같이 보신탕을 해먹었음. 이게 당시 전통이었다고 함.
  • 아버지는 해방 후 조선민주당의 평북 곽산 지역 당위원장으로 활동하였음.
  • 해방 후 신의주에는 우리청년회라는 우익 청년조직이 있었음. 여기에 영향을 각 교 학생회가 영향을 받을 것 같음. 신의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신의주동중이 앞장서서 반공 활동을 준비하였음.
00:32:19 ~ 00:41:37 동영상 재생
5. 소련군 진주와 반공학생사건
  • 오산에서는 11월 17일, 오산학생사건이 났음. 공산당이 오산학교를 친공 학교로 개편하려고 했기 때문임. 이에 자극받아 23일, 신의주에서 학생 봉기가 일어남.
  • 신의주학생사건의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청년회가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이라고 봄. 우리청년회에는 거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속해있었음.
  • 소련군의 진주 후, 소련군이 시계를 한가득 차고 다닌 것, 카바이트 공장의 기계를 뜯어서 화물열차로 실어나르던 것, 조선인들의 돈을 강탈하던 것이 기억남.
  • 일본인들 피해는 더 심각했는데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고 소련군에 의한 강간도 심각한 수준이었음.
  • 조선인들도 소련군에 의한 강간을 두려워했음. 소련군이 대부분 죄수 출신이라고 들었음. 소련군은 아주 엉망이었음.
00:41:38 ~ 00:52:20 동영상 재생
6. 아버지의 조선민주당 활동과 토지개혁
  • 한국전쟁 중 국군도 북진하고 나서 강탈 및 강간 등 불미스런 일이 있었음. 구술자는 자신이 속한 6사단은 평양에 가지 않았다고 함.
  • 아버지는 초창기부터 철저한 반공이었음. 조만식 감금 이후 아버지에게는 북조선민주당 당원증이 안 나왔음.
  • 48년 4월 3차 토지개혁 때 정주에 있는 땅을 모두 빼앗겼음.
00:52:21 ~ 00:57:49 동영상 재생
7. 고향의 짐 정리
  • 평양으로 나와서 고열에 시달림. 사흘 후 열이 가라앉음.
  • 정주중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여비를 마련해 군, 면, 리, 동 인민위원회를 거쳐 고향집의 짐을 싣고 갈 달구지를 빌림. 집에 있던 책들을 다 팔고 달구지를 끌어 곽산역까지 나옴.
  • 역에서 보니, 공산당집 아이들이 쫓겨난 선생님에게 엿을 잡수라고 갖다주는 것음 봄.
00:41:03 ~ 00:51:06 동영상 재생
1-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이대용 장군과의 인연
  • 1952년 9월, 미국 초등군사반에 갔을 때 자치회 소식지를 펴내기도 함.
  • 이대용 장군도 함께 미국에 갔는데 이대용 장군은 귀국할 때 자살용 권총을 사자고 권유하기도 함. 귀국 후 인천에서 대구 육군본부로 귀환 중 다른 장교와 달리 이대용 장군은 일반 사병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음. 베트남전쟁 중에는 베트남 무관으로 가 있는 이대용 장군에게 벤츠를 가지고 오라는 권유를 구술자가 하였는데, 이대용 장군은 사익을 챙길 수 없다며 거절함. 이대용 장군과의 인연으로 자유수호국민운동본부 일을 10년 이상 하고 있음.
00:00:01 ~ 00:10:34 동영상 재생
2. 속성사범과 수료
  •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은 소시민을 아주 많이 경계하였음.
  • 구술자는 지주 성분이라서 초등학교 교원을 만드는 중학교 부설속성사범과에 진학함. 해방 후 북한은 사람들의 월남으로 인해 교원이 부족하였음.
  • 속성사범과를 마치고 임해인민학교 교사로 부임함. 6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조선어 철자법을 제대로 아는 교사가 없었기 때문임.
  • 속성사범과에 다닐 때 오산소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그곳에 계신 김희행 선생님이 조선어 철자법 설명을 잘 주었음.
00:10:35 ~ 00:21:14 동영상 재생
3. 임해인민학교 부임과 학교 상황
  • 교과서가 없어서 일본어 교과서를 조금씩 번역해서 사용함. 몇 달 후 조선어독본 교과서가 나오기는 했음.
  • 소련식으로 졸업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세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합격했음.
  • 폐결핵에 걸렸는데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소학교 교사를 했음. 식량이 없어서 점심 때 밥을 못 먹고 숙직실에 누워 있으면 여학생들이 도시락을 놓고 달아났음.
  •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학적부 선행개평을 꼼꼼히 기재했기 때문임.
  • 이여리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녀는 만주에서 고등국민학교를 나와서 이후에 면여성동맹위원장이 되고 군인민위원회 시학이 되었음.
  • 군인민위원회 교육과에 가서 공산주의 상식을 묻는 면접을 받음.
00:21:15 ~ 00:33:14 동영상 재생
4. 정주중학교 부임과 고향 집 압류
  • 면접 후 정주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음. 20대 중학생들이 많은 시절에 19세로 부임한 것임.
  • 조선어 문법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박상준 저 중등조선어문법과 최현배 저서를 공부하고 가르침.
  • 화폐개혁이 있었음.
  • 48년 4월, 집을 비우라는 통지가 옴. 할머니를 아버지 계신 평양에 보내고 조상들 위패를 챙겨 무덤에 묻고 평양으로 나옴.
00:33:15 ~ 00:41:02 동영상 재생
5. 해주를 거쳐 월남
  • 사촌형의 도움으로 평양시 제재공업 출장증으로 가지고 사리원을 거쳐 해주로 이동함. 그 와중에도 기차 안에서 오락회가 조직되어 공산당 노래를 부름.
  • 해주 외삼촌댁에 도착하자마자, 보안서 사람이 신고를 받고 와서 출장 목적 등을 캐물음.
  • 1948년 6월 밤, 바다 갯벌길을 거쳐 월남. 남쪽의 한 농가에 들어갔더니 월남한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음.
00:51:07 ~ 00:58:52 동영상 재생
1-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개성을 거쳐 서울에 정착
  • 그 집에 있던 청년단원이 손의 굳은 살이 없음을 확인해서 군이 아님을 확인받았음. 청단경찰서의 한 지서에서는 경찰관이 자신의 반지에 눈독을 들여 이동이 지체되었음. 청단경찰서에서 자신이 중학교 교사였음을 밝히고 통과되어 개성 피난민 수용소에 기거하게 되었음. 중간에 초등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데, 아는 노래가 북한 노래밖에 없어서 아이들이 우물쭈물 하였음. 피난민 수용소에서 반 학생 가족을 만나기도 하였음.
  • 갈월동 고모부 집에 의탁하고 있는데, 신문 가판을 시도해보았으나 요령이 없어서 실패함. 이후 동창을 만나 가짜 담배를 팔아보았으나 그것도 맘에 들지 않아 그만둠.
00:00:01 ~ 00:10:29 동영상 재생
2. 교사 지원과 육사 지원
  • 경기도 학무국 담당자에게 국밥을 한 그릇 사주고 교사 자리를 청탁을 함.
  • 육사 8기에 지원서를 넣는데 전 광복군 김홍일 소장, 고려대 현상은 총장, 문교사회 주기용 분과위원장의 추천서를 받았음. 1차로 필기시험을 보고 2차로 구두시험을 봤음.
  • 육사 8기를 합격하고, 제천 봉양고등국민학교와 능곡 지도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고모부 등과 상의하여 제천으로 결정함.
