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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계약 해지 제9조 (계약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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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 (자격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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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 서비스의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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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4. 회원이 국익 또는 사회적 공익을 저해할 목적으로 서비스이용을 계획 또는 실행하는 경우
  6. 5.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게시, 게재, 전자메일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전송 하여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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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7. 정보통신설비의 오 작동이나 정보 등의 파괴를 유발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프로그램 등을 유포하는 경우
  9. 8. "연구원", 다른 회원 또는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
  10. 9.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 외부기관의 시정요구가 있거나 불법선거 운동과 관련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은 경우
  11. 10. 타인의 개인정보, 이용자ID 및 비밀번호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경우
  12. 11. "연구원"의 서비스 정보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연구원"의 사전 승낙 없이 복제 또는 유통시키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경우
  13. 12. 전기통신 관련법령 등에 위배되는 경우
  14. 13. 본 약관을 포함하여 기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한 이용조건 및 관계법령에 위반한 경우

제4장 책임 제11조 ("연구원"의 의무)
  1. 1."연구원"과 제휴를 맺은 사이트와 "연구원"의 사이트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정보를 제휴 사이트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공유를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컴퓨터에 쿠키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2. 2. "연구원"은 "서비스" 제공으로 알게 된 "회원"의 신상정보를 본인의 승낙 없이 제3자에게 누설, 배포하지 않습니다. 단,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합니다.
    1.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 사업법, 지방세법, 소비자보호법, 한국은행법, 형사소송법 등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2. - 통계작성/학술연구 또는 시장조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서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
  3. 3. "연구원"은 "회원"의 전체 또는 일부 정보를 업무와 관련 된 통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4. "연구원"은 "서비스"가 계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부득이한 이유로 "서비스"가 중단되면 지체 없이 이를 수리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단, 천재지변, 비상사태, 시스템 정기점검 및 "연구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거나 중지할 수 있습니다.

제12조 (회원의 의무)
  1. 1.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관리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2. 2. "회원"은 자신의 아이디를 타인에게 양도, 증여, 대여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3. 3. 자신의 아이디가 부정하게 사용된 경우, "회원"은 반드시 "연구원"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합니다.
  4. 4. "회원"은 게시물에 등록된 데이터를 이용한 영업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5. 5. "회원"은 "연구원"이 보내는 공지 메일을 수신해야 합니다.

제13조 (회원의 게시물)
  1. 1. 게시물이라 함은 "연구원"의 각종 게시판에 회원이 올린 글 전체를 포함합니다.
  2. 2. 회원이 게시하는 정보 (및 질문과 대답)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이나 문제는 전적으로 회원 개인의 판단에 따른 책임이며, "연구원"의 고의가 아닌 한 "연구원"은 이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습니다.
  3. 3. 회원의 게시물로 인하여 제3자의 "연구원"에 대한 청구, 소송, 기타 일체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회원은 그 해결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연구원"을 위하여 분쟁을 처리하여야 하며, "연구원"이 제3자에게 배상하거나 "연구원"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회원은 "연구원"에 배상하여야 합니다.
  4. 4. "연구원"은 "회원"의 게시물이 다음 각 항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사전통지 없이 삭제 합니다. 그러나 "연구원"이 게시물을 검사 또는 검열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1. 1) 제3자를 비방하거나 중상 모략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우
    2. 2) 공공질서,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인 경우
    3. 3) "연구원"의 저작권, 제3자의 저작권등 기타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
    4. 4) "연구원"에서 규정한 게시기간을 초과한 경우
    5. 5) 상업성이 있는 게시물이나 돈벌이 광고, 행운의 편지 등을 게시한 경우
    6. 6) 사이트의 개설취지에 맞지 않을 경우
    7. 7) 기타 관계법령을 위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5. 5. "연구원"은 "회원"이 등록한 게시물을 활용해 가공, 판매, 출판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제5장 정보제공 제16조 (정보의 제공)
  1. "연구원"은 "회원"에게 필요한 정보나 광고를 전자메일이나 서신우편 등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회원"은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가입신청 메뉴와 회원정보수정 메뉴에서 정보수신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정보 수신 거부한 "회원"에게도 제13조5항의 "연구원" 공지 메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제6장 손해배상 및 면책 제14조 (책임)
  1.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연구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회원"에게 발생한 어떠한 손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2.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한 정보, 제품, 서비스, 소프트웨어, 그래픽, 음성, 동영상의 적합성, 정확성, 시의성, 신빙성에 관한 보증 또는 담보책임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제15조 (면책)
  1. "연구원"이 천재지변 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서비스"를 중단할 경우, "회원"에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제16조 (관할법원)
  1.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소송이 제기될 경우 "연구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법원 또는 대한민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른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니다.
  2. 본 약관의 해석과 적용 및 본 약관과 관련한 분쟁의 해결에는 대한민국법이 적용됩니다.

부 칙
  1. 이 약관은 2008년 10월 6일부터 시행합니다.

