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집안내력과 가족관계 /유년기의 기억/ 일제식민지시기의 사회상/ 태평양전쟁시기의 생활상/ 유년기 학업에 대한 열망/ 해방 전후 논산의 분위기/ 해방 직후 논산의 상황/ 조선경비대 4기 입대/ 조선경비대 훈련 내용/ 조선경비대의 내무반시설 및 배급 상태/ 조선경비대의 군복과 일상생활/ 조선경비대 훈련에 대한 회고/ 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조선경비대 시절 생활/ 하사관학교·조선경비대 계급 체계/ 하사관학교 시절에 대한 회고/ 조선경비대 시절부터 16포병대대에 부임하기까지 과정/ 4·3사건 및 여순사건에 대한 회고/ 4·3사건 및 모병활동에 대한 회고/ 5·10선거 및 청년단체에 대한 회고/ 재정관 시절에 대한 회고 및 6·25전쟁 전후 정세/ 6·25전쟁 전후 정세/ 1950년 6월 25일 상황에 대한 회고/ 춘천 전투와 그 후의 후퇴 과정/아내와 만나게 된 과정 및 춘천 전투시의 활동/ 춘천 전투에 대한 회고/ 한국전쟁 초기 6사단의 후퇴/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전황/ 심일 소대장 및 미공군의 오폭에 관한 기억/ 현지 징병과 학도병 동원, 노무자 및 애국부인회의 활동/ 한국전쟁에서 학도병, 청소년, 노무자 부녀자의 역할 /한국전쟁 중 현지임관/ 한국전쟁 당시 보충장교의 종류/ 북진 결정에 관한 일화/ 춘천-김화로의 북진/ 김화 전투 중 입은 총상/ 순화병원에서의 부상치료/ 퇴원과 16포병대대로 윈대복귀/ 대위 진급과 화랑무공훈장 수여/ 6포병단 창설 작업 /수도사단 포병단으로의 발령/ 송요찬 및 아이젠하워와 얽힌 에피소드/ 포병감실 서울 분실장으로 발령/ 박정희와의 만남/ 미 포트실(포병학교)로의 유학/ 도미 유학시기 병원 입원 경험/ 미 포병학교의 교육 내용과 미국에 대한 인상/ 미국 유학시절의 에피소드/ 6·25전쟁 중 죽어가는 산모를 살린 경험/ 6·25전쟁의 전개 과정/ 6·25전쟁의 교훈/ 1954년 이후의 활동/ 포병 부대 내 서북청년회의 존재/ 포병 부대 내 서북청년회의 통솔/ 포병의 종류와 특색/ 포병사령관 재직 시 인상 깊었던 일/ 1950년대 군 운영의 어려움/ 군에서 경험한 4·19와 5·16/ 5·16의 원인/ 인사참모부 기획처 근무/ 물리 실과 대학 경영 관리학과 과정 이수/ 대령 진급 이후의 활동/ 인사참모부 인사 제도 과장/ 인사 제도 과장 이후의 활동/ 대령 진급과 5사단 포병사령관 근무 / ‘5분 대기조’ 실시와 무장간첩 사살 전과/ 국방부 예비군국 동원과장 활동과 주월 파병 / 월남 파병의 의미 /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와 한국군의 명성 / 월남 생활의 에피소드 / 삼훈오계의 내용과 귀국/ 베트남전에 대한 의문 / 베트남전의 교훈/ 한국외대 학군단장/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 인사참모부 인사근무처장/ 복제 개선 /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 원호관리단장/ 8사단장 발령/ 전차공격기동 축선 훈련/ 팀스피리트 79 훈련과 197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8사단 지역 내의 주요 지형지물-승일교, 근홍교-에 얽힌 유래/ 운천고아원과의 인연/ 박달유격장 건설/ 장교관사 상수도 설치/ 8사단 사찰 건설/ 10.26사건과 육군 항공감 발령/ 감찰감 발령과 2군부사령관 발령/ 신군부의 인사전횡/국가안보와 통일문제에 대한 구술자의 생각/ 한반도 비핵화 문제/ 정전협정과 통일문제의 관계/ 한반도 통일 방식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1)/ 한반도 통일 방식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2)/ 평화 공원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 평화 공원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 비핵화 평화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 통일이 가져올 긍정적 미래/ 구술 소감과 정리
1회차 면담 / 2014-09-26 / 01:59:12
1. 면담개요
집안내력과 가족관계 /유년기의 기억/ 일제식민지시기의 사회상/ 태평양전쟁시기의 생활상/ 유년기 학업에 대한 열망/ 해방 전후 논산의 분위기/ 해방 직후 논산의 상황(1)/ 해방 직후 논산의 상황(2)/ 조선경비대 4기 입대/ 조선경비대 훈련 내용/ 조선경비대의 내무반시설 및 배급 상태/ 조선경비대의 군복과 일상생활
2. 주요색인어
식민지, 태평양전쟁, 징용, 징병,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국방경비대, 해방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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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안내력과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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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출생5남 2녀 중 막내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람.아버지는 부농으로 물려받은 땅과 논이 있었음.초등학교 3~4학년 때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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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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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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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지 못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음.첫째형은 농사, 둘째 형은 일본으로 징용을 가고 셋째 형은 독지가를 만나 일본으로 유학, 넷째 형은 해방 후 경찰이 되었음집안형편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고 동네에서 서당을 다니며 농사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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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3:14 ~ 00: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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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제식민지시기의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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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태평양전쟁 시기에 식민지통치는 무척 강압적이었음.구술자는 징용, 징병, 정신대등의 인적동원정책과 궁성요배, 창씨개명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 및 놋그릇 수거, 공출, 공납 등의 전쟁 동원 정책을 기억.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소년병 학교 지원을 권유하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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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27 ~ 00:2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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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평양전쟁시기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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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고학년들은 학교 훈련이라고 불리는 교련 훈련을 받았음.당시 소학교 교원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었고, 보통 고학년을 일본인 교원이 담당.구술자 가족은 일본에 유학중인 형에게 문의를 하여 온 가족이 창씨개명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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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46 ~ 00:3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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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년기 학업에 대한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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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 소학교 졸업이후 상급학교 진학율은 무척 낮았음.셋째 형은 일본에서 고등상업학교를 나와 경성전기에 취직, 덕분에 집안의 경제상황이 좋아졌음.구술자는 통신강의록을 이용해 중학과정을 독학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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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05 ~ 00:4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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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방 전후 논산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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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8월이 되자 마을에서 일본사람들이 모여서,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해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곤 했음.B- 29 폭격기를 목격하는 등 전쟁이 끝날 거라는 걸 사람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었음.