00:10:30 ~ 00:19:45 동영상 재생
3. 48년 전쟁 예감과 아버지의 평양 생활
  • 48년 10월경에는 일반 대중들도 전쟁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었음.
  • 구술자가 보기에 한국전쟁에서 남한이 초반에 패퇴한 것은 군 차원의 준비 부족과 군인 차원의 경험 부족의 차이에 기인한 것임.
  • 속성사범과 교육과목은 사범교육과 공산당 교양교육을 함께 배웠음.
  • 구술자가 월남한 48년의 경우 검문검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갯벌길을 통해서 왔고 안내비는 많이 줬을 것이라 생각됨.
  • 아버지는 국군이 북진한 평양에서 만나서 월남함. 아버지는 동평양에서 목재상을 하시면서 구술자 동생과 삐라를 만들어 뿌리고 다녔음.
  • 구술자는 소위로 임관하여 6사단으로 부임해가는 와중에 평양에 묵게 됨.
00:19:46 ~ 00:30:52 동영상 재생
4. 월남한 가족과 남겨진 가족
  • 동기와 함께 동평양 신삼리를 찾아 평양 시내를 돌아다님. 그러다가 한 집에서 아버지 친구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됨. 그편에 연락을 전함.
  • 당시 동생은 보안서에 끌려갔다가 탈출함.
  • 어머니, 나머지 동생들은 모두 북에 남음.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도 아니라서 브로커를 통해 중국에서 만나려고 시도를 해봤음. 브로커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그만두었음.
00:30:53 ~ 00:40:43 동영상 재생
2회차 면담 / 2014-06-03 / 02:39:41
1. 면담개요
조선어신철자법의 보급과 중단/봉양고등공민학교 부임과 열악한 교육 여건/전쟁 발발과 피난/입대와 중대 서무 임무/육군종합학교 3기 수료와 소위 임관/6사단 상황과 704고지 전투/998고지 전투/중공군과 전투 후 후퇴/용문산전투/용문산전투의 의의와 1사단 중심의 전사/1050고지 주둔과 보급 문제/중위 진급과 고지전/초등군사반 선발과 문화 충격/초등군사반의 구성과 효과/초등군사반의 생활
2. 주요색인어
조선어신철자법, 봉양고등공민학교, 제천, 피난, 전주, 낙동강 전투, 육군제2훈련소, 육군종합학교, 6사단, 덕천, 신평리, 동두천, 용문산전투, 양구FTC, 초등군사반, 제주도훈련소, 고지전,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조선어신철자법의 보급과 중단
  • 1947년 김두봉이 조선어신철자법을 만들었음. 구술자도 그 교육을 받았는데, 갑자기 보급이 중지됨. 김두봉의 정치적 영향력을 김일성이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풍문이 떠돌았음.
00:00:01 ~ 00:13:09 동영상 재생
2. 봉양고등공민학교 부임과 열악한 교육 여건
  • 48년 10월부터 제천 봉양고등공민학교에서 교사 생활 시작. 학교 월급을 지역에서 자체 조달했기 때문에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았고 학생들과 같이 일을 하기도 했음.
  • 제천은 학구열이 높았지만 마땅한 교원이 없었음.
  • 학생은 72명. 학생들은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었음.
  • 교육 내용에 이념적인 것은 없었고, 교과서 등 교육 여건이 열악하였음.
00:13:10 ~ 00:25:55 동영상 재생
3. 전쟁 발발과 피난
  • 장가를 간 학생 집에 가서 잔칫밥을 얻어 먹었음. 교사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였음.
  • 전쟁 소식은 7월 2일에서야 전해들었음. 청풍, 괴산, 보은의 경로로 피난을 감. 동료 여교사가 가족과 떨어지는 바람에 구술자가 전주까지 데려다주게 됨.
  • 전주에 갔다가 입대를 결정함.
00:25:56 ~ 00:36:55 동영상 재생
4. 입대와 중대 서무 임무
  • 7월 13일 신체검사를 받고 입대. 중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중대 서무계를 담당함.
  • 중대는 순천, 광양, 하동,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향함.
  • 부산 동래에 도착해서 상사의 지시로 250명 중 12명을 추린 명단을 작성. 다음날 12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는 낙동강 전선으로 향하고, 남은 12명은 육군제2훈련소의 기간병이 됨.
00:36:56 ~ 00:46:15 동영상 재생
5. 육군종합학교 3기 수료와 소위 임관
  • 일등병으로 진급. 그러다가 8월에 육군종합학교에서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음. 육군종합학교 3기로 6주 훈련을 받음.
  • 10월 28일, 소위 임관. 132명이 같이 임관되었고, 그 외로 일본에서 훈련받고 온 병사들도 있었음. 11월 5일, 6사단에 가서 전입신고를 함.
  • 훈련받을 때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듣고 조급한 마음을 가짐.
00:46:16 ~ 00:55:55 동영상 재생
2-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6사단 상황과 704고지 전투
  • 당시 6사단은 평북 운산 온정리에서 포위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음.
  • 한 번은 1대대 1중대 1소대장을 맡았는데 704고지를 점령하는 대대작전에 들어감. 전투 중 1소대를 3중대에 배속한다는 명령을 받아 고지로 향함.
  •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5만분의 일 지도를 대대마다 1장씩 보급되어 있었음.
00:00:01 ~ 00:10:31 동영상 재생
2. 998고지 전투
  • 998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기관총으로 5분 동안 준비사격을 해준다고 함.
  • 지도없이 걷다보니 중공군 진지 경계병이 있는 곳까지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의도하지 않게 기습공격을 해서 2명을 사살. 기관총을 전리품으로 빼앗음. 이후 중공군 경계초소로 진격하여 점령함.
00:10:32 ~ 00:20:44 동영상 재생
3. 중공군과 전투 후 후퇴
  • 고지에서 철수해 덕천으로 물러나 외투를 얻어 입음. 덕천을 떠나 신평리에서 중공군과 다른 부대가 전투가 붙었는데 철수 명령이 떨어짐. 대동강을 건너 덕천으로 철수를 하는데 병사들이 중공군 총에 맞아 죽고 대동강에 빠져 죽음. 순천을 거쳐 동두천까지 후퇴함.
00:20:45 ~ 00:32:00 동영상 재생
4. 중위 진급과 고지전
  • 중위로 진급함.
  • 하루는 고지 주둔 중 중공군이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쳐들어오니 경계분초의 분초병들이 후퇴하는데, 그들을 독려해 중공군을 섬멸.
  • 교함산에서는 중공군의 전투를 받아냄.
  • 장도영 장군을 따라 제주도 훈련소로 감.
00:13:26 ~ 00:19:46 동영상 재생
5. 초등군사반의 생활
  • 초등군사반 교육을 받을 때에는 군 월급외에도 하루 5달러씩 지급되었음. 이 돈을 아끼는 경우가 많았음.
  • 영어가 서툴러 아침식사 메뉴를 앞사람이 한 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음.
  • 53년 4월에 귀국하여 대위가 됨.
00:39:14 ~ 00:45:34 동영상 재생
6. 아버지의 연락과 포로수용소
  • 연대 본부 정보과 병사가 서울에 휴가를 나왔다가 구술자 아버지의 연락을 전해받아 구술자를 찾음.
  • 50년 12월 30일 중공군과 인민군이 총공격을 해서 후퇴를 하는데 조정호 중위는 그때 포로가 됨. 포로 경력으로 인해 진급이 늦어짐.