개인정보수집 및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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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Collection구술테마 컬렉션/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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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보선 / 1946.10.09

생산기관 서울대 면담자 김도민 면담자정보
검독자 김도민 면담 총시간 11시간 30분34초
조회수 957 스크랩수 0
면담일(장소) [ 총5회 ]
  • 2017-10-26 (신한대학교 부총장실)
더 보기 ▼
간략 소개

  • 구술자료 상세
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성장배경/ 학창시절 회고/ 육군사관학교 입학 및 독일 유학 결심/ 독일 군사유학 회고 (1)/ 독일 군사유학 회고 (2)/ 독일 군사유학 회고 (3)/ 독일 군사유학 회고 (4)/ 독일 사관학교 졸업 및 귀국/ 질의응답/ 군생활 전반과 하나회/ 독일육사와 기갑학교/ 제2기갑여단 소대장 근무/ 장봉천 장군 전속부관/ 장봉천 장군 전속부관(2)/ 제8사단 탱크중대장/ 미국 고등군사반 유학/ 미국유학 때의 기억과 기갑학교 교관 부임/ 육군대학 진학/ 전속부관 근무와 국방무관보좌관 선발/ 국방무관보좌관 파견과 국내정치 격변/ 국방무관보좌관 업무와 생활 (1)/ 국방무관보좌관 업무와 생활 (2)/ 제16전차대대 대대장과 삼군사령부 기갑보좌관 근무/ 미 육군대학원 연수/ 삼군사령부 인사처 장교보직과장 근무/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 근무(1)와 부재자 투표 문제/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 근무(2)와 88올림픽 / 국방부 국외정책과장 근무와 작전통제권 반환 문제/ 평시 및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 국방부 기획관리실 재직 시절/ 미국의 미사일 개발 제한과 3군 1기갑여단장 대리 시절/ 기갑여단장 시절과 기갑의 역사/ 연합사 재직 시절/ 합참 작전차장 시절에 겪은 하나회 사건/ 6군단 참모장 시절과 국방대학원으로의 발령/ 소요검증처 처장 시절/ 국방부 군비통제관 시절/ 국방부 군비통제관 시절과 그 이후의 생활/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시기의 이슈들/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의 주요 업무/ 국방부 차관 근무와 제주4·3위원회/ 차관 시절 노무현 정권과 국방부의 갈등/ 차관 시절 자주국방 문제/ 차관 시절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와 가정사/ 차관 시기의 이슈들/ 교육계에서의 활동/ 군과 정치의 관계
1회차 면담 / 2017-10-26 / 02:20:56
1. 면담개요
성장배경/ 학창시절 회고/ 육군사관학교 입학 및 독일 유학 결심/ 독일 군사유학 회고 (1)/ 독일 군사유학 회고 (2)/ 독일 군사유학 회고 (3)/ 독일 군사유학 회고 (4)/ 독일 사관학교 졸업 및 귀국
2. 주요색인어
군사유학, 독일 육군사관학교, 서독 사관학교, 독사파, 육사 24기, 육군사관학교, 서울고등학교, 4.19, 5.16, 기갑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성장배경
    1946년 10월 서울 충정로에서 출생.부친은 육군사관학교 7기 출신의 군인으로, 6.25 전쟁 중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음.국방차관 재직 시절 소식통을 통해 부친이 전사하지 않고 북한 내에 생존해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됨.
00:00:00 ~ 00:12:56 동영상 재생
2. 학창시절 회고
    전쟁 중에 구술자는 큰아버지 집으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됨.서울 미동국민학교 졸업 후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로 진학.중3때 4.19가 발생했을 때 학교 담을 뛰어넘어 시위 현장을 보러 갔음.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했다는 점, 서울고등학교 출신 선배들의 존재, 가정환경에 대한 고려 등의 이유로 육사 진학을 선택했음.
00:12:57 ~ 00:42:54 동영상 재생
3. 육군사관학교 입학 및 독일 유학 결심
    1964년 2월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함. 선배들의 심한 기합 때문에 처음에는 육사 입학을 후회했음. 학교 성적은 좋아서 1학년 중에서 전체 1등을 함.1학년이 끝날 무렵 학교에서 독일 사관학교로 유학을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여 동기생 유홍모와 함께 65년 초 출국함.
00:42:55 ~ 00:55:28 동영상 재생
1-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독일 군사유학 회고 (1)
    사관학교 공부를 시작하기 전 오이스킬헨의 독일 국방성 어학학교에서 3
  • 4개월 간 독일어 학습을 함.
  • 어학 학습이 끝난 후 기초군사훈련을 거친 후 병과를 선택. 독일 사관학교는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일반학 교육은 거의 하지 않고 군 관련 교육에만 집중했음.
00:00:00 ~ 00:19:44 동영상 재생
2. 독일 군사유학 회고 (2)
    국방성 어학학교에는 다른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도 있었고, 참모대학 등에 공부하러 온 한국군 장교들도 있었음.어학 교육 후 제2전투병과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 및 기갑 병과 장비 운전 교육을 받은 다음 사관학교로 이동. 당시 서독에는 함부르크, 하노버, 뮌헨 세 도시에 사관학교가 있었는데 구술자는 뮌헨의 사관학교를 선택했음.
00:19:45 ~ 00:34:13 동영상 재생
3. 독일 군사유학 회고 (3)
    동기생 유홍모와 함께 폭스바겐 중고차를 구입하여 방학이나 휴일을 이용해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음.유럽 사람들이 중국이나 일본은 알아도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서글펐던 기억이 있음.당시 국회의원이던 차지철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통역을 맡았던 적이 있음.
00:34:14 ~ 00:56:31 동영상 재생
1-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독일 군사유학 회고 (4)
    방학을 해도 한국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같이 사관학교에 있는 독일 친구들의 집을 자주 방문했음.독일식 교육 시스템은 자율성을 중시하고, 임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데 집중.