해방 직후 이승만이 논산에 유세를 왔는데, 보러갔음. 식민지기 이승만, 김구 등의 독립운동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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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28 ~ 00:5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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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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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직후 논산의 상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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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천왕의 특별방송이 있다는 방송이 있었음.라디오가 있는 집에 가서 천왕의 방송을 들음. 방송을 듣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외쳐서 모두 따라 외침.이후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왔고, 크레용, 먹, 문창지등을 이용해서 태극기를 그려 들고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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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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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 직후 논산의 상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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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들이 신사, 학교, 면사무소, 지서등을 불태우자함.구술자는 신사를 없애는 것은 동의했지만, 학교 등 공공시설은 보존하도록 마을사람들을 설득했음.학교 교장 등 일본인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치게 시키고 풀어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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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35 ~ 00:2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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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경비대 4기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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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역에 이승만이 온다는 전단지를 보고 동네친구들과 갔음.이승만은 뭉치면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요지의 연설을, 어눌한 한국말로 진행했음.해방 직후의 감격과 이승만의 연설이 준 감동 등 여러가지 계기로 조선경비대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1946년 11월 경 대전의 조선경비대에 입대 시험을 보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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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44 ~ 00:2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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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경비대 훈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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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조선경비대 4기생으로 입대.당시 4기생은 240명훈련은 1,2,3기생이 진행했고, 대체로 구보였음.훈련복이 지급되지 않아 밤이면 짚을 꼬아 신발을 만들었음.배식상황도 무척 열악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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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26 ~ 00:3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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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경비대의 내무반 및 배급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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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관사로 쓰던 방을 1개 분대가 내무반으로 사용.추운 겨울인데 담요 한장 밖에 지급이 안 되었음.편성화가 지급되었는데, 개개인의 발 사이즈에 맞는 것이 아니라서 병사들끼리 서로 교환해서 신었음.통위부에서 감사를 나와, 사병들에게 요구, 불만 사항등을 적어내라고 했음.구술자는 군복지급과 각반폐지를 써서 제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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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51 ~ 00:5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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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경비대의 군복과 일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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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5월경 조선경비대 군복이 지급됨.광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한복과 유사했는데, 군복의 질이 좋지 않아 훈련을 진행하기 어려웠음.훈련기간은 4개월이었음훈련 도중 유성온천에 간일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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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03 ~ 00:5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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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14-09-30 / 02:48:40
1. 면담개요
조선경비대 훈련에 대한 회고/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1)/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2)/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3)/하사관학교·조선경비대 계급 체계/하사관학교 시절에 대한 회고/조선경비대 시절부터 16포병대대에 부임하기까지 과정/4·3사건 및 여순사건에 대한 회고/4·3사건 및 모병활동에 대한 회고/ 5·10선거 및 청년단체에 대한 회고/재정관 시절에 대한 회고 및 6·25전쟁 전후 정세/6·25전쟁 전후 정세/1950년 6월 25일 상황에 대한 회고(1)/1950년 6월 25일 상황에 대한 회고(2)/춘천 전투와 그 후의 후퇴 과정/아내와 만나게 된 과정 및 춘천 전투시의 활동/춘천 전투에 대한 회고
2. 주요색인어
최갑석, 국방경비대, 하사관학교, 4·3사건, 여순사건, 6·25전쟁, 춘천전투, 16포병대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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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경비대 훈련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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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비대 시절에도 기합은 존재했으나,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상태에서 기합이 가해졌음.한국 군대의 체벌 문화는 주로 일본군 경험자들을 통해 전해짐.당시에는 선임병들을 ‘고병’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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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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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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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병영생활에서 괴로운 것은 기합보다도 부족한 식사였음.당시 사용하던 숙소도 일본군이 버리고 간 건물들로서 시설이 열악했음. 훈련은 약 3개월간 강한 강도로 진행.총기는 99식 소총 등을 사용했고, 교탄 사격 훈련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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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59 ~ 00: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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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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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비대에서 필요한 경제적 부분의 7~80퍼센트가 미군의 군원에 의해서 지탱되었음. 매주 수요일에는 특별 식량으로 씨레이션이 지급됨. 연대장은 국기강하식 시간을 이용하여 10여분 정도의 훈시를 통해 정신 교육을 실시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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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12 ~ 00:3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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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경비대 시절 생활환경에 대한 회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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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할 때는 공산주의자 여부를 가리는 사상 검증은 특별히 없었고 다만 경찰서를 통한 신원 조회 절차가 있었음.당시 군인들과 경찰 사이에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음.훈련소를 수료한 후 2연대 재정과에서 지불 업무를 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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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42 ~ 00: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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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사관학교·조선경비대 계급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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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중반에 2연대 2대대에 부설된 하사관학교에 입교.당시 일반 병사들 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이들을 하사관학교에 입교시켜 중간 간부로 양성하였음.조선경비대에서는 참교, 참위, 부위, 정위 등 대한제국 시절의 계급명을 사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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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13 ~ 00:4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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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사관학교 시절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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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 교육 받던 시절에는 월급이 없었고, 부대에 배치된 이후부터 소액의 월급이 나왔음. 하사관학교에서는 주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양성하는 훈련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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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8:15 ~ 00:5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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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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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경비대 시절부터 16포병대대에 부임하기까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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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비대 2연대 근무시절 송호성은 훈시를 통해 이범석의 족청에 대해 비판하곤 하였음.국방경비대 시절만 해도 반공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여순사건이 발생하자 구술자가 속한 2연대가 진압을 위해 파견됨.2연대는 여순사건 진압 후 제주도로 파견되기도 함.49년 2개 대대 집단 월북 사건 후 구술자가 속한 대대가 춘천으로 파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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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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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3사건 및 여순사건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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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시 군내의 하사관 및 장교들의 일부가 남로당 당원으로서 많은 ‘반역 행위’를 저질렀음.4·3사건 진압시에도 피아구분이 어려운 상황이 많이 발생함. 제주도에서는 함병선 연대장이 효과적인 심리전을 펼쳐 사건을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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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58 ~ 00:2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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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3사건 및 모병활동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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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연대 대신 제주에 투입된 2여대는 양민과 폭도를 분리하기 위해 많은 유화 정책을 썼음.제주도 주민들이 2연대 함병선 연대장을 기려 송덕비를 세워줌. 연대본부 하사관 시절 모병관으로서 고향에서 활동.모병활동 때 조롱하는 군청 직원들 앞에서 총을 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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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09 ~ 00:3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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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10선거 및 청년단체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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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선거 당시 군인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음. 여순사건 이후 숙군이 있었지만 2연대에는 대상자가 많지 않았음.서북청년단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가혹한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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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21 ~ 00:4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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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정관 시절에 대한 회고 및 6·25전쟁 전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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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방경비대 시절보다 식생활 면에서 보다 향상되었음.49년에 미군이 철수하고 애치슨라인이 발표되면서 북한이 남침에의 유혹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임.