  • 김성옥 대위는 평양 포로수용소에 갇혔는데 옥수수 13알이 1끼 식사였고, 소금을 못 먹어 바깥일에 나가 주민에게 몰래 소금을 얻어 먹기도 했음.
  • 심리전 측면에서 북한보다는 나은 상황에 있었던 남한의 포로수용소는 차후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병사의 마음가짐을 다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
00:32:01 ~ 00:42:24 동영상 재생
7. 용문산전투
  • 철수하는 중 강촌에서 아군의 오인사격을 받기도 함.
  • 51년 4월 22일 중공군 제2차공세를 사창리에서 받아서 6사단이 참패함. 남은 병력과 자원을 끌어모아 용문산에서 필사의 각오를 함. 용문산에 배치된 부대는 기존의 선 방어를 하고, 구술자 부대는 전면방어를 시도함. 용문산 지구에서 적을 막고 있는 동안 강원도 현리에서 국군 방어가 뚫려서 중공군이 영월까지 내려옴. 그런데 오히려 깊숙이 내려온 중공군이 역포위가 되어 포위 섬멸. 큰 전과를 올림.
00:42:25 ~ 00:51:25 동영상 재생
8. 용문산전투의 의의와 1사단 중심의 전사
  • 야간전투시에는 동료 병사들이 도망갔을까 하는 공포심이 상당함. 그래서 소대장이 계속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소리를 지름.
  • 용문산전투는 기동전을 고지쟁탈전으로 바꾸는 기점이며, 공산측이 휴전협정을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음.
  • 한국전쟁 중 1사단의 전투가 부각된 것은 백선엽 대장의 구술에 기인한 것임. 반면 6사단의 장도영 사단장은 5.16이후 반혁명분자로 몰려 6사단의 활동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함.
00:51:26 ~ 00:58:12 동영상 재생
2-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050고지 주둔과 보급 문제
  • 용문산전투 이후 백암산 근처 1050고지에 진지를 구축함.
  • 포로를 잡고자 무리한 공격을 하고, 보급도 원활하지 않아 이질이 퍼짐. 그러던 중 연대장 처남이 부대에서 도넛 장사를 하는 걸 발견하고 쫓아냄.
  • 하루는 야전병원에 가서 용문산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에게 훈장을 줌.
  • 대대장 지시로 중대 취사 감독을 맡음. 연대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호말 중 병든 말을 요리하여 보급함.
00:00:01 ~ 00:13:25 동영상 재생
2. 초등군사반 선발과 문화 충격
  • 현리 전투 패배 이후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전투 경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구에 야전훈련소를 설치하고 초등군사반을 모집함.
  • 1952년 가을, 미국에 도착함.
  • 출발 전 150명의 초등군사반 선발장교들이 자치회를 열어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가기로 함. 그런데 미국에서 두루마리는 화장실에서만 사용함으로 인해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함.
  • 자동판매기, 교회 예배, 훈련교관의 태도 등이 문화 충격이었음.
  • 흑백차별 문제, 남북전쟁 이후에도 남아있는 남북 갈등 문제도 실감하였음.
00:19:47 ~ 00:30:28 동영상 재생
3. 초등군사반의 구성과 효과
  • 초등군사반 3차는 반 정도가 육군종합학교 출신이었음. 당시 초급장교 중 육군종합학교 출신과 현지임관 비중이 월등히 높았음.
  • 미국의 초등군사반은 실전을 거친 장교들이 교육을 받는 거라서 교육효과가 좋았고, 미국의 교수법 또한 훌륭했음.
  • 초등군사반의 경험은 한국군 발전에도 영향이 있었고 문화 충격을 받은 군인이 5.16군사혁명을 하는 데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됨.
00:30:29 ~ 00:39:13 동영상 재생
3회차 면담 / 2014-06-09 / 02:46:17
1. 면담개요
한국전쟁기 성군기 문란/이형석 장군에 대한 기억/김홍일 장군에 대한 기억/한국전쟁기의 기억/한국전쟁 휴전 전후/어려웠던 생활/이강석 소위 진급문제/장군 진급 적체문제/포병대장 시절 부정부패 목격/정규군인신분개정안 연구위원회/국가재건 최고회의 근무
2. 주요색인어
성군기 문란, 부정부패, 장군진급, 숙군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3-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한국전쟁기 성군기 문란(1)
  • 한국전쟁 당시 결혼을 한 사병들이 성문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음.
  • 구술자는 그런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음.
  • 피난민들에게 돈을 쥐어준 기억.
00:00:01 ~ 00:12:24 동영상 재생
2. 한국전쟁기 성군기 문란(2)
  • 사병들이 구술자의 천막에 여성을 밀어 넣은 적도 있음. 소식이 끊긴 오빠를 찾아다니는 여성이었음.
  • 향도는 부대에서 뒤처지는 사람이 없는가 확인하는 사람. 현재 하사 정도의 계급이 했음. 당시에는 일등중사.
  • 성문제 사고를 막기 위해 마을이장에게 여성들을 모아놓고 지켜줄 것을 당부.
00:12:25 ~ 00:25:21 동영상 재생
3. 이형석 장군에 대한 기억
  • 전사감 이형석 장군에 대한 기억. 월간으로 출판한 『전사』를 통해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냉혹하게 비판했던 내용.
00:25:22 ~ 00:36:23 동영상 재생
4. 김홍일, 이형석 장군에 대한 기억
  • 월남에서 국회의원 방문 당시 김홍일 장군을 안내한 기억. 김홍일 장군에게 들은 이야기.
  • 이형석 장군에 대한 기억.
00:36:24 ~ 00:46:41 동영상 재생
5. 한국전쟁기의 기억(1)
  • 구술자는 56년에 전역을 하려고 했으나 못했음. 미국유학을 갔다 왔기 때문.
  • 원래 군인하려는 생각은 없었음. 전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입대했고, 학력이 있기 때문에 육군종합학교 시험을 보게 된 것.
  • 교함산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야기. 인민군이었던 소년을 심부름꾼으로 이용한 이야기.
00:46:42 ~ 00:57:19 동영상 재생
3-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한국전쟁기의 기억(2)
  • 월남전 당시 태국에서 휴양을 하곤 했음. 미군의 휴양지가 있고, 한국군도 이용하게 한 것.
  • 교함산 전투 이후 사단에서 작전참모를 했음. 이후 52년 1월에는 제주도의 훈련소로 발령이 났음. 약 5개월 간 인사처에서 근무하고, 이후 미국 군사유학.
00:00:01 ~ 00:12:27 동영상 재생
2. 한국전쟁 휴전 전후
  • 군사유학 시절 기독교로 개종. 미국보병학교 내에 한국장교교회가 있었음.
  • 53년 4월에 한국에 돌아왔고, 논산훈련소 발령. 작전처 교육과 근무. 5월 5일 결혼.
  • 이후 25사단, 제1야전군 사령부, 육군본부 인사국 보임과로 옮겼음. 짧은 시간 동안 여기저기서 구술자를 데려가려고 해서, 금방금방 이동.
00:12:28 ~ 00:24:36 동영상 재생
3. 어려웠던 생활(1)
  • 육군본부 발령이 나면서, 서울에서 생활한 이야기. 적은 월급 때문에 방을 얻기 어려웠음.
  • 학교 선배들이 사단장 등을 하고 있으면 찾아가서 쌀과 돈을 얻어서 생활에 보탰음.