00:00:00 ~ 00:19:28 동영상 재생
2. 독일 사관학교 졸업 및 귀국
    1968년 4월 독일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함. 한국과는 달리 독일 사관학교의 졸업식은 철모와 군복을 갖춰 행진을 하는 등 사뭇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음. 귀국 후 육사 동기생들이 있는 광주의 병과학교에 합류.
00:19:29 ~ 00:28:56 동영상 재생
2회차 면담 / 2017-11-02 / 02:32:03
1. 면담개요
질의응답, 군생활 전반과 하나회, 독일육사와 기갑학교, 제2기갑여단 소대장 근무, 장봉천 장군 전속부관, 장봉천 장군 전속부관(2), 제8사단 탱크중대장, 미국 고등군사반 유학, 미국유학 때의 기억과 기갑학교 교관 부임, 육군대학 진학
2. 주요색인어
기갑, 도미유학, 하나회, 독일 육사, 기갑학교, 육군대학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질의응답
  • 독일육사 갔다온 후 환대를 많이 받았음. 언론사에서도 인터뷰를 많이 함.
  • 소대장 임관 후에도 여원이라는 잡지에서 구술자 인터뷰를 본 부대원들이 있었음.
  • 서울고 재학시절 육사 홍보하러 온 이충석 장군(21기)을 보고 육사 지원을 결정. 그러나 육사에서 서울고 출신들과 만날 일은 없었음.
  • 구술자는 하나회의 존재를 잘 몰랐음. 군에서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회 소속이 있었음.
00:00:00 ~ 00:14:09 동영상 재생
2. 군생활 전반과 하나회
  • 독일육사 귀국 후에는 소대장 배치. 1년 만 근무하고 장봉천 기갑여단장 부관으로 갔고, 이후 장봉천 장군이 한미연합기획참모단 부단장으로 가면서 거기서 부관 역할을 했음. 장봉천 장군이 8사단장이 되었을 때도 같이 이동.
  • 이후 기갑학교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고, 기갑학교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장봉천 장군이 구술자를 다시 8사단 탱크중대 중대장으로 불러들였음. 탱크 중대장 근무하다가 미국 고등군사반 유학.
  • 유학 후 기갑학교에 다시 와서 교관을 하다가 육군 대학 진학. 그 후에는 서종철 국방장관 시절 부관 부좌관으로 발령, 국외업무를 담당. 노재현 국방장관으로 바뀌면서 국방장관 부관이 됨.
  • 부관은 주간/야간 모두 국방부장관을 모시면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음. 아이도 3명을 낳으면서, 더 이상 부관 생활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벨기에 무관 보좌관 선발시험에 지원하여 합격.
  • 김영삼 정부 때 하나회를 정치문제화 삼으며 명단을 보고 놀랐음.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 구술자 본인이 포함된 것은 의외였음. 김동진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도 구술자에게 왜 거기에 들어갔는지, 잘못된 거 아니냐고 반문했음.
00:14:10 ~ 00:32:33 동영상 재생
3. 독일육사와 기갑학교
  • 독일 육사 시절 동백림 사건은 몰랐음. 일반교민과는 격리된 생활.
  • 독일 육사는 등수 개념이 없었음. 합격/불합격만 알게 됨. 한국처럼 화려한 졸업식도 없었음.
  • 독일 육사는 군사학 위주의 교육. 학사학위를 주지 않음.
  • 귀국 후 기갑학교 기초보수과정 입교. ROTC는 50명 정도였는데, 육사 출신은 불과 3명 밖에 없었음.
00:32:34 ~ 00:42:59 동영상 재생
4. 제2기갑여단 소대장 근무
  • 기갑학교 졸업 후 1968년 동두천에 있는 제2기갑여단에 소대장으로 임관.
  • 1.21사태 직후라 철책선, 장벽공사, 진지공사 하느라 정신없었음. 탱크들도 전방에 진지를 만들어서 고정전차로 투입. 독일에서 배운 기동전과는 거리가 멀었음.
  • 독일 육사를 갔다 와서, 장교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음. 구술자에게 잘해줬음.
  • 1년 근무 제2기갑여단 여단장 전속부관으로 발령이 남.
00:43:00 ~ 00:55:31 동영상 재생
2-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장봉천 장군 전속부관
  • 장봉천 여단장은 신사였음. 부하인 구술자에게도 존댓말. 굉장히 검소했음.
  • 전속부관은 심부름 하는 역할.
  • 한미연합사 창설준비단계로 한미연합기획참모단이 있었는데, 장봉천 장군이 부단장으로 명령이 났음. 구술자도 따라서 계속 전속부관으로 근무.
  • 한미연합기획참모단에서 근무하면서 미군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영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음. 미국 유학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음. 미군은 매우 풍족.
00:00:00 ~ 00:14:53 동영상 재생
2. 미국 고등군사반 유학
  • 미국유학 지원 때 시험을 봤는지 여부는 기억이 안 남.
  • 유학 간 곳은 켄터키 주의 포트 낙스.
  • 같이 유학 온 해병대 장교가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
  • 미국 유학 때 IBM 컴퓨터를 처음 봤음. 초보적인 컴퓨터 교육을 받았음.
  • 미국 유학 때 사귄 외국장교들이 한국에 오기도 했음.
  • 유학기간은 6개월.