전쟁 직전 북한은 조만식과 공산측 인사들의 교환을 미끼로 협상 공세를 펼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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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17 ~ 00:5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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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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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전쟁 전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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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선거를 전후해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부로 해제되었음.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전 병력의 1/3이 부대를 빠져나간 상태가 됨.38선을 경계하고 있던 7연대는 6월 23일경부터 북한측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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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3:46 ~ 01: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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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년 6월 25일 상황에 대한 회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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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7연대장과 16포병대대장이 부대원들의 휴가 및 외출을 제한하기로 합의.간부로 일하고 있던 구술자는 외출을 나갈 수 있었음.6월 25일 아침 라디오 안내 방송을 듣고 급히 부대로 복귀.아침 9시부터 부대 앞의 논에 포탄이 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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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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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50년 6월 25일 상황에 대한 회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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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참모를 도와 탄약을 옮기고 물자를 조달하는 임무를 자임함.춘천 농업학교 학생 및 민간 트럭을 동원하여 탄약을 춘천 역 앞으로 옮김. 7연대와 16포병대대가 하천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 커다란 전과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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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56 ~ 00: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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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춘천 전투와 그 후의 후퇴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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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투에서 7연대와 16포병대대가 북한군 2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결과, 북한군 전체의 진격 계획에 변화가 생김. 6월 28일에 명령을 받고 춘천에서 중앙선을 따라 후퇴.후퇴 과정에서 들른 원주에서 우연히 가족들을 만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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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1:25 ~ 00:3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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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내와 만나게 된 과정 및 춘천 전투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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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는 길에서 훗날의 아내와 처가 식구들과 조우함.아내는 여동생의 친구로서 춘천 시절에 몇 번 만났음.전쟁이 발생한 당일 공장과 시장을 다니며 필요한 물품들을 조달하는 활동들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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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56 ~ 00:4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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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춘천 전투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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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투는 보병과 포병이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로 평가됨. 춘천 전투의 성공사례는 지금도 육군대학에서 방어전의 모범 사례로 강의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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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23 ~ 00:5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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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차 면담 / 2014-10-14 / 03:51:29
1. 면담개요
한국전쟁 초기 6사단의 후퇴/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전황/ 심일 소대장 및 미공군의 오폭에 관한 기억/ 현지 징병과 학도병 동원, 노무자 및 애국부인회의 활동/ 한국전쟁에서 학도병, 청소년, 노무자 부녀자의 역할 /한국전쟁 중 현지임관(1)/ 한국전쟁 중 현지임관(2)/ 한국전쟁 당시 보충장교의 종류/ 북진 결정에 관한 일화/ 춘천-김화로의 북진/ 김화 전투 중 입은 총상/ 순화병원에서의 부상치료/ 퇴원과 16포병대대로 윈대복귀/ 대위 진급과 화랑무공훈장 수여/ 6포병단 창설 작업 /수도사단 포병단으로의 발령/ 송요찬 및 아이젠하워와 얽힌 에피소드/ 포병감실 서울 분실장으로 발령/ 박정희와의 만남/ 미 포트실(포병학교)로의 유학/ 도미 유학시기 병원 입원 경험/ 미 포병학교의 교육 내용과 미국에 대한 인상/ 미국 유학시절의 에피소드
2. 주요색인어
한국전쟁, 국민방위군, 북진, 현지임관, 육포병단, 도미군사유학, 포트실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3-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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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전쟁초기 육사단의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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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6사단은 춘전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음.육군본부로부터 전선 조정을 위해 후퇴하라는 명령이 하달, 홍처느 원주, 수안보, 문경고개, 무극리 등을 거쳐 전투를 하면서 후퇴.이과정에서 6사단 7연대가 군가를 불러 적을 압도하는 것을 목격.당시 포병대가 직접 조준사격방식으로 적병에게 바로 포탄을 쏘기도 하는등 상황이 급박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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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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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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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전투, 상주전투, 도리원전투를 거치며 영천방향으로 후퇴.후퇴과정에서 국민방위군이 쓰러져있는 것을 목격실령 지구까지 후퇴하고 영천지구전투에 돌입.당시 낙동강에 최후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곳에서의 방어를 바탕으로 인천상륙작전이 행해졌고, 한국전쟁의 전황이 역전되었음.저자는 낙동강최후방어선에서 벌어진 최후방어전투의 의미를 높게 평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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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46 ~ 00:2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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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일 소대장 및 미공군의 오폭에 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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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은 16포병대대소속 장교로 대전차포대 중대장전차를 파괴하는 공을 올렸음. 이를 구술자가 직접 목격하지는 못함.50년 6월 29일 철수하는 과정에서 구술자는 미공군기의 폭격을 받음.언어소통이 어렵고 지휘·협조체제가 확고히 자리잡지 않아, 당시에 미 공군의 오폭이 잦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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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1:48 ~ 00:3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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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지 징병과 학도병 동원, 노무자 및 애국부인회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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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이 부족해지자 가두모병을 통해 중학교 상급생들을 학도병으로 모집. 당시 학도병 숫자가 십만명에 달함. 이들은 전투관련 지식없이 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막대한 희생을 당함.소년병은 18세이하 종군자들을 통칭한 것으로 학도병이 주로 소년병. 징집사병 외에 보급부대 역할을 한 노무자들의 희생이 컸음. 부녀자들 또한 전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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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2:54 ~ 00:4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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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에서 학도병, 청소년, 노무자, 부녀자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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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한국전쟁에서 병사뿐만 아니라 학도병, 청소년, 노무자, 부녀자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평가.그렇기에 한국전쟁은 전 국민이 참전한 전쟁이었다고 평가,또한 참전국의 숫자가 상당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단순한 사변이나 동난으로 불려선 안된다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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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22 ~ 00:5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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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회 구술 상세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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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전쟁 중 현지임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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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육군본부에서 현지임관 정책을 실시.보통 1,2등상사와 특무상사 3계급의 하사관이 소위로 진급하고 보병 소대장을 하게 되었음.구술자는 대대장의 요청으로, 포병 관측장교로 재분류되었음.당시 소대장의 전사율이 무척 높았기 때문에, 임관을 위해 모인 사람들도 스스로를 소모품이 부여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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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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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 중 현지임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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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임관은 미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처음 실시한 정책으로, 한국전쟁에서 한국군 연대장들이 전투지휘관 손실에 대해서 걱정을 하니까, 미군고문관들이 대리근무 및 현지임관정책을 조언했음. 이것이 수용되어 현지임관 정책이 실시됨.1950년도 7월부터 현지임관 정책이 실시되어 12월까지 6개월동안 총 2625명이 현지임관 됐음. 이증 1/3이 전사 1/3은 상이제대 1/3이 계속 군에 남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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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09 ~ 00: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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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전쟁 당시 보충장교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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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실병지위 능력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들보다 실전경험이 많은 현지임관들이 나은 측면도 있었음.한국전쟁기에 현지임관 된 2625명은 대개 낮은 학력으로 인해 차후 진급에서 불이익을 많이 봤음. 현지임과과 같은 류의 보충장교로는 갑종 간부후보생(OCS), 육군종학합교 졸업생, 호국군 장교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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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46 ~ 00:2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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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진 결정에 관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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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에 관한 정일권의 회고를 구술자가 소개.그 내용은 정일권은 유엔사령부로부터 북진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 대기.이승만이 정일권을 불러서 북진을 종용정일권이 38선 인근 사단에 북진 명령을 내리니 그 부대로부터 이미 북진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정일권이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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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25 ~ 00:4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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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춘천-김화로의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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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6사단 16포병대대 소속으로 원주를 경유해서 춘천까지 북진.원주에서 포로로 잡힌 인민군있던 곳을, 패주하던 다른 인민군부대가 지나쳐갔는데, 포로들이 따라가지 않는 모습을 목격.춘천시내에는 피난을 가지 않은 시민들이 꽤 많이 남아있었음.병력이 부족해서 구술자가 상관의 명을 받아 중학교, 사범학교 등에서 학도병을 백여명 모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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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21 ~ 00:5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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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화 전투 중 입은 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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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후방지휘의 책임을 받고 화천에서 김화로 진격했음.