  •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 보임과 동료들은 뇌물이 잘 들어왔음.
  • 전방부대는 소위 후생사업을 많이 했음. 군용트럭을 민간에 대여해주는 등. 김용우 국방부장관이 이를 많이 근절시켰음. 대신 월급을 대폭 올려주었음.
00:24:37 ~ 00:35:00 동영상 재생
4. 어려웠던 생활(2)
  • 군 복무중 건국대에서 야간대학을 다녔음.
  • 힘들게 라디오 구입한 일화
  • 월급이 적어서 아끼면서 생활.
00:35:01 ~ 00:43:33 동영상 재생
5. 장군진급문제, 포병대장 시절 부정부패 목격(1)
  • 파머 대장 인터뷰 사건과 김종필 등의 항명파동. 여러 가지 혼란이 생겼음.
  • 구술자는 이후 포병대대장 발령. 각종 부정부패를 목격했음. 장교와 사병들이 도박을 즐기고, 의무대에서 의약품 횡령. 취사장에서 소고기 횡령.
00:10:54 ~ 00:25:10 동영상 재생
6. 국가재건 최고회의 근무
  • 군 인사법 통과 후 구술자는 육군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음. 그러나 최고회의 길재호 의원이 같이 일하자고 하여, 거절하지 못하고 최고회의에서 근무. 법제사 법 평가위원회, 감찰위원회 담당관.
00:47:58 ~ 00:51:13 동영상 재생
7. 이강석 소위 진급문제
  •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포병고등군사반에서 공부. 전후 미군 측이 포를 많이 넘겨줬기 때문에, 포병으로 많이 전과했음.
  • 고등군사반 이후 다시 육군본부 보임과 근무. 장군 진급 관련 업무를 맡았음.
  • 3.15 부정선거 이후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 소위를 중위로 일찍 진급시키는 문제.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문제였음. 시간을 끌다가, 결국은 4.19가 터지면서 없던 일이 되었음.
00:43:34 ~ 00:57:45 동영상 재생
3-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장군 진급 적체문제
  • 3.15 부정선거 전에 송요찬 당시 참모총장의 지시로 주요직위 보직기준을 만들었음. 연대장, 사단장 등의 보직을 맡으려면 충족해야 하는 기준. 보직 청탁을 막기 위해서였음.
  • 주요직위 보직기준에서 사단장(대대장 6개월 이상)이 부사단장(연대장 2년 이상)보다 기준이 낮았음. 기존의 장성들이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
  • 4.19 이후 구술자는 보안대장 발령이 났으나 거부. 포병부대장으로 나갔으나, 장군 진급 적체문제 때문에 곧 육군본부로 다시 파견이 되었음. 구술자가 기존에 장군 진급업무를 했었기 때문.
  • 육군본부 전체회의에서 장군 진급문제를 안건으로 했는데, 계속 싸움이 있었음. 병과별로 자신 쪽에 장군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 박정희가 회의에서 숙군을 주장.
00:00:01 ~ 00:10:53 동영상 재생
2. 포병대장 시절 부정부패 목격(2)
  • 취사장에서 식용유 횡령하는 것도 목격. 콩나물국을 만들 때 콩나물을 볶지 않고, 끓인 후 식용유를 약간만 투입. 나머지 식용유는 횡령.
  • 장교들은 부대 쌀을 가져다가 먹었음.
  • 4.19 이후에는 소위 기자단이라는 사람들이 와서 술이나 도박 등을 같이 즐기려고 했음. 진짜 기자인지도 알 수 없었음.
  • 이후 구술자는 911포병대대에 대대장으로 발령. 이곳에서도 부정부패를 목격. 주말이 되면 사병들을 외출, 외박을 내보내고, 남는 쌀들은 대대장이 횡령하는 것이 관례였음.
00:25:11 ~ 00:36:34 동영상 재생
3. 정규군인신분개정안 연구위원회
  • 911포병대대에서 한 달만에 다시 국방부 발령. 4.19 이후에 정규군인신분개정안 연구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군 인사제도 변경을 연구하는 기구. 그곳에 구술자도 배치되었음. 이때 계급정년을 만드는 문제 때문에 많은 군인들이 반발했음. 민기식 대장도 반대.
  • 미군 측도 반대했으나, 박병권 장군이 멜로이 미 8군사령관을 설득했음.
00:36:35 ~ 00:47:57 동영상 재생
4회차 면담 / 2013-06-17 / 02:51:29
1. 면담개요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회 담당관/군인사법 작성/육군대학 졸업/26사단 작전참모/육군참모총장 비서실 근무/인사참모부 근무/6군단 작전참모./1.21사태/28사단 포병사령관
2. 주요색인어
1.21사태, 육군대학, 군인사법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4-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회 담당관
  • 1963년 육군대학에 가기로 모든 수속을 다 해놓은 상태에서 길재호 위원의 호출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불려감
  • 길재호 위원과는 개인적 교분은 없었지만 안면은 있던 상태
  • 감찰위원회 담당관을 하게 됨
00:00:01 ~ 00:10:04 동영상 재생
2. 감찰위원회 담당관으로서 겪은 경험(1)
  • 대한항공에서 미국에서 비행기를 사오는 조건으로 미국 에이전트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됨
  •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에이전트들을 불러 자유당 시절의 리베이트 수령 상황을 조사했으나 실패
  • 신년도 예산에서 심계원에 난방비가 중복 편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
  • 서울 고등법원 국정감사도 시행
00:10:05 ~ 00:21:50 동영상 재생
3. 감찰위원회 담당관으로서 겪은 경험(2)
  • 서울지방법원 소년부 지원에 감사를 나갔을 때 권순영 판사로부터 지프차가 한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음
  • 불광동 소년원에 갔을 때도 그동안 식량을 과잉 수령했다는 사실을 발견
  • 민정이양시 감사원법의 초안을 작성
  • 민정이양시 감사원 기획실장으로 지명을 받음
00:21:51 ~ 00:33:12 동영상 재생
4. 군인사법 작성
  • 감사원 기획실장으로 지명을 받았으나 육군대학에 가겠다고 거절
  • 길재호 최고위원은 구술자가 더 높은 자리를 욕심냈다고 오해함
  • 육군대학에 가기 전 몇달간 군인사법 작성하는 작업을 하게 됨
00:33:13 ~ 00:41:42 동영상 재생
5. 육군대학 졸업, 26사단 작전참모(1)
  • 1963년 9월에 육군대학에 입학해서 10개월짜리 정규과정을 수료
  • 육군대학에서 군인사법과 계급정년에 대해 논문을 써서 A를 받음
  • 개인적으로는 적은 월급으로 동생을 대학에 보내느라고 어려운 생활을 지속함
  • 육군대학에서 3등으로 졸업한 후 현석주 장군이 있는 26사단 작전참모로 발령받음
  • 당시 군의 군수참모는 영농과 양돈을 통해 부대의 식량을 보충했는데 키운 돼지들을 밑에서 자꾸 팔아먹는 일이 발생했으나 위에서 손을 쓰지 못함
00:41:43 ~ 00:51:39 동영상 재생
6. 26사단 작전참모(2)
  • 군에서 김장용 배추나 무를 키워놓으면 자꾸 위에서 가져가버리는 일이 발생
  • 사단장인 현석주 장군의 원칙을 지키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움
00:51:40 ~ 00:59:04 동영상 재생
4-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한신 장군과의 인연
  • 당시 한신 장군이 군단장이었는데 사병들의 범죄나 잘못은 장교들의 책임이기 때문에 사병들에게는 가급적 군에서 처벌을 하지 않는게 좋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음