00:43:45 ~ 00:56:50 동영상 재생
3. 장봉천 장군 전속부관(2)
  • 장봉천 장군이 8사단장이 되면서 같이 이동, 전속부관을 계속. 박정희 대통령이 불시에 부대방문을 하곤 했음. 이를 목격.
  • 전속부관 생활을 계속하다가, 이제는 부관생활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함. 그래서 월남파병 보내달라고 조름. 그러나 장봉천 장군이 거부하고, 대신 기갑학교 고등군사반을 보내줬음. 이때 구술자는 결혼도 함.
  • 장봉천 장군이 구술자를 월남에 보내주지 않은 이유는 독일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
  • 기갑학교 고등군사반 과정은 중위 때 갔는데, 가장 막내였음. 전부 대위 이상이 입교하는 곳이었음.
00:14:54 ~ 00:30:25 동영상 재생
4. 제8사단 탱크중대장
  • 기갑학교 고등군사반은 대대전술까지 교육. 기갑전술보다는 보병전투를 지원해주는 역할로 교육받았음. 보전협동작전. 구술자는 1등으로 졸업.
  • 졸업 후 기갑학교에서 참모부 장교로 몇 달 근무하다가, 장봉천 장군이 8사단 탱크중대장으로 구술자를 불러들임. 대위 진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잠시 기다렸다가 대위가 된 후에 중대장이 되었음. 전임자는 소령이었음.
  • 중대장 시절 민간인을 태운 부대트럭이 뒤집히는 사건.
  • 중대장 근무 때 부품이 부족해서 고생. 미군부대에 가서 비슷한 물건이라도 얻어왔고, 아니면 세운상가에 가서 부품을 만들어오기도 했음.
  • 미국 기갑 고등군사반에 지원, 합격.
00:30:26 ~ 00:43:44 동영상 재생
2-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미국유학 때의 기억과 기갑학교 교관 부임
  • 미국, 한국의 기갑교육 차이. 미국은 여러 병과가 함께 작전하는 제병협동전술. 예컨대 탱크, 헬기를 같이 활용. 한국은 그런 장비가 없어서 그런 전술을 쓸 수 없는 상황.
  • 미국 기갑학교 때 기억에 남는 건 국제결혼한 한국여자들이었음. 주한미군과 결혼했다가 미국으로 건너 온 사람들. 영어를 잘 못해서 가정생활이 파탄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음.
  • 구술자가 학교 측에 이야기해서, 이런 사람들이 한국어로도 면허시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줬음.
  • 도미군사유학을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불법체류하는 선배들도 있었음.
  • 귀국 후 기갑학교 전술학처 교관이 되면서, 유학 때 배운 것을 활용하여 교안을 일부 수정했음. 기존의 보전협동작전 위주에서 기동전 개념을 일부 섞었음.
  • 독일이나 미국이나 기동전은 비슷.
00:00:00 ~ 00:18:52 동영상 재생
2. 육군대학 진학
  • 기갑학교 전술학처 교관 1년 반 근무 후 육군대학에 지원, 합격. 아직 대위였으나 진급예정자로 진학할 수 있었음. 육군대학에서 막내.
  • 육군대학은 경쟁률이 심했음. 육대를 졸업해야 장기복무 자격도 생기고, 진급 가능성도 생기기 때문. 육대 성적도 매우 중요했음.
  • 100여 명 이상이 함께 수학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했음. 경쟁이 치열.
  • 1년 과정으로 전술학, 참모학, 일반학 등을 배움.
  • 당시 교관이었던 홍성태 장군에 대한 인연과 기억.
  • 졸업 후 육군대학 교관 명령이 났으나, 명령을 취소하고 국방부장관실에서 데려갔음. 국외업무 담당이 됨. 외국과의 모든 종류의 업무를 담당. 편지, 외국인손님 방문 등.
00:18:53 ~ 00:39:42 동영상 재생
3회차 면담 / 2017-11-07 / 02:22:59
1. 면담개요
전속부관 근무와 국방무관보좌관 선발/ 국방무관보좌관 파견과 국내정치 격변/ 국방무관보좌관 업무와 생활 (1)/ 국방무관보좌관 업무와 생활 (2)/ 제16전차대대 대대장과 삼군사령부 기갑보좌관 근무/ 미 육군대학원 연수/ 삼군사령부 인사처 장교보직과장 근무/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 근무(1)와 부재자 투표 문제/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 근무(2)와 88올림픽 / 국방부 국외정책과장 근무와 작전통제권 반환 문제
2. 주요색인어
12.12, 10.26, 나토(NATO), 군사외교, 5‧18 광주항쟁, 6월 항쟁, 한미안보협의회의(SCM), 미 전투지원협조단(CSCT), 삼군사령부, 기계화사단, 전시작전통제권, 국방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3-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전속부관 근무와 국방무관보좌관 선발
  • 1977년 9월부터 전속부관으로 있으면서 육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합참의장 등 군 최고위급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보게 됨.
  • 당시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은 경호실 병력을 동원하여 퍼레이드를 하며 권력을 과시했으며, 구술자는 이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함.
  • 소령 때 전속부관만 계속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벨지움 국방무관보좌관 선발 공지를 보고 지원함.
  • 국방무관보좌관으로 선발되어 벨기에로 가게 됨.
  • 1979년 7월에 2
  • 3개월 간 무관 교육을 받고, 8월 20일에 출국을 함.
  • 출국한 지 얼마 안 돼서 10‧26이 발생함.