김화의 말고개에서 인민군 패잔병들이 6사단을 공격해왔음.당시 구술자 휘하에는 모병한 학도병들밖에 없었음. 이들을 후퇴시키고, 인민군에 맞서는 과정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음.부상을 당한 채로 산을 굴러 국군병력이 있는 곳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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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2:17 ~ 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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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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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화병원에서의 부상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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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춘천 소양국민학교에 있던 의무대에서 서울 창성동에 있는 순화병원으로 후송됨. 순화병원은 민간병원으로 당시 군에 징발된 상황담당의사는 구술자가 안면이 있던 사람으로, 구술자에게 수혈할 피가 없자 자신의 혈액을 수혈해 주었음.중공군개입과 후퇴로 인해 순화병원도 마산으로 소개구술자의 부상이 호전되어 부산 동래 보충대로 명령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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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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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퇴원과 16포병대대로의 원대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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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퇴원 병사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동래보충대로 이동.당시 보충대에 지급되는 각종 물자를 병사들이 시장에 내다 파는 등 수용관리, 준비가 되있질 않았음.구술자는 이후 대구 포병감실로 이동하여, 원대복귀 명령을 받음.원래 16포병대대가 속한 6사단이 와해되어 7사단으로 재편성된 상태였음. 부대들의 부식이 부족해, 구술자가 양구 호수에 포탄을 사격하여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아서 제공했음. 이로 인해 사단고문관으로 부터 징계를 받을뻔 했으나 대대장이 중간에서 처리해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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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45 ~ 00:2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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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위 진급과 화랑무공훈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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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북방 고지 점령시 포사격을 잘했다하여 사단장으로 부터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음.양구에서 대위로 진급되었고, 당시 대대장이 구술자에게 총 8개의 직책을 부여함.과로로 인해 폐병을 얻어 2달간 서울에서 요양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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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05 ~ 00:3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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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포병단 창설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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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을 끝내자 6포병단 창설작업에 차출됨. 6포병단은 2개 대대를 축으로 편성되었고, 창설 장소는 전라남도 광주였음.구술자가 요양하는 2개월간 6사단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구술자가 7사단으로 바뀐 6사단에 원대복귀 했을 땐, 전속 간 사람, 전사한 사람 등으로 인해 인원변동이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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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1:50 ~ 00:3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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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도사단 포병단으로의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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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포병단을 전방에 편성 완료 한 뒤 수도사단 지원포병으로 발령이 났음.구술자가 수도사단으로 처음 치룬 전투는 금성지구 전투. 중공군과의 고지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음.당시 송요찬 사단장이 포병대에 만발을 쏠 것을 명령했는데 물리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었음.구술자가 사격결과를 속이고, 포병단장대신 송요찬에게 보고. 당시 송요찬이 즉결처형으로 유명해 많은 장병들이 접견, 보고하는 것을 꺼려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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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27 ~ 00:5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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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요찬 및 아이젠하워와 얽힌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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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송요찬에 대한 두려움이 컸음.무단으로 외출하는 병사들을 막기 위해 헌병을 세우는 대신, 송요찬의 이름을 언급하는 푯말을 박아놓을 정도로 위력이 있었음.1951년 아이젠하워가 수도사단을 시찰하러 왔었음.당시 구술자가 실탄으로 예포(禮砲)를 쏘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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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22 ~ 00:5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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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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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병감실 서울 분실장으로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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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도 2월 22일 결혼.결혼 직후 서울 포병감실 분실장으로 발령이 났음. 당시 포병감실은 숙명여자대학교에 있었음. 한쪽에서는 군인들이, 한쪽에서는 복교한 학생들이 함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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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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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정희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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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사령관 신응균으로부터 박정희가 지휘하는 2포병단을 서울역에서 안내하고, 박정희는 음식점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음.만리동에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신응균, 박정희, 구술자가 함께 1박 2일을 보냈음.이후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 대통령을 할 때에도 구술자가 직접 보고를 가기도 했음. 처음엔 전쟁당시 만났던 일을 기억했는데 뒤로 가자 잊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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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07 ~ 00: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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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 포트실(포병학교)로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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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포트실 포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 명령이 났음.5차 도미유학단이었음. 유학 당시 맹장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받았음. 동양과 서양의 의술이나 사고방식이 달라서 구술자는 고생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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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31 ~ 00:2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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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미 유학시기 병원 입원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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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가 맹장수술을 위해 입원한 병원에는 장교 부인으로 구성된 봉사대가 있었음.퇴원하기 전날에는 댄스 파티를 하고, 봉사회에서 일하는 장교 부인들이 드라이브를 시켜주는 등 외국에서 온 군인에 대한 대우가 무척 좋았음.포트실 안에서 한국 병사들이 미국의 문화에 맞지 않게 행동해서 불합격, 본국송환 판정을 받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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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53 ~ 00:3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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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 포병학교의 교육 내용과 미국에 대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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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실 초등군사반의 교육 내용은 한국에서 받은 초등군사반 교육과 대동소이 했음. 교욱 내용은 축지, 자동차학, 포 정비학, 포병 전술, 관측요령 등으로 구성되었음.포트실에는 총 16개국의 장병들이 와서 교육을 받았는데, 한국군이 가장 성적이 좋았음. 유학기간 동안 도미 유학단 단장이 훈련원처럼 군기를 잡아 불만이 높기도 했음.미국의 풍요로운 풍경이 인상깊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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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13 ~ 00:5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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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국 유학시절의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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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2차대전 참전자의 농장을 방문하고, 미국의 제대군인지원정책의 수준이 무척 높은 것에 감명을 받았음.농기구 등을 국가가 15년 상환을 조건으로 장기저리대부 해줘 많은 참전군인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음.포트실 근처의 미국 전도사가 김치를 담궈 한국인장병들에게 제공해 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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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38 ~ 00:5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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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 면담 / 2014-11-07 / 02:52:51
1. 면담개요
6·25전쟁 중 죽어가는 산모를 살린 경험/ 6·25전쟁의 전개 과정/ 6·25전쟁의 교훈/ 1954년 이후의 활동/ 포병 부대 내 서북청년회의 존재/ 포병 부대 내 서북청년회의 통솔/ 포병의 종류와 특색/ 포병사령관 재직 시 인상 깊었던 일/ 1950년대 군 운영의 어려움/ 군에서 경험한 4·19와 5·16/ 5·16의 원인/ 인사참모부 기획처 근무/ 물리 실과 대학 경영 관리학과 과정 이수/ 대령 진급 이후의 활동/ 인사참모부 인사 제도 과장/ 인사 제도 과장 이후의 활동
2. 주요색인어
서북청년회, 포병, 4·19, 5·16, 인사참모부, 물리 실과 대학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4-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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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전쟁 중 죽어가는 산모를 살린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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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 16 포병 대대가 경상북도 신령직구에서 방어를 하고 있을 때, 빈 마을을 순찰 중 할머니의 곡소리를 듣게 됨.
- 할머니의 며느리가 출산 후, 제대로 식사를 못해 죽어가고 있었음.
- 군에서 쌀과 미역을 조달해주어 죽어가던 산모를 살림.
- 산모 가족의 부탁으로 구술자는 산모가 출산한 아이의 이름을 ‘김전남’으로 작명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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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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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25전쟁의 전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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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의 발발, 유엔군의 참전, 중공군 참전, 흥남 철수, 7·27 휴전,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 반대 시위
- 휴전 반대 시위가 일어났을 때 군 내부에서도 휴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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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58 ~ 00: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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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25전쟁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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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의 5대 영웅으로는 국군,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원수, 무명 용사들, 박정희 대통령을 들 수 있음.
- 대한민국 국민은 총력 안보, 국민 개병, 유엔을 통한 집단 안보와 교류라는 3가지 신조를 지녀야 함.
- 이승만 대통령은 전방 사단을 시찰하고 평양을 방문하여 연설하는 등 일선에서 활동했으며 6·25전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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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34 ~ 00:3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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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54년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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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미국 포병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 후, 12사단 66대대장이 됨.
- 당시 포병은 부대 수가 갑자기 늘고 보병에 비해 진급이 느렸기 때문에 대위 계급인데도 대대장이 됨.
- 이후 12사단 65대대장, 79대대장, 포병 사령부 정보 참모, 6군단 포병 사령부 군수 참모, 6군단 977 대대장, 1군 포병부 보급과장, 1군 101대대장을 역임.