  • 예편한 이후에 대한중석에서 상무이사로 있으면 한신 장군을 사장으로 모셨을 때 직원들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겪었던 에피소드
  • 26사단 작전참모 도중 사단장으로 문중섭 장군이 오고, 두달 후 육군참모총장 비서실로 오라는 발령을 받음
00:00:01 ~ 00:10:47 동영상 재생
2. 하나회
  • 1960년대 중반 당시 하나회가 태동하고 있었다고 느낌
  • 이후 유학성 장군이 베트남에 군수사령관으로 가기로 되어 참모장으로 가기로 약속을 해놓음
  • 그런데 1965
  • 66년 경 유학성 장군이 미국 텍사스의 방공포병학교로 가라고 해서 다녀오니 참모장에 다른 사람이 내정되어 있었음
00:20:38 ~ 00:30:45 동영상 재생
3. 6군단 작전참모
  • 이후 6군단 작전참모로 가게 됨
  • 이세호 장군이 6군단장으로 발령받은 이후 이임원 사단장이 참모장으로 구술자를 달라고 이세호 장군에게 요청. 그러나 이세호와 논의 끝에 6군단에 남기로 함
  • 1966년 2월 대령 진급
  • 1968년 1월 15일∼19일에 지휘소 훈련을 하던 도중 1.21사태가 터짐
  • 미1군단 후방지역 작전을 하도록 승인받음
00:30:46 ~ 00:41:27 동영상 재생
4. 1.21사태 초기
  • 송추국민학교에서 작전사령부를 차림
  •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의 친척인 손주완 기자가 작전사령부로 찾아와서 정보를 달라고 했으나 참아달라고 부탁
  • 군견대에서 개를 보내서 먼저 군견으로 앵무봉 일대를 수색
00:41:28 ~ 00:51:47 동영상 재생
5. 육군참모총장 비서실 근무, 인사참모부 근무
  • 참모총장 비서실에서 의전관계, 비서 행정관계로 많은 것을 배움
  • 대만에서 육군총사령이 방문했을 때 문희석 장군과 인연을 맺음
  • 이후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을 하던 유학성 장군과의 인연으로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으로 가게 됨
  • 인사참모부에서 육군사관학교, ROTC, 간부후보생의 군번을 다르게 하는 제도를 연구하기도 함
00:10:48 ~ 00:20:37 동영상 재생
6. 1.21사태 수색 과정(1)
  • 1월 21일 밤 작전사령부에서 이세호 군단장이 26사단장에게 경례를 하며 김신조 무리를 잡아달라고 했던 기억
  • 미1군단에서 헬리콥터를 빌려서 북한산 비봉일대를 수색했으나 흔적을 찾지 못함
00:51:48 ~ 00:59:12 동영상 재생
4-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21사태 수색 과정(2)
  • 야밤에 후방에 배치된 1사단의 상황이 궁금해서 미1군단에게 헬리콥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함
  • 육군단 항공참모 백승욱 중령에게 경비행기를 띄워달라고 요청함
  • 1사단이 도로가 난 그대로 불을 피우고 있는 것을 목격
  • 미1군단 작전참모 볼티스 대령과의 인연으로 도움을 많이 받음
00:00:01 ~ 00:12:40 동영상 재생
2. 1.21사태 수습(1)
  • 작전사령부가 있는 송추국민학교에 모녀가 간첩 잡느라 수고한다고 팥죽을 쑤어옴
  • 김신조 무리를 잡은 이후 군이 고철주이들을 잡아놓고 간첩을 잡았다고 발표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국회 진상조사단이 왔으나 무안을 당함
  • 볼티스 대령이 미1군단 장교 구락부로 불러서 수고했다고 술을 사줌
00:12:41 ~ 00:25:06 동영상 재생
3. 1.21사태 수습(2)
  • 김신조 무리가 미2사단 철책과 한국군 목책 중 무엇을 뚫고 들어왔는가에 대해서 신경전이 있었음
  • 나중에 김신조를 통해 미2사단 철책을 뚫고 들어왔다는 사실이 밝혀짐
  • 1.21 작전기간 중 민간인들의 신고가 도움이 많이 됨
  • 1월 28일 작전종료
00:25:07 ~ 00:37:12 동영상 재생
4. 28사단 포병사령관(1)
  • 이후 28사단 포병사령으로 나가게 됨
  • 포병부대의 무전기, 자동차, 155mm포의 성능이 좋지 않았음
  • 1968년도 10월달에 전방 82연대 사병들과 북한군이 충돌
00:37:13 ~ 00:49:11 동영상 재생
5. 28사단 포병사령관(2)
  • 휴전선에서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인 일로 미1군단 야보로 중장이 와서 현장을 조사했으나 유감만 표시하고 떠남
  •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음
00:49:12 ~ 00:53:12 동영상 재생
5회차 면담 / 2014-06-24 / 01:56:41
1. 면담개요
베트남 파병과 주월한국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시절/정보참모 시절의 활동/정보참모 시절 미월 월경작전에 대한 정보 수집(1)/정보참모 시절 미월 월경작전에 대한 정보 수집(2)/구정공세, 닉슨독트린 전후 베트남 전쟁의 변화/작전참모시절/작전참모 및 기획참모부장시절/주월한국군사령부의 편제와 기획참모의 역할/철군준비/전투능력평가단장/베트남에서의 대민작전/귀국과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북한과장 임명/베트남전쟁 당시의 월급체계/베트남에서의 일상생활/한국군의 파병 사전 교육, 한국 귀빈들의 베트남 방문/베트남전 당시 군인들의 식생활, 베트남의 종교문제/합참 정보국 북한과장 시절(1)/합참 정보국 북한과장 시절(2)
2. 주요색인어
베트남전쟁, 닉슨독트린, 주월한국군사령부, 합동참모본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5-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베트남 파병과 주월한국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시절
  • 구술자는 1969년 4월 베트남으로 파병 명령을 받음.
  • 주월사령관인 이세호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음.
  • 특별보좌관의 역할은 현장에서 사령관을 보좌하는 것으로 관사에서 활동하는 비서실장의 역할과 구분되었음.
  • 특별보좌관제는 채명신이 주월사령관일 당시부터 존재.
00:00:01 ~ 00:09:47 동영상 재생
2. 정보참모 시절의 활동
  • 1970년 정보참모로 임명.
  • 당시 미군과 월남군이 합동으로 캄보디아의 월맹군후방기지를 공격하는 작전(미월월경작전)을 진행.
  • 본국과 주월한국대사관으로부터 관련된 정보를 보고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미군과 월남군으로부터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음.
  • 구술자는 정보를 구하기 위해 작전지역으로 이동.
00:09:48 ~ 00:19:23 동영상 재생
3. 정보참모 시절 미월 월경작전에 대한 정보 수집(1)
  • 미월 월경작전이 진행 중인 스바이리엥(앵무새 부리)에서 작전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베트남
  • 캄보디아 국경부근을 시찰했음.
  • 시찰을 하면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미월 월경작전에 한국군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지양하고, 부분적으로 기여하는 방향으로 참가해야한다는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
00:19:24 ~ 00:29:17 동영상 재생
4. 정보참모 시절 미월 월경작전에 대한 정보 수집(2)
  • 당시 캄보디아의 지도자는 시아누크로 중립외교를 펼쳤고, 월맹에게 월남공격을 위한 후방기지를 제공했음.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상황이 반전.