00:00:00 ~ 00:12:38 동영상 재생
2. 국방무관보좌관 파견과 국내정치 격변
  • NATO를 담당하는 국방무관 최상섭(육사 11기) 밑에서 국방무관 보좌관을 하게 됨.
  • 벨기에에는 NATO 본부, EC 본부 등 유럽 총괄 기구가 있었기에, 다른 국가에 대령 급 무관을 보내는 것과 달리 장군이 무관으로 나가 있었음.
  • 10‧26 발생 당시에 무관들은 외신 및 외교채널을 통해서 소식을 들었고, 구술자는 곧 북한과 전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국을 준비했음.
  • 귀국 조치는 없었고 12‧12가 발생하여 전두환이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하게 됨.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연행되면서, 군의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워짐.
  • 국내정세 변화의 영향으로 기존에 중앙정보부에서 하던 정보수집 및 대사관 직원 동향보고 임무를 무관부에서 일시적으로 맡게 됨.
  • 이에 따라 12‧12 이후 대사관 직원들의 군에 대한 예우가 바뀌고, 의전서열도 달라짐.
00:12:39 ~ 00:24:03 동영상 재생
3. 국방무관보좌관 업무와 생활 (1)
  • 국방무관의 기본 업무는 주재국 정보수집, 군사외교, 한국 방위산업 물자 판촉활동임.
  • 무관은 예산, 업무보고 전반이 국방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외교부 소속인 대사관과는 독립적인 기관이었음.
  • 당시 벨기에 대사는 박근으로, 이후 UN주재대사까지 했음. 후일 구술자가 장군이 되어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다닐 때 교수로 다시 만남.
  • 벨기에에 장군 무관으로 갔던 것은 최상섭이 유일하며, 이후로는 대령 급이 파견되고 무관보좌관 직책도 없어짐.
  • 구술자는 2년 복무 예정이었는데, 1년 6개월 간 최상섭 밑에서 무관보좌관으로 근무한 후 동기생 하복만(육사 24기)이 대령 급 무관으로 파견되어 남은 6개월을 함께 근무함.
  • 무관보좌관 생활은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밤낮 없이 근무를 했음.
  • 한국에서 오는 전문은 암호 처리가 되어 있었고, 구술자는 암호를 풀어서 무관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했음. 또 정보활동을 통해 수집한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어 암호화하여 본국으로 보냄.
  • 대사관과 같은 건물을 쓰면서도 통신망을 따로 설치하여 외교부와는 별도의 채널을 이용했음.
  • 세계 각국의 무관들이 교류하는 파티에 참석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음.
00:24:04 ~ 00:45:05 동영상 재생
4. 국방무관보좌관 업무와 생활 (2)
  • 벨기에에 가족들과 함께 갔는데, 초기에 언어 문제로 인해 아이들이 힘들어했음.
  • 군 생활을 하면서 이사를 38번 다녔고, 아이들이 국민학교를 다닐 때 매해 이사를 갔기에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함.
  • 벨기에에 2년 간 거주한 경험은 가족들에게도 좋은 경험이었음. 새로운 물건들을 접할 수 있었고, 휴가기간에는 본국의 승인을 얻어 여행도 다녔음.
  • 대사관 직원들과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관계를 유지했음. 대사관 직원 동향보고 업무는 1980년 이후 국내정치가 안정되면서 종료되고, 본래 업무로 돌아감.
  • 5‧18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외신에서도, 본국에서도 거의 듣지 못했고,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데모 정도로 인식함.
00:45:06 ~ 00:55:30 동영상 재생
3-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제16전차대대 대대장과 삼군사령부 기갑보좌관 근무
  • 1981년 11월 2기갑 제16전차대대 대대장으로 나감.
  • 벨기에에서 중령 계급장을 달았고, 구술자는 벨기에에서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대대장으로 나가게 됨.
  • 제16전차대대는 12‧12사태 때 서울 장악의 주축 역할을 했음.
  • 제16전차대대에서 구술자는 전술적인 운용을 실험해볼 수 있었음. 기갑 및 항공수색대대 운용, 제병협동전술 운용 등을 시험하여 좋은 평가도 받음.
  • 전차를 밀봉‧개조하여 임진강을 도하하는 시범훈련도 진행함. 훈련 도중 전차 한 대는 제대로 밀봉되지 않아 강에 빠지는 사고도 발생함.
  • 대대장을 하는 도중 정보병과가 새로 창설되고, 중령급 인원을 선발하여 미국의 정보학교에 보낸다는 공고가 남. 구술자는 지원하여 좋은 성적을 얻었으나, 경쟁이 심한 보병 동기생들에게 양보함.
  • 이후 삼군사령부 기갑보좌관 작전장교로 가게 됨. 기갑과 작전장교 업무와 함께 외국인들에게 군사령부 현황 소개를 하고, 미 전투지원협조단(CSCT)과의 협력업무를 하는 등 영어 관련 업무가 많아 고생하며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느낌.
00:00:00 ~ 00:26:10 동영상 재생
2. 미 육군대학원 연수
  • 동기생 김희상(육사 24기)이 미 육군대학원에 간다며 구술자를 찾아왔고, 영어 때문에 고생하던 구술자는 김희상 후임으로 1985년 4월 미 육군대학원에 가서 1986년 6월에 돌아옴.
  • 미 육군대학원에는 각국의 군 엘리트들이 많이 와 있었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맺은 것이 큰 소득이었음. 재학생들은 각국 간에 초청, 방문하는 일도 잦았으나, 한국군은 이런 교류는 잘 하지 못함.