- 6년 반 동안 대대장을 5번이나 역임하며 ‘먼지 군인’이라는 별명이 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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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5:32 ~ 00:4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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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포병 부대 내 서북청년회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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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전후로 월남한 서북 청년들이 서북청년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이 군에 대거 지원하여 군내에 하나의 파벌을 이룸.
- 서북청년회는 반공정신이 강하고 기질이 강하여 지휘 통솔에 문제를 일으킴.
- 이러한 서북청년회 소속 장병들은 특히 포병에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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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44 ~ 00:5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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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병 부대 내 서북청년회의 통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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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에 문제를 일으키는 서북청년회를 통솔하기 위해 체벌을 비롯한 권위주의적 통솔방법이 사용됨.
- 그러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함이었지 감정적 체벌이 아니었고 1회에 그쳤기 때문에 이러한 통솔방법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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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13 ~ 00:58: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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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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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병의 종류와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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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병의 종류에는 임무에 따라 직접 지원 포병, 화력 증원 포병, 일반 지원 포병이 있음.
- 포병의 특색은 팀워크가 매우 중요하다는 데 있으며 대대 구성을 보면 전포대, 지휘 소대, 관측반, 측지반, 기상반, 탄약반 등이 있음.
- 6·25전쟁 시에도 포병의 활약이 대단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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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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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병사령관 재직 시 인상 깊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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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사단 포병사령관 재직시 1·21사태가 일어나자 각 사단 포병 사령관들이 모두 모여 전쟁에 대비한 화력 계획을 세움.
- 이 때 205 포병 대대를 훈련시켜 자체 방어 시범을 보였는데 이것이 교리로 채택되어 5분 대기조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 이후에도 5사단 포병 대대가 간첩을 소탕하여 5사단 포병 대대 사병들이 야전군 전체 부대에 파견되어 교육을 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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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27 ~ 00: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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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50년대 군 운영의 어려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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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는 군인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됐고 부대운영비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때문에 군용 물품의 유출과 여러 가지 후생 사업이 만연했음.
- 송요찬 육군 참모 총장 취임후, 후생사업을 금지시켰으나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고 음성적으로 이루어짐.
- 대대장 재직 시 보급 장교가 군수품을 유출하다 점검에서 발각되자 월북한 사건도 벌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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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21 ~ 00:3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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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50년대 군 운영의 어려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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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수품 유출과 후생사업 등의 비리는 군수지원을 100%해줄 수 없었던 당사자의 문제라기 보다는 국민과 국가의 책임이었음.
- 5·16 이후부터 조금씩 상황이 나아졌으며 60~70년대 들어와 군원이 끊기자 할 수 없이 부대 영농을 진행하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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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1:18 ~ 00:4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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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에서 경험한 4·19와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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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의 원인은 3·15부정선거에 있었으며 혁명 이후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음.
- 5·16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것이며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음.
- 5·16이 일어난 당일 아침, 1군 정보 과장이었던 박승옥 중령이 찾아와 무선기를 켜보라고 권유. 무선기를 통해 당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던 혁명 공약을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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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39 ~ 00:4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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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16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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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은 사적 감정이나 진급 적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려는 우국충정으로 일어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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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29 ~ 00:5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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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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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사참모부 기획처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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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포병 대대장 역임 이후, 27사단 포병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이후 육군 대학 과정 이수.
- 육군 대학 과정 이수 후, 본인의 강력한 희망으로 인사참모부 기획처로 발령.
- 인사참모부 근무 중 ‘전시 의전 업무 규정’ 마련.
- 육군 본부 개편 연구 위원회에 인사참모부 대표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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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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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리 실과 대학 경영 관리학과 과정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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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참모부 근무 중 일반 지식 보충을 위해 물리 실과 대학 경영 관리학과 지원, 합격.
- 대학에서 직장인들끼리 하나모임을 결성하여 휴강 시에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 졸업 시 공로상을 받음.
- 물리 실과 대학에서의 교육이 개편 연구 위원회 활동에 큰 도움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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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3:11 ~ 00:2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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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령 진급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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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편 연구 위원회에서 활약한 결과 8년만에 대령으로 진급함.
- 대령 진급 이후, 인력 활용 과장, 5사단 543포병 사령관, 인사 제도 과장, 인사 근무 처장, 인력 관리 처장, 원호 관리 단장 역임.
- 물리 실과 대학 이전에 갔던 육군 대학에서는 주로 지휘참모학을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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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16 ~ 00:3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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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사참모부 인사 제도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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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참모부 인사 제도 과장 재직시 단편적으로 흩어져있던 인사 관리 제도를 연구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채점제 인사 관리 제도로 개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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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4:36 ~ 00:4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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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사 제도 과장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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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 관리 제도 개혁의 공으로 장군으로 진급함.
- 이후, 인사 근무 처장과 인력 관리 처장을 역임하고 이후 원호 관리 단장으로 재직 시에는 PX 제도를 개혁함.
- 베트남에서 귀국 후, 외국어대학 학군단장으로 재직 시에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교 1년 과정을 이수했으며, 전역 후에도 국방대학원에서 경영자 단기 과정을 이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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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54 ~ 00:5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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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차 면담 / 2014-11-11 / 02:53:52
1. 면담개요
대령 진급과 5사단 포병사령관 근무 / ‘5분 대기조’ 실시와 무장간첩 사살 전과/ 국방부 예비군국 동원과장 활동과 주월 파병 / 월남 파병의 의미 /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와 한국군의 명성 / 월남 생활의 에피소드 / 삼훈오계의 내용과 귀국
2. 주요색인어
5사단 포병사령관 / 5분 대기조 / 국방부 예비군국 동원과장 / 주월군 인사참모 / 삼훈오계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5-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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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령 진급과 5사단 포병사령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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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6년 1월 1일자로 대령으로 진급함
- 1967년에 5사단 포병사령관으로 가게 됨
- 무장간첩 침투사건에서 5사단 포병이 공훈을 올리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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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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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분 대기조’ 실시와 무장간첩 사살 전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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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사태 이후에 ‘5분 대기조’를 만들었고, 무장간첩을 잡게 됨
- 구술자는 방위포장을, 아래 계급은 무공훈장을 받게 됨
- 각 연대 및 대대급 이상에서 5분 대기조와 같은 특별 소대를 편성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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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45 ~ 00: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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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분 대기조’ 실시와 무장간첩 사살 전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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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분 대기조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필요한 것임
- 포병 대대가 간첩을 잡는 것은 드문 일임
- 김재규 사령관이 공훈을 치하하기 위해 5사단을 방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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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20 ~ 00:2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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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방부 예비군국 동원과장 활동과 주월 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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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예비군국 동원과장으로 발령 받음
- 각 부처에서 실시된 예비군 검열에서 불합격한 4개 부처에 대해 주무 과장으로서 재검열을 실시함
- 국방부 인력 동원 계획을 만들다가 주월군 인사참모로 발령 받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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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12 ~ 00:3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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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월남 파병의 의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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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월군으로 지망하는 사람이 넘쳐났음
- 1969년 6월부터 1년 4개월 동안 주월군 인사참모로 근속하게 됨
- 한국군은 월남에서 좋은 평판을 얻음
- 월남에서의 경험은 한국군의 전력증강에 도움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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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13 ~ 00:4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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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월남 파병의 의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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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 파병을 반대하던 야당 국회의원들이 나중에는 월남에 위문을 옴
- 한국의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된 것이 월남 파병임