  • 한국군이 미월 월경작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미국이 이 작전에 관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었음.
  • 미월 월경작전은 공식적으론 월남군만 참여한 것으로 보도되었음.
00:29:18 ~ 00:39:25 동영상 재생
5. 구정공세, 닉슨독트린 전후 베트남 전쟁의 변화
  • 구술자는 베트남에 있으면서 본국으로 보내는 월남의 상황보고서를 작성했음. 보고서는 이세호의 명의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보형식으로 제출됨.
  • 구술자는 주월사령관이었던 채명신과 이세호가 성격 등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다고 평가함.
  • 구정공세 및 닉슨독트린 발표 이후 참전한 여러 나라의 군내부에선 철수하는 분위기가 우세했음.
  • 한국군은 경제적 측면에서 철수를 지연시키는 동시에 인명피해는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음.
00:39:26 ~ 00:50:27 동영상 재생
6. 작전참모시절
  • 전임 주월사령관인 채명신이 추진한 중대기지전술은 이세호로 사령관이 바뀐 뒤에도 지속.
  • 이세호는 군수 지원이 잘 되는 베트남에서 소부대 전투훈련을 많이 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전투 지시를 내림.
  • 구술자는 베트남 전쟁이 정규군 간의 전쟁이 아니고, 미국의 막대한 물량지원이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라고 판단. 참전한 한국군 지휘관들이 베트남전의 양상을 일반적인 전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음.
00:50:28 ~ 01:01:01 동영상 재생
7. 전투능력평가단장
  • 구술자는 기획참모부장에서 해임된 후 전투능력평가단의 단장이 되었음.
  • 전투능력평가단의 월남의 모든 한국군부대를 중대기지 단위로 감사, 시찰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음.
  • 업무를 통해 일선 부대의 전과 경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음
00:30:01 ~ 00:40:23 동영상 재생
8. 베트남에서의 대민작전과 철군준비
  • 채명신 주월사사령관이 시작한 대민작전은 이세호 사령관대에서도 계속 이어짐.
  • 부대 단위에서는 고아원, 학교 지원, 피난민에 대한 식량지원, 의료지원을 행함.
  • 73년 3월 철수를 앞두고, 주월군 8년사를 정리하는 문서를 작성했음.
00:40:24 ~ 00:47:43 동영상 재생
9. 귀국과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북한과장 임명
  • 귀국 후 206보충부대 무보직 장교로 지냈고, 그동안 월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존법 관련 책을 출판.
  •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국장으로 있던 한무협 장군으로부터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북한과장 자리를 제안 받음.
00:47:44 ~ 00:58:07 동영상 재생
5-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작전참모 및 기획참모부장시절
  • 구술자가 작전참모 및 기획참모부장을 하던 1970∼1971년, 미국 측에서 한국군이 월남에서 작전을 계속하길 바랐음.
  • 미국은 미군이 철수하는 작전지역을 한국군이 인계받아 작전을 수행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음.
  • 미군의 장비까지 인계해달라는 한국군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작전지역도 인계되지 않음.
  • 그 이후에도 월남군과 미군 참모들이 지속적으로 한국군의 작전지역을 확대하라는 요청을 해왔으나 한국군은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요청에 응하지 않음.
00:00:01 ~ 00:10:38 동영상 재생
2. 주월한국군사령부의 편제와 기획참모의 역할
  • 기획참모(J
  • 6)는 제6참모부장으로 인사, 정보 등 일반 참모와 동급으로 편제되어 있으나, 실제 업무 및 위상은 참모장과 일반참모 중간으로 볼 수 있음.
  • 주월사령부내의 군사정보부대가 따로 있어 포로 심문 및 적 문서 번역등의 업무를 담당.
  • 구술자는 당시 베트남전의 전황을 월남에게 유리하다고 인식했고, 낙관적 분위기는 사령관 등 고위급 관리들사이에서 공유되었음. 판단의 근거는 북폭, 장기건의 전쟁으로 인해 베트콩, 월맹 정규군의 전력 또한
00:10:39 ~ 00:20:11 동영상 재생
3. 철군준비
  • 1972년 구술자는 기획참모부장으로 임명. 이를 전후해 한국군의 철군을 준비하는 작업에 착수.
  • 구술자는 비밀리에 한국에 입국하여 합동참모본부의 요인들과 철군에 대해서 협의했음. 월남군 및 미군과도 협조해가며 한국군철수계획을 세웠음.
  • 베트남에서 귀국하는 장병들이 탄피를 가져와 한국에서 되파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이로 인해 미국과 어느 정도 마찰도 발생.
00:20:12 ~ 00:30:00 동영상 재생
5-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베트남전쟁 당시의 월급체계
  •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장성들에겐,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1년치 봉급이 선불로 주어졌음. 이와 별개로 월남에서 한달에 200불을 받음.
  • 200불은 정기적금통장에 입금해서 한국으로 송금했음.
  • 장성급의 경우 가전제품을 1년에 1개정도 구입할 수 있었음
  • 월남에서 가전제품 구입비용이 한국에서의 비용보다 저렴하여, 구입을 위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음.
00:00:01 ~ 00:11:08 동영상 재생
2. 베트남에서의 일상생활
  • 미군 장교들은 사이공에서 여러 호텔을 전세내서 숙소로 사용했는데, 그중 한 호텔이 한국군 장교들에게 배정되었음.
  • 주월한국군사령관은 개인주택을 빌려 공관의 개념으로 사용했음.
  • 사이공 시내에서도 폭발물이 터지는 등 위험했음.
00:11:09 ~ 00:19:33 동영상 재생
3. 한국군의 파병 사전 교육, 한국 귀빈들의 베트남 방문
  • 베트남 파병 전, 파병 명령을 받은 군인들에게 베트남의 역사 등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은 없었음.
  • 사병들에겐 주로 참전의 명분을 알리는 교육이 진행됨. 명분의 하나는 한국전쟁기 미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한 보은 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미노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음.
  • 연예인은 물론 대법원관, 기자 등 한국으로 부터 방문객이 많았음.
00:19:34 ~ 00:28:39 동영상 재생
4. 베트남전 당시 군인들의 식생활, 베트남의 종교문제
  • 기존의 미국형 레이션이 입에 맞지 않는 장병들이 많아서 한국형 레이션을 개발했음.
  • 그런데 말단 부대에서는 중간횡령 등으로 부식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음.
  • 베트남에는 불교신도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천주교로 개신교도는 별로 없었음.
00:28:40 ~ 00:40:46 동영상 재생
5. 합참 정보국 북한과장 시절(1)
  • 1973년 합참 정보국 북한과장으로 발령을 받음.
  • 기존의 북한과에서는 북한의 침투를 비롯한 많은 문제들을 관리했으나, 체계가 잡혀있지는 않았음.
  • 구술자는 북한과장으로 발령받은 이후 북한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보고방식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시행.
00:40:47 ~ 00:48:35 동영상 재생
6. 합참 정보국 북한과장 시절(2)
  • 구술자는 합참 본부장의 지시로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과 관련된 발표를 준비. 당시 소련에 관한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무척어려워서 발표 준비에 애를 먹었음.
  • 발표가 합참 관계자는 물론 국방부 장관 등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것이 진급의 계기가 되었음.