  • 미 육군대학원에는 가족들과 함께 갔음.
  • 한국군에서 미 육군대학원에 1년에 한 명씩 연수를 보냄. 보통 대령 급이 가는데, 구술자는 대령 진급예정자였기에 다른 경쟁자들보다 기수가 낮았음. 선발은 성적순으로 이루어짐.
  • 미 육군대학원에서는 10명 내외의 인원으로 토론식 교육을 주로 했음. 전체 인원은 외국인을 포함하여 100명 미만이었음. 수업은 미국인, 외국인을 섞어 진행하였으며 한 수업에서 외국인은 2
  • 3명이었음.
  • 육군대학원에서 배운 내용은 한국에는 적용시키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음. 전략수립이 전 세계를 단위로 이루어졌고, 전략‧전술 이외에 군 자체의 발전과 관련된 내용들도 많았음. 구술자는 장진호 전투 등 한국전쟁 관련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음.
  •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육군 장관, NATO사령관 등 군의 주요 정책수립자들의 특강도 있었음.
  • 외국인에게는 미국인 멘토가 한 명씩 배정되어 학업 및 생활에 도움을 주었음. 다른 한편으로 멘토는 멘티의 상태를 본국에 보고하는 평가자 역할도 하였음. 구술자는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음.
  • 육군대학원에서는 전투참여자들에게 구술을 받는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었고, 학생들이 과외활동으로 많이 참여하여 구술을 받음.
00:26:11 ~ 00:39:59 동영상 재생
3. 삼군사령부 인사처 장교보직과장 근무
  • 연수 이후 1986년 6월에 삼군사령부 인사처 장교보직과장으로 가게 됨. 구술자는 수도기계화사단 참모장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기갑장교로서는 처음으로 장교보직과장을 맡게 됨.
  • 인사처에서는 삼군사령부의 모든 인사를 담당했고, 사람을 다루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으나 원칙과 기준에 따라 업무를 수행함.
  • 순환보직을 원칙으로 재임기간 중 한 번은 전후방 교체를 하도록 했으며, 반발이 컸음.
  • 군의관, 군목, 군승, 군법무관 등 전투병과 이외의 특수병과 보직배치가 특히 어려웠음.
  • 각 부대를 순회하면서 부대 실정과 부대 지휘관을 파악하고 인사배치를 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함.
  • 군사령관은 구술자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줌. 당시 참모장은 권영해였음.
  • 구술자는 군 업무만을 성실하게 수행했고, 6월 항쟁 등 국내정치문제와는 전혀 접촉이 없었음.
  • 전두환, 노태우 정권기에는 대통령이 불시에 군부대를 순시하는 일이 잦았고, 삼군사령부에서는 언제나 이에 대한 대비를 했음.
00:40:00 ~ 00:50:57 동영상 재생
4.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 근무(1)와 부재자 투표 문제
  • 1987년 구술자는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이었고, 88올림픽 준비에 열중했으며 대통령 선거가 있었음.
  • 당시 60여단에서는 군 밖에 설치된 투표소에 장병들을 데리고 가서 투표를 했고, 투표율 및 여당지지율이 매우 높았음.
  • 군에서의 투표는 직접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정훈교육을 통해 보수적인 관점을 유도하는 방식이었음. 구술자는 스스로도 정훈교육을 중시했고,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함.
  • 1970년대에 구술자가 중대장을 할 때, 이진삼이 대대장을 하던 보병대대 훈련이 전술훈련보다는 시위진압훈련을 위주로 이루어졌음.
00:50:58 ~ 01:00:04 동영상 재생
3-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20기계화사단 60여단장 근무(2)와 88올림픽
  • 기계화사단에서는 연대장을 여단장이라고 불렀고, 구술자는 1987년 12월부터 1989년 1월까지 대령 급 지휘관으로 근무했음.
  • 구술자는 88올림픽 준비에 몰두했음. 보병대대에서는 삼청교육대를 운영했으나 기갑대대에서는 운영하지 않았음. 여단장을 할 때 사회정화위원장이 사단을 방문하기도 함.
  • 구술자 전임 여단장은 동기생인 권중원(육사 24기)임.
  • 88올림픽 준비를 위해 성화봉송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병력배치 및 경계업무, 올림픽 경계장 외곽 경계, 전방경계 등 군에서 업무가 많았음. 그러나 구술자는 기갑사단이었기에 기갑훈련에 집중함.
00:00:00 ~ 00:07:04 동영상 재생
2. 국방부 국외정책과장 근무와 작전통제권 반환 문제
  • 1989년 1월 이후 구술자는 국방부 국외정책과장으로 감. 한미안보협의회의(SCM) 준비, 합참의장 회의, 국방부 장관 회의 등 국외정책 관련 업무를 수행함.
  • 당시 평시작전통제권 반환 문제가 대두되어 구술자는 관련 실무를 진행함. 5‧18광주항쟁 당시 UN 허가를 받지 않은 한국군의 운영이 문제가 되었고, 반미 분위기를 우려한 미국 측에서 평시권을 한국 측에 돌려주고자 함. 한국군에서도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작전통제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음.
  • 구술자는 당시에 전시작전통제권도 가져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미군주둔이 갖는 남침에 대한 억지력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생각이 바뀜.
  • 상급자로는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동진, 기획관리실장 권영해가 있었음.