- 사병들은 파병 전에 오읍리에서 교육 훈련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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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02 ~ 00:5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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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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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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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으로 가기 전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림
- 인사참모 업무 중에 보충 교대 병력 관리가 가장 중요함
- 베트남전은 정규전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도가 적다고 생각되어서 지원자가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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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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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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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에서 전사했거나 부상당한 사람에 대한 처리와 그 예우가 중요했음
- 작전 수행 후 허위로 보고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 지휘서신을 내림
- 한국군의 포로학대설을 해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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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01 ~ 00:2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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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3)
|
- 한국군이 포로로 잡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음
- 한국군이 현지에서민간인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막아야 했음
- 린손사 살인사건을 조사해보니 한국군이 아니라 베트콩의 소행으로 밝혀짐
- 미군은 마리화나 문제가 심각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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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46 ~ 00:3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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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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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은 미군에 비해서 휴양, 휴식 상황이 열악했고, 장교들만 귀국길에 미군 휴양소를 이용할 수 있었음
- 연예인 위문단 공연을 많이 보여주려 노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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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20 ~ 00:3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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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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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들의 위문단 공연 지원이 넘쳤음
- 현지 고용인들이 위문단 공연을 보고 한국 노래를 잘 따라함
- 여자 연예인들이 벗어놓은 속옷이 자꾸 없어지는 일이 발생함
- 한국인 기술자가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서 처자식을 버린 일을 해결해주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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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56 ~ 00:4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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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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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 한국인 기술자들과 베트남 여성 사이의 고아 문제가 심각했음
- 성(性)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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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49 ~ 00:5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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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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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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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월 한국인 교포를 돕기 위해 주거지를 마련해 줌
- 베트남을 방문하는 VIP를 대우하는 문제로 골치 아팠음
- 한국군이 민간 암시장에 출입해서 우유가루 사는 행위를 제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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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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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월군 인사참모 업무와 한국군의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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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화물선을 통해 병력 수송을 할 때 한국군의 무질서가 문제가 됨
- 장교를 지명해서 통제를 시켰지만 불만이 컸음
- 한국군이 6개 애국군 중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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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12 ~ 00: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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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군의 명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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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자가 한국군의 취업문제를 해결함
- 베트남인 군속 고용인들에게 한국 구경을 시켜주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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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40 ~ 00:2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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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군의 명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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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이 대민지원을 잘했기 때문에 월남 장관들과 사이가 좋았음
- 베트남인은 한국군 모두가 태권도를 잘한다고 생각했음
- 베트남 파병 5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열었음
- 주둔군은 그 나라의 풍속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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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07 ~ 00:3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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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월남 생활의 에피소드와 삼훈오계(三訓五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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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사병들은 고기만 먹고 야채를 못먹는 것이 불만이었음
- 한국 장병 어머니가 아들에게 쓴 편지가 회자됨
- 사령관이 삼훈오계(三訓五戒)를 만들어서 보고할 것을 명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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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9:56 ~ 00:4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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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훈오계의 내용과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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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계의 내용으로 허위보고, 하극상, 대민사고, 과욕 행위가 포함됨
- 구술자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사령관에게 철군이 가까워졌다고 보고함
- 귀국 후 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해외 주둔군 인사관리 연구’ 논문을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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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38 ~ 00:5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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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차 면담 / 2014-11-27 / 02:53:10
1. 면담개요
베트남전에 대한 의문 / 베트남전의 교훈(1) / 베트남전의 교훈(2) / 한국외대 학군단장(1) / 한국외대 학군단장(2) /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1) /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2) / 인사참모부 인사근무처장(1) / 인사참모부 인사근무처장(2) / 복제 개선 /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1) /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2) / 원호관리단장(1) / 원호관리단장(2) / 원호관리단장(3)
2. 주요색인어
주월사령부, 한국외국어대, 군사교육(교련), 현지 임관, PX, 하나회, 5․16, 12․12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6-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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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전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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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가 베트남에 있었던 1969- 70년 당시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표출된 것은 없었음. 파병은 부대 단위가 아닌 개별보충 형식으로 이루어짐.
- 적어도 구술자가 베트남에 있었을 당시 미국에서 자국군을 감축하고 한국군 규모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는 없었음. 고엽제는 화학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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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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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베트남전의 교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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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교훈에 대해 구술자가 정리 구술함. 구술자는 인사참모 업무를 초월해서 개인적으로 자료 수집을 많이 했음.- 우수한 자질의 장교와 장병을 교대 보충하는 병력 관리 문제, 전사상자 처리 및 예식절차와 유품 관리 문제, 포로 대우 문제, 외국인과의 결혼 문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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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08 ~ 00:2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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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트남전의 교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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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아 문제, 본국의 손님 접대 문제, 한국군의 베트남 암시장 출입 문제, 한국군의 우수한 작전능력 등을 두루 구술.-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고 한미동맹이 혈맹으로까지 격상할 수 있었던 점 및 현대전 경험도 적극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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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12 ~ 00:3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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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외대 학군단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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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이후 국내로 돌아와 한국외국어대 학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됨. 당시 한국외대 대학장은 박술음 박사로 학군단장 대우를 잘해줬음.- 한국외대 학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문교부장관기 전국대학생 사격 경연대회 등에 참가, 우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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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6:17 ~ 00:4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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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외대 학군단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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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가 한국외대 학군단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학군단 제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으며, 학생들의 유신반대시위 등 사회적 혼란기였음. 학군단장은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 또한 있었음.- 학생데모로 군사교육(교련) 과정 자체에 대한 참여가 소홀해지는 현상 발생. 교련 불참자에게 나온 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홍종철 당시 문교부장관을 찾아갔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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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7:01 ~ 00:5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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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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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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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신 등으로 사회적 혼란기였지만 군인의 경우 집단의 특수한 성격상 별다른 개인 견해는 갖지 않았음. 학군단장 보직을 마친 후 1973년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음. 이 때 최창규 대령이 자신을 후임으로 천거했음.- 인사제도과장은 육군의 모든 교육, 보직, 진급 등 인사운용제도를 법적 근거로 관리 발전시키는 중요한 보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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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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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사참모부 인사제도과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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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제도과장을 하면서 육군인사제도를 객관적으로 표준화함. 인사법의 3대 원칙은 공정의 원칙, 기회균등의 원칙, 능력본위의 원칙임.- 구술자는 인사제도 표준화를 위해 점수제도(채점제)를 만들어 제도화함. 이 제도에 따르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인사가 일방적으로 좌우되지 않을 수 있었음. 그 전에는 근무평정이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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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03 ~ 00:2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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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사참모부 인사근무처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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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육군에는 육사 외 현지임관 호국군, 각종 종합학교 등 출신 및 지역별로 여러 차별이 계속 존재했었음. 영남 인맥이 강화됐던 것도 사실임.- 구술자는 현지임관 출신으로 어떻게 보면 군대 내 소수자라 볼 수 있으나 인사제도개혁을 다루는 핵심보직을 수행함.