00:48:36 ~ 00:56:43 동영상 재생
6회차 면담 / 2014-07-01 / 03:04:57
1. 면담개요
베트남전쟁에 대한 추가적인 기억(1)/베트남전쟁에 대한 추가적인 기억(2)/북한과장 역임과 준장 승진/6군단 포병사령관(1)/6군단 포병사령관(2)/육군본부 부대훈련처장/한국군 장비 현대화사업/사단장 근무(1)/사단장 근무(2)/사단장 근무(3)/사단장 재직 시 기억(1)/사단장 재직 시 기억(2)/사단장 재직 시 기억(3)/사단장 재직 시 기억(4)/12·12 전후의 기억
2. 주요색인어
칠사(7·4)공동성명, 하나회, 엔엘엘(NLL), 육(6)군단, 베트남전쟁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6-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베트남전쟁에 대한 추가적인 기억(1)
  • 베트남전 수행 중 7·4공동성명 소식을 듣게 됨. 정부 차원의 논의와 별개로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노력.
  • 콜린스 여사의 알선으로 다수 한국 장교들이 미국 유학을 감.
00:00:01 ~ 00:11:31 동영상 재생
2. 베트남전쟁에 대한 추가적인 기억(2)
  • 당시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3선 성공 후 1년여 만에 유신체제로 이행함. 이 문제 역시 북한에서 주석제도로 이행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으로 유신의 당위성을 이해함.
  • 베트남 주월사 작전참모 근무 중 전두환이 연대장으로 베트남에 왔던 적도 있음.
00:11:32 ~ 00:24:01 동영상 재생
3. 북한과장 역임과 준장 승진
  • 1973년 베트남에서 귀국 후 북한과장을 역임. 당시 4차 중동전이 일어나면서 안보 불안감 고조. 북한 선박의 NLL 월경 사건도 빈발.
  • 정보교류회의 참석 중 준장 승진.
00:24:02 ~ 00:36:28 동영상 재생
4. 6군단 포병사령관(1)
  • 6군단 포병사령관으로 재임 시 전통적 훈련을 탈피해 실전적 전술훈련을 시도함.
  • 1974년 월남이 패망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세호 참모총장에게 장군들의 정신교육을 건의함.
  •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부대 내 혜광중학교를 건립해 운영.
00:36:29 ~ 00:48:12 동영상 재생
5. 6군단 포병사령관(2)
  • 일종의 야학인 혜광중 운영을 통해 많은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그 중에 대학까지 진학해 구술자와 인연을 이어갔던 사례도 있었음.
  • 학력이 부족했던 방위병들의 식사 등 대우를 위해 노력.
  • 1975년 육군본부 기갑처장 및 부대훈련처장 등 역임.
00:48:13 ~ 01:02:57 동영상 재생
6-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육군본부 부대훈련처장
  •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부대훈련처장으로 근무하면서 부대훈련체제 및 지휘검열체제 개혁을 추진.
  • 이세호 참모총장과 교육참모부장 강영식 장군에게 훈련체제 개편에 대한 소신을 피력. 이세호 장군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거침없이 의견 개진. 이세호 장군은 각 군에 대한 순회교육 실시.
00:00:01 ~ 00:12:07 동영상 재생
2. 한국군 장비 현대화사업
  • 1975∼6년경 정부가 자주국방을 주장하면서 군 차원에서 한국군 장비 현대화계획을 추진. 미국이 최신기술은 판매하려 하지 않아 스위스 등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음.
  • 1978년 1월 사단장으로 발령.
00:12:08 ~ 00:24:36 동영상 재생
3. 사단장 근무(1)
  • 전역 후 오산고등학교 교장 재직 시 1987년, 예비역 장군들과 미국을 시찰할 기회가 있었음. 백선엽, 장우주 장군 등과 동행. 첨단 무기를 시찰했으나 천문학적인 가격 때문에 구입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음.
  • 1978년 1월 사단장으로 발령 받아 김광돈 장군에게 업무 인계를 받음.
00:24:37 ~ 00:35:55 동영상 재생
4. 사단장 근무(2)
  • 홍천 11사단 사단장으로 발령 받아 영관급 장교 시절부터 형님처럼 생각하던 김광돈 장군의 후임으로 근무.
  • 부임 직후 상급자 살해 사건 발생.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휘관들의 도의적 책임 이상은 묻지 않았음.
00:35:56 ~ 00:48:06 동영상 재생
5. 사단장 근무(3)
  • 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일화를 소개. 그 중 예하 사병들에게 특히 행군을 철저히 시켰음.
  • 예하 사병 및 장교들을 대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소개.
00:48:07 ~ 01:01:01 동영상 재생
6-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사단장 재직 시 기억(1)
  • 홍천 11사단 재직 시 기억을 소개. 중대 단위 합창을 시키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사병들과 상담.
  • 사병들 급식을 잘 먹이기 위해 사단 병참부 식재료 검수과정을 직접 확인하고, 납품과정에 내재한 이권 개입 소지를 잘라냄.
00:00:01 ~ 00:12:07 동영상 재생
2. 사단장 재직 시 기억(2)
  • 사단장으로서 지휘방침 등 신념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 야간행군 시 사병들을 직접 격려.
  • 석박사 장교 후보생들의 도피 및 탈출 훈련을 직접 격려해줌.
  • 지휘관들 중에서 중대장이 정말 중요한 보직임.
00:12:08 ~ 00:24:33 동영상 재생
3. 사단장 재직 시 기억(3)
  • 1979년 10·26 직후 부대에서 사병이 선임병을 사살하고 도망가는 사건 발생. 수습하느라 사단장 말기에 고초를 겪음.
  • 전군 작전훈련관계 요원들에게 부대훈련 시범을 보임.
  • 1979년 3월 팀스피릿 훈련을 준비.
00:24:34 ~ 00:36:51 동영상 재생
4. 사단장 재직 시 기억(4)
  • 팀스피릿 훈련 준비 시 작전통임에도 불구하고 도로 및 장비 기동, 군수 문제에 주안점을 둠.
  • 홍천은 자유당 시절 이재학 지역구였기에 대민관계가 매우 중요하고 여론의 영향력이 컸음. 대민사업의 일환으로 묘지 소공원화 운동이라는 걸 함.
00:36:52 ~ 00:47:39 동영상 재생
5. 12·12 전후의 기억
  • 건군 30주년 행사 때 육군본부로부터 받은 예산을 갖고 홍천군 상이용사들을 초청. 이러한 일련의 업무를 통해 대민관계가 상당히 좋아짐.
  • 1979년 12·12 당일 김학원 군사령관으로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양동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화를 받음. 직후 사단 전 참모 및 직할대장을 집합시킴.
00:47:40 ~ 01:00:59 동영상 재생
7회차 면담 / 2014-07-08 / 02:44:17
1. 면담개요
12·12 사태에 대한 회고/5·18 당시의 상황/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재직(1)/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재직(2)/3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5·18에 대한 보충적 회고와 평가/10·26을 둘러싼 인물들 및 하나회 세력에 대한 회고와 평가/신군부 세력에 대한 회고(1)/신군부 세력에 대한 회고(2)/전두환 정권 시절에 대한 평가/포병학교 교장 시절 훈장을 양보한 일화/포병학교 교장 및 3사관학교 교장 시절의 일화/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는 과정/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1)/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2)/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3)/인생 전반에 대한 회고
2. 주요색인어
10·26, 12·12사태, 5·18, 11사단, 포병학교, 3사관학교, 오산학교, 고등군법회의, 대한중석, 신군부, 하나회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7-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2·12 사태에 대한 회고
  • 구술자가 11사단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12·12 사태가 발생.