  • 당시 미군에서 협의 없이 병력을 철수시켜 국방부에서 강하게 항의를 한 일이 있었음. 그런데 국가기밀이었던 이 사안이 신문에 나면서 구술자가 책임을 져야 했으나, 권영해 기획관리실장의 비호로 군에 남아있게 됨.
  • 작전통제권 관련해서 구술자는 실무적인 일만을 맡았고, 평시작전통제권을 가져올 때 지휘통제권이 적용되는 부대들을 정하고 미국과 협의하는 업무를 했음. 미국과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별다른 갈등은 없었음.
00:07:05 ~ 00:27:25 동영상 재생
4회차 면담 / 2017-11-17 / 02:09:54
1. 면담개요
평시 및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 국방부 기획관리실 재직 시절/ 미국의 미사일 개발 제한과 3군 1기갑여단장 대리 시절/ 기갑여단장 시절과 기갑의 역사/ 연합사 재직 시절/ 합참 작전차장 시절에 겪은 하나회 사건/ 6군단 참모장 시절과 국방대학원으로의 발령/ 소요검증처 처장 시절/ 국방부 군비통제관 시절/ 국방부 군비통제관 시절과 그 이후의 생활
2. 주요색인어
작전 통제권/ 국방부 기획관리실/ 국외정책과장/ 한미연합사령부/ 미사일 개발/ 3군 1기갑여단장/ 기갑/ 연합사/ 합참 작전차장 / 6군단 참모장 / 국방대학원/ 하나회/ 소요검증처/ 국방부 군비통제관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4-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평시 및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
  • 국방부 국외정책과장의 임무는 외국과의 관계를 총책임지는 것.
  • 구술자는 노태우 시절 평시작전 통제권을 환수 할 때, 전시작전 통제권까지 환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음. 지금 생각하면 젊은 장교로서의 호기였음.
  • 5.18을 계기로 해서 한미연합사령관이 작전 통제하는 부담을 완화시키고자 평시작전 통제권을 환수하게 됨,
00:00:00 ~ 00:13:50 동영상 재생
2. 국방부 기획관리실 재직 시절
  • 국방부 기획관리실 재직 당시 기획관리실의 업무가 매우 방대했음. 국방부 장관
  • 국방부 차관
  • 기획관리실장
  • 정책기획관
  • 국회정책과장 순으로 업무가 내려옴.
  • 기획관리실 재직 시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녀옴. 당시 외교부 카운터파트가 송민순이었음.
  • 이대용을 중심으로 이라크 전쟁 때 예비역 군인들을 이라크로 파병하기 위한 용역 회사를 차렸는데, 결국 성사되지 못했음.
00:13:51 ~ 00:28:00 동영상 재생
3. 미국의 미사일 개발 제한과 3군 1기갑여단장 대리 시절
  •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의 독자적 마사일 개발을 막기 위해 사거리 300km, 탄두중량은 500km로 제한함. 몇 년 후에는 제한이 800km로 늘어남.
  • 대령 신분으로 90년에 3군 1기갑여단장 대리로 나감. 이 부대는 운천에 있었고, 5군단에 배속됨. 5군단장은 김동진이었음.
  • 기갑병력은 최전선이 아니라 공격당한 지역에 역습해서 원상회복시키거나 측면에서 공격하는 역할을 담당함.
00:28:01 ~ 00:38:46 동영상 재생
4. 기갑여단장 시절과 기갑의 역사
  • 5군단장으로 김동진 장군 후임으로 윤용남 장군이 부임함.
  • 당시에는 진지 공사를 매우 열심히 했는데, 당시 이진삼 육군참모총장이 와서 공사를 다시 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억울해하는 사람이 많았음.
  • 당시에 한미 연합으로 팀스피리트 훈련을 한 기억이 있음.
  • 기갑 역사를 보면, 초창기에는 보병의 전투지원을 했기 때문에 천천히 움직였지만, 1968년에 기갑여단이 생기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적극적인 기동전을 많이 활용하게 됨.
00:38:47 ~ 00:51:46 동영상 재생
4-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연합사 재직 시절
  • 이후 연합사 작전 처장을 맡아서 작전의 총책임을 맡음.
  • 구술자가 영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는 직책을 계속 맡게 됨.
  • G
  • 3 작전참모부 내에 여러 개의 처가 있고, 그 안에 과가 있는 구조였음.
  • 구술자는 안보에 대해 배우기 위해 한양대 안보환경대학원에 등록했지만, 인연이 있는 박근 대사가 강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학위를 마치지 못함.
  • 용산과 청계산에 벙커가 있었는데, 청계산 밑에 있는 한미연합사 벙커에서 총지휘를 많이 했음.
00:00:00 ~ 00:14:33 동영상 재생
2. 합참 작전차장 시절에 겪은 하나회 사건
  • 합참 작전차장으로 6개월 간 짧게 근무함. 이때 하나회 사건이 나면서 사단장으로 못나가고 6군단 참모장으로 쫓겨남.
  • 언론에서 하나회의 존재가 이슈화되기 전에 법무감에서 전화를 해 하나회 회원이 맞는지 확인 작업을 했음.
  • 하나회 명단은 구술자가 연합사 작전처장을 할 때 발표됨. 구술자는 두 군데에서 제의를 받고 합참으로 가게 됨.
  • 당시 이충석 작전참모부장이 파티에서 합참의장에게 과격한 언사를 한 것을 빌미로 하나회에 대한 숙정작업이 벌어짐.