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구술자가 군 교육뿐 아니라 민간교육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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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13 ~ 00:3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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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사참모부 인사근무처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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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근무처장 재직 시 노재현 참모총장의 질타로 복제 개혁을 시도하게 됨. 당시 보안사에서 소위 부대 보안을 지킨다는 이유로 군복에 부대 마크를 제거한 상태였음.- 이에 구술자는 부대 마크가 없기 때문에 군인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없고 행실이 나태해진다고 판단, 부대 마크를 다시 다는 개혁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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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6:14 ~ 00:4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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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제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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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합참의장이 만기 전역 후 유럽 각국으로 순방외교 출장 시 한국군 군복 대장계급이 미군 대장계급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음. 이에 구술자는 대사관을 통해 세계 각국의 군복 계급장을 조사. 서울대 미대 학장에게 자문도 받았음.- 세계 각국은 각각 자국의 특수성을 군복 계급장에 반영하고 있었음. 이에 정책회의를 통해 오각 은성별에 한국 고유성을 살릴 수 있는 무궁화를 부장하는 아이디어 도출. 이른바 국적 있는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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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8:31 ~ 01:0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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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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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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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후 8개 연대 창설 시 이등병 입대자는 약 14만 명. 한국전쟁 발발 후 각 부대 초급장교 손실이 많아지면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 우수한 하사관들을 현지임관시켜 장교로 임용. 이 숫자가 약 2,600여 명이며 이 가운데 각 병과에서 장군까지 진급한 사람은 단 11명에 불과.- 인사근무처장 근무 후 이세호 총장의 명으로 인력관리처장으로 옮기게 됨. 구술자는 보병의 손해를 감수하고 각 병과의 진급률을 균등히 하고자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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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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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사참모부 인력관리처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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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의 시도에 특히 당시 권력을 행사하던 보병 출신 신군부 세력들이 집단으로 항의함. 구술자는 제 병과의 동등함을 주장하며 그들에게 해명. 구술자는 이것이 육군 정책심의회와 정책회의를 거쳐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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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13 ~ 00:2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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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호관리단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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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육군 군납비리의 온상이 PX였고, 이것이 군의 골칫거리. 구술자는 이세호 총장의 명으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원호관리단장직을 맡아 군납비리 개혁 임무를 수행하게 됨.- 원호관리단장 발령 즉시 전군의 PX 운영실태를 조사함. 당시 상황은 매우 심각했음. 사병들의 빚은 물론 장부에만 물건이 있는 경우도 허다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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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03 ~ 00:3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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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호관리단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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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군납업체의 중역을 소집하고 결손처분 등 고통 분담을 요구. 100% 채권 포기각서를 받음.- 구술자는 군 PX에 납품되는 물품을 가장 신선하고 좋은 상품으로 공급하기 위해 노력. 수십 년 된 막걸리 보관 드럼통의 위생상태 조사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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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4:11 ~ 00:4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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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원호관리단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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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보관상태가 심각함을 확인한 후 막걸리 납품을 정지시키고, 모든 막걸리업자들에게 보관업체 교체를 요구. 우유 보관 알루미늄 통과 같은 것으로 교체.- 그 외에 음식을 데워 먹을 수 있는 오븐 설치. 전군의 PX 막사를 현대식으로 신축. 또 PX를 공익화해 부정운영을 방지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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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11 ~ 00:5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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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차 면담 / 2014-12-09 / 03:38:37
1. 면담개요
8사단장 발령, 전차공격기동 축선 훈련, 팀스피리트 79 훈련과 197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8사단 지역 내의 주요 지형지물-승일교, 근홍교-에 얽힌 유래, 운천고아원과의 인연, 박달유격장 건설, 장교관사 상수도 설치, 8사단 사찰 건설, 10.26사건과 육군 항공감 발령, 감찰감 발령과 2군부사령관 발령, 신군부의 인사전횡
2. 주요색인어
팀스피리트 훈련, 8사단, 전차공격기동 축선 훈련, 승일교, 근홍교, 운천고아원, 10.26, 12.12, 하나회, 신군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7-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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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사단장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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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0월 17일에 사단장이라고 발령되었다는 소식으 듣고 가족들과 모두 기뻐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움
- 33년 동안 16계급을 진급했던 기간을 회상
- 사단장이 되고 나서 북에서 내려오는 전차를 공격하기 위한 기동 축선 공사를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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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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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차 공격기동 축선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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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 공격기동 축선 시범 훈련을 참관한 미1군단장이 매우 칭찬을 했음
- 나중에 알고보니 NATO에서 계획하고 있던 전술과 똑같았음
- 공사를 할 때 미1군단 불도저를 지원받고 난 후 미군쪽에서 비용 청구를 하려는 것을 설득해서 무마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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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23 ~ 00: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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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팀스피릿 79 훈련과 70년대 후반의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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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미군과 함께 팀스피릿 훈련을 진행
- 미 1군단이 지상 토 미사일이라는 대전차 공격 미사일을 지원
- 7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안 좋았지만 전방 사단에서의 연합훈련에는 거의 영향이 없었음
- 70년대의 자주국방 개념과 현재의 자주국방 개념은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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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26 ~ 00:2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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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팀 스피리트 훈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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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스피리트 훈련을 위해 임시 급편해서 훈련단을 편성했는데 군단장으로 6군단장 신현수 장군이 임명되었고 8사단, 27사단, 미2사단 3개 사단이 훈련에 참가
- 8사단의 전술 기동 공격 축선 상에 800고지가 있었는데 그 산길에 도로를 개척해서 전차를 800고지를 넘겨서 참가지원시켰음
- 2주 동안의 훈련 기간 중 8사단에서는 훈련사고가 한 건도 없었는데 이것은 구술자가 내세운 새로운 행군 원칙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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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59 ~ 00:4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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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팀 스피리트 훈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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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군을 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고적대가 음악을 연주하게 함
- 8사단 CP를 완벽하게 위장시킴
- 양평지역에서 춘천을 점령하는 훈련 후 점령군의 개선 퍼레이드를 춘천시에서 진행했는데 1등상사 시절 춘천에 특파되었던 때가 떠올라 감개가 무량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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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32 ~ 00:4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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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사단 지역 내의 주요 지형지물에 얽힌 유래 특별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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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사단을 방문하는 모든 VIP를 위해 8사단 관할 지역 내에 존재하는 주요 지형 지물, 혹은 임관한 사람들에 대한 전설이나 사화를 모아서 특별 브리핑을 시킴
- 명지대학과 자매결연을 위한 자리에서 특별 브리핑을 시켰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음
- 포천 군수와 관할 지역 내의 경찰서장들에게도 반응이 좋았음
- 국망봉의 유래와 승일교의 유래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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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7:32 ~ 01: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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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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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홍교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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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탄강에 있는 다리 중 하나 이름이 승일굔데 지역 사람들은 승일교로 이름붙여진 이유가 6.25전쟁 당시 김일성과 이승만이 반반씩 건설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음
- 그러나 승일교란 이름은 6.25전쟁 때 1호 연대장으로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념하기 위한 것
- 운천에서 6사단 CP로 들어가기 직전의 다리 이름이 근홍교인데 그것은 8사단 10연대장이었던 육사 1기생 고근홍대령을 기념하기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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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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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할 지역 내 주요 지형지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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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일교, 근홍교 등의 다리 이름의 유래에 관해 군단장과 사단장, 연대장끼리 농담을 한 일이 있었음
- 당시 동향인들끼리 모아서 한 부대에 근무하는 시험 사단으로 8사단이 선택되었는데 신병교육 제1기부터 배출되기 전에 정보참모에게 신병들과 함께 지역을 둘러보면서 주요 지형 지물에 대한 교육을 하게 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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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30 ~ 00: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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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천고아원과의 인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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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0월부터 1980년 1월까지 8사단장으로 재직
- 사단장 시절 초도순시를 하면서 민사참모를 데리고 다녔는데 민사참모가 순시 중 운천고아원을 소개
- 고아원에 들어가서 원장을 만나고 고아원 상황을 살펴보니 사정이 안 좋아서 참모들을 동원해서 고아원을 지원
- 전역 후에 고속버스조합 이사장을 하면서도 계속 고아원을 후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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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9 ~ 00:3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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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운천고아원과의 인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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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12기 김복동 장군이 알선해줘서 담요 100장을 얻어 고아원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갖다줌
- 동네 헌책을 모아서 고아원에 갖다 주기도 하고 이불을 지원받아 후원해주기도 함
- 원장 아들이 물려받은 이후로는 고아원에 발길을 끊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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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1:10 ~ 00:3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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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격장 만들기, 장교 가족들 살림 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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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 내 유격장 옆에 절이 있었는데 유격훈련 도중 사찰로부터 항의가 들어와서 백운계곡 중턱에 박달유격장을 건설
- 8사단 장교관사 안에 상수도를 설치해서 군용차가 매일 물을 공급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줌
- 군인 가족들로 하여금 공터를 텃밭으로 일꿔서 야채를 수확해서 먹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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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10 ~ 00:5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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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사단 사찰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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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 유근환 장군이 사단장을 할 때 사단 내 사찰이 없어 불교 신자들이 40
- 50분씩 걸어 군단사령부 내의 절에 가는 불편함이 있었음