  • 79년 12월 12일 저역 무렵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고, 군사령관 김학원으로부터 양덕원 쪽을 잘 막으라는 지시를 받음.
  • 신군부의 유학성이 구술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별도로 지시하기 전 까지는 움직이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함.
  • 사태가 정리된 후 구술자는 전두환 휘하의 군종 신부를 만나 자신의 견해를 전달함.
00:00:01 ~ 00:11:10 동영상 재생
2. 5·18 당시의 상황
  • 구술자는 1980년 1월 광주에 위치한 포병학교 교장으로 부임.
  • 5·18이 벌어지자 공수 부대가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함.
  • 진압군의 잔혹한 행태를 보며 구술자는 12·12 사태 직후 보안사령부가 제작한 소식지에 실린 <부마사태의 교훈>이라는 글을 떠올림.
00:11:11 ~ 00:19:09 동영상 재생
3. 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재직 (1)
  • 5·18이 진압된 후 구술자는 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임명됨.
  •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구술자에게 재판을 빠르게 끝낼 것을 종용함.
  • 구술자는 고민 끝에 피고인들의 발언을 중지시키지 않고 그냥 두는 방향으로 재판을 진행하기로 결정.
  • 재판 현장을 참관하던 보안대장(대령)은 구술자의 재판 진행 방식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냄.
00:19:10 ~ 00:29:58 동영상 재생
4. 고등군법회의 재판장으로 재직(2)
  • 구술자는 자신의 재판 진행 방식 때문에 신군부가 곧 자신을 물러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함.
  • 피고인 중 김성용 신부는 구술자에게 직접 욕을 퍼붓기도 함.
  • 피고인의 가족들은 재판정에서 거세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임.
  • 구술자는 포병학교 교장을 마치고 3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
00:29:59 ~ 00:39:03 동영상 재생
5. 3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
  • 당시 3사관학교는 고등학교 졸업자들을 데려다가 2년간 교육 후 소위로 임관시키는 기관으로서, 구술자는 2년제 3사관학교의 마지막 교장이었음.
  • 구술자가 훈련생들이 돌아오는 길에 직접 마중을 나가 격려하는 일이 종종 있었음.
  • 군인사법 개정으로 소장의 재임 기간이 단축되면서 구술자도 83년 2월에 전역.
00:39:04 ~ 00:44:53 동영상 재생
6. 5·18에 대한 보충적 회고와 평가
  • 공수부대의 본격적 진압이 시작되기 전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돌자 구술자는 구류자들로 하여금 집에다 편지를 쓰게 해서 생사를 확인하게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날 밤에 진압이 개시됨.
  • 북한 특수부대 요원 등 외부의 힘이 5·18에 개입했다는 단서를 구술자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음.
  • 시위대의 힘이 거세지자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발포 권한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았음.
00:44:54 ~ 00:55:18 동영상 재생
7-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0·26을 둘러싼 인물들 및 하나회 세력에 대한 회고와 평가
  • 구술자는 10·26을 김재규의 독단적인,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이해.
  • 차지철의 행동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었으나, 김재규에 대해서는 여론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음.
  • 전두환, 노태우 등이 지나치게 빨리 진급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군 내에 있었음.
00:00:01 ~ 00:11:54 동영상 재생
2. 신군부 세력에 대한 회고 (2)
  • 전두환이 집권하고 나서부터는 군 보안대의 힘이 중앙정보부보다 더욱 강력해졌음.
  • 구술자가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진행한 방식 때문에 신군부 측의 눈 밖에 났을 것으로 생각함.
  • 신군부 측과 가깝지 않던 사람들은 거의가 군내 진급에서 탈락.
  • 군 내에서 하나회의 영향력은 육사 30기 정도 까지라고 봄.
00:20:47 ~ 00:29:05 동영상 재생
3. 포병학교 교장 시절 훈장을 양보한 일화
  • 포병학교 교장 재직 시절 5·18 진압 과정에서 진압군의 오인 사격으로 다리 부상을 당한 일등병이 있었음.
  • 구술자는 5·18 후 국가에서 나온 훈장을 이 부상병에게 양보함.
  • 구술자의 배려 덕분에 부상병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현재까지도 연락을 지속하며 지내고 있음.
00:37:23 ~ 00:47:50 동영상 재생
4. 포병학교 교장 및 3사관학교 교장 시절의 일화
  • 포병학교 교장 시절에 영국제 새 레이더 구입을 모색했지만 비용 문제로 실현에 옮기지는 못함.
  • 당시 육군에서는 사단장이 바뀌면 이취임식을 하면서 전별금을 받는 관례가 있었는데, 구술자는 이것을 하지 않고 조용히 떠났음.
  • 전역 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
00:47:51 ~ 00:57:00 동영상 재생
5. 신군부 세력에 대한 회고 (1)
  • 12·12사태 당시 구술자의 휘하에 있던 보안대장이 양주를 권하며 잠을 잘 것을 종용한 적이 있음.
  •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들은 각 부대에 자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장교들을 배치하여 상황을 장악하려 했음.
  • 정승화가 자신을 보안사령관에서 동경사령관으로 보내려는 것을 감지한 전두환이 먼저 선수를 쳤다는 소문도 있음.
00:11:55 ~ 00:20:46 동영상 재생
6. 전두환 정권 시절에 대한 평가
  • 구술자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함.
  • 전두환은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인망을 유지했음.
  • 구술자는 전역 후 한신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중석에 부임.
  • 군인사법 개정으로 전역하는 장성들이 많아지자 전두환 정권은 이들이 공기업에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면서 회유하고자 했음.
00:29:06 ~ 00:37:22 동영상 재생
7-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는 과정
  •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는 데는 구술자가 정주 오산학교를 다니던 시절 4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분의 권유가 있었음.
  • 구술자에게는 교사 자격증이 없었지만 3사관학교 교장 경력이 전문대학장 경력으로 인정 되어 문교부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었음.
00:00:01 ~ 00:11:50 동영상 재생
2. 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 (1)
  • 구술자가 교장으로 부임했을 당시 오산학교 시설은 무척 열악.
  • 교장으로 부임한 구술자는 교장실에 전두환을 비롯한 대통령들의 사진을 걸지 않았음.
  • 당시 오산고에는 전담 형사가 배치되는 등 치안 당국의 주목을 받는 학교였음.
00:11:51 ~ 00:19:25 동영상 재생
3. 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 (2)
  • 구술자는 교장으로서 전인교육을 지향했기 때문에 체육, 미술, 음악 등의 예체능 교과도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토록 했음.
  • 오산고 1학년 학생들에게는 여름 방학 과제로 부모님 전기 쓰기를 냈는데, 보람 있는 일이었음.
00:19:26 ~ 00:29:57 동영상 재생
4. 오산학교 교장 재직 시절 (3)
  • 1학년 입학 학생 중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학생들을 가려 뽑아서 반장, 부반장, 모범학생과 더불어 지도자 훈련에 참가시켰음.
  • 구술자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함석헌이 동창회장 이었는데, 좋은 관계를 유지했음.
  • 교사들을 위한 해외 연수를 추진,
  • 교과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뇌물은 받지 않았음.
00:29:58 ~ 00:43:40 동영상 재생
5. 인생 전반에 대한 회고
  • 스스로 생각할 때 무인형의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의 군 생활을 통하여 배운 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음.
  • 만사를 그르치는 것은 욕심이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올바른 가치관이 중요함. 교장 시절에도 이것을 강조했음.
00:43:41 ~ 00:51:59 동영상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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