- 유군환 장군이 마음을 먹고 후원을 받아 사찰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후원자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사찰건설을 완성하지 못함
- 사단장을 인계받은 후 사단 내 사찰건설 사업을 지속해서 완성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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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2:15 ~ 01:0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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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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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사단장 시절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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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장 시절 군인 가족들을 위해 테니스장을 만들고 테니스 훈련을 시킴
- 사단 내 중령급이 전속할 때 사단장 공관에 초청해 만찬회를 가지면서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줘서 군인 부인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줌
- 지금 8사단은 보병 사단이 아니라 기계화 사단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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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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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26 사건과 육군 항공감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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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사단장이 끝날 무렵 10.26 사건이 일어나서 하루종일 밥을 먹지 못함
- 5사단 포병사령관 시절 김재규 보안사령관을 만나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은인으로 칭했던 말을 들은 경험이 있었음
- 10.26 당일 군단 CP에 가서 군단장과 상의를 하면서 경거망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함
- 이후 육군 항공병과감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생소한 자리라고 느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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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37 ~ 00:2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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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군 항공감 발령 경위, 12.12사태에 대한 평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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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 내 모든 병과는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함
- 포병병과 내에서 사단장을 마친 장군을 뽑다 보니까 구술자가 육군 항공감으로 발령받게 됨
- 5.16 때와 12.12는 상황이 달랐고 12.12는 안 일어나는 것이 옳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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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14 ~ 00:3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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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20 ~ 00:4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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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육군 항공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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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감으로 1년 3~4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무척 고생함
- 항공감으로 취임 후 항공병과를 전투병과로 만들기 위해 경비행기를 헬리콥터로 바꾸고, 전술교범을 편찬하기 시작
- 육군 항공병과와 공군에 대한 대우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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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11 ~ 00:4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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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육군 1항공여단에 교회 건설, 2군사령부 부사령관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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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항공여단 내에 교회가 없었는데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후원을 받아 교회를 건설하게 됨
- 개인적으로 월급을 털어 교회에 삼익피아노 후원
- 마지막 보직으로 일반 참모부장으로 가거나 군단장으로 가길 원했으나 2군 부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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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37 ~ 00:5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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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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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군 항공감 시절, 감찰감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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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감 시절 토 미사일을 500md 헬기에 장착하고 공격 훈련 시범을 보여서 미군을 놀래킴
- 500md 헬기는 이세호 참모총장시절부터 개발이 되서 80년부터 실용화가 되었고 1개 비행단 규모로 몇 백대가 있었음
- 육군 항공대는 주로 헬기 위주로 운영
- 항공감 이후 감찰감으로 발령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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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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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찰감 시절 회고, 2군 부사령관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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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찰감을 해보니 군의 문제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느낌
- 감찰감 이후 2군 부사령관으로 발령받았으나 제일 원하던 보직은 아니었음.
- 감찰감 출신으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 사람도 많이 있으나 구술자는 그러지 못했음
- 12.12 전후로 이희성 참모총장이 인사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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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02 ~ 00:2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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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군부의 인사 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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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법으로 새롭게 인사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떤 신인사관리제도가 12.12 이후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음.
- 보병 대 포병이 3:1로 인사되어야 하는데 포병병과 출신들이 2군으로 밀려나게 됨
- 12.12 이후 육사 출신이어도 하나회 인사들만이 득세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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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59 ~ 00:3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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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역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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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군사령관 차규헌 장군은 하나회 출신이지만 구술자와 사이가 좋았음
- 83년 10월 31일에 총 36년간의 군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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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1:42 ~ 00:3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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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차 면담 / 2015-03-27 / 01:37:00
1. 면담개요
국가안보와 통일문제에 대한 구술자의 생각/ 한반도 비핵화 문제/ 정전협정과 통일문제의 관계/ 한반도 통일 방식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1)/ 한반도 통일 방식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2)/ 평화 공원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 평화 공원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 비핵화 평화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 통일이 가져올 긍정적 미래/ 구술 소감과 정리
2. 주요색인어
한반도 비핵화, 평화통일, DMZ해체, 정전협정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 8-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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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안보와 통일문제에 대한 구술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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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휴전선 등 전방에서 근무하면서 국가안보 및 통일문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오랜 기간 생각했음.전역 후 안보강연 강사로 안보, 통일 문제에 대해서 강연 및 기고를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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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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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반도 비핵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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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통일문제의 핵심이 한반도 비핵화, 평화통일, DMZ해체 및 공원화라고 생각함.구술자는 이러한 구상을 재향군인회 활동 이전부터 가졌음,특히 비핵화, 평화통일은 무력통일에 반대하는 것으로, 육이오전쟁이 준 교훈이라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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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29 ~ 00: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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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전협정과 통일문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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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비핵화 평화통일의 선행조건으로 정전협정이 종전협정,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주장.구술자는 비핵화 과정에선 경제적 유인보다 국제적 압력이 중요하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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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36 ~ 00:3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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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반도 통일 방식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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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가 생각하는 통일방식은 대한민국이 북한을 흡수하는 흡수통일. 이후 총선거 실시한반도 비핵화 통일에 대해서는 주변국 들도 반대보다는 성원할 것이라고 예측북한 또한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올 것이라고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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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54 ~ 00:3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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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반도 통일 방식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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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 북한 정권의 사고 전환이 중요하다고 봄.또한 국제적인 압력과 제재, 북한 사회의 변동도 통일을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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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0:00 ~ 00:4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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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화 공원에 대한 구술자의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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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DMZ부근에만 평화공원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휴전선 일대를 아우르는 평화 공원 단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봄.구술자의 제안은 각각의 테마를 가진 총 15개의 큰 공원 단지를 조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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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27 ~ 01: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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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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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핵화 평화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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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무력통일을 추진할 경우 피해와 희생이 크다는, 육이오 전쟁이 준 교훈에 기반해 비핵화 평화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구술자는 남북한을 아우르기 위한 통합사상으로 ‘효’사상이 중요하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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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 00:1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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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일이 가져올 긍정적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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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통일은 경제적 유인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한반도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봄.통일에 있어 한반도의 두국가는 물론 주변 열강, UN 등 국제기구의 역할과 책임감도 높아야한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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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3:08 ~ 00:2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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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술 소감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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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는 이번 면담을 통해 1946년 입대, 50년 현지임관 이후의 군인으로서의 생활과 전역 이후의 상황 등 본인의 삶을 정리할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고 소감을 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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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4:13 ~ 00:3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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