00:14:34 ~ 00:38:34 동영상 재생
3. 6군단 참모장 시절과 국방대학원으로의 발령
  • 구술자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하나회 조직을 공식적으로 해체 한 것으로 알고 있음.
  • 6군단 사령부에 가서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관사에만 머무름.
  • 당시 구술자의 Army War Collage의 동기생들이 한국으로 와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구술자가 여러 역할을 맡게 됨.
  • 구술자는 6군단 사령부에서 군 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육사 선배자 구술자의 처남과 동기생인 20기 한광덕 장군이 국방대학원장의 교수부장 역할을 맡기면서 그쪽으로 발령을 받게 됨.
  • 처남인 이현부 장군은 7군단장 하다가 헬기사고로 돌아가심. 올바른 정신을 가진 참군인이라고 생각함.
00:28:35 ~ 00:43:25 동영상 재생
4. 소요검증처 처장 시절
  • 국방대학원 교수부장이 군에서 마지막 보직이라고 생각했는데, 합참에 소요검증처라는 새로운 부서가 생기면서 처장으로 발령을 받게 됨. 소요검증처는 컴퓨터에 의한 의사 결정 체제, C3I를 활용한 지휘 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부서였음.
  • 구술자는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김동진 씨가 자신을 신뢰했기 때문에 처장으로 임명했다고 생각함. 새로운 부서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
  • 각 군에서 필요로 하는 시스템을 수집해서 양식을 정한 다음 국방부가 민간과 계약하게끔 하는 역할을 함.
  • 구술자는 사단장을 나가지 않았지만 직위진급으로 투 스타를 달게 됨.
00:43:26 ~ 00:57:41 동영상 재생
4-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국방부 군비통제관 시절
  • 국방부 군비통제관으로 발령받게 됨.
  • 군비통제관은 남북대화가 활성화 되면서 남북 군사회담을 하고 남북한이 전력을 상호 대등한 수준으로 줄이기 위한 업무를 담당함. 구술자도 미국 가서 여러 시설을 견학했음.
  • 그렇지만 구술자가 군비통제관 직책을 수행할 때는 남북관계가 다시 완전한 긴장상태에 들어가면서 미사일 능력 증강을 위한 미국과의 협상이 주된 업무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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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방부 군비통제관 시절과 그 이후의 생활
  •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 체제가 들어서면서 북한이 망할 것을 대비해, 난민이 대량으로 몰려올 경우에 대해 대비하는 업무를 맡기도 함.
  • 미국에 출장 가서는 화학 무기의 검증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했음.
  • 남북관계에 대해 배우기 위해 숭실대학교 통일안보대학원에 등록했지만 교수들이 거부하면서 다니지 못하게 됨.
  • 1997년 11월 30일자로 전역하게 됨. 2년 정도 쉬다가 14기 홍성태 선배가 한국전략연구소에 나오라고 불러서 2년간 근무함.
  •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을 맡게 됨.
00:10:36 ~ 00:20:26 동영상 재생
5회차 면담 / 2017-11-21 / 02:04:42
1. 면담개요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시기의 이슈들/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의 주요 업무/ 국방부 차관 근무와 제주4·3위원회/ 차관 시절 노무현 정권과 국방부의 갈등/ 차관 시절 자주국방 문제/ 차관 시절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와 가정사/ 차관 시기의 이슈들/ 교육계에서의 활동/ 군과 정치의 관계
2. 주요색인어
한국전략문제연구소, 국방부, 한국국방연구원(KIDA)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사건, 전시작전통제권, 재향군인회, 한미관계, 한미동맹, 자주국방, 군 사법권,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심리전, 방산수출, 국방과학연구소(ADD),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 일사(1·4) 후퇴, 이산가족, 포로수용소, 국가정보원, 평택 미군기지,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 행정수도 이전, 계룡대, 국방대학원, 동양대학교, 오일륙(5·16)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5-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시기의 이슈들
  • 육군 소장 예편 후 홍성태의 소개로 한국전략문제연구소에서 근무함.
  • 2001년 5월 30일부터 2003년 2월까지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으로 근무함.
  • 국방부는 민간조직으로, 군 출신 예비역들이 많이 보직을 받았음.
  • 전임 기획관리실장은 권영해, 문동명(23기) 등 대부분 육사출신이 맡았으며, 구술자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 정책실과 기획관리실이 분리됨.
  • 발탁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친분은 별로 없었고, 어떤 경위로 발탁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름.
  • 주요 업무는 기획, 계획, 예산, 대국회업무였음.
  • 근무 당시 북한 핵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시끄러웠고, 국방부에서는 자체수집 정보 및 국정원, 미군 정보를 종합하여 북핵은 실전단계가 아니라 초기 연구단계라는 공식입장을 내놓음.
  •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함. 김대중 정권의 기조 상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추모도 미흡하여 이후 예비역들이 많이 비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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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의 주요 업무
  • 기획관리실장의 주된 업무로 대국회 창구업무가 가장 골치 아팠음. 기본적인 자료들은 실무자들이 만들고, 구술자는 장관과 함께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장관 옆에 배석하여 그때그때 필요한 자료를 찾아서 장관에게 제공함.
  • 예산 업무는 각 부서에서 필요한 예산을 종합하여 기획예산처에 제출하여 예산을 획득하는 것이었음. 민간 공무원들이 국방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국방부의 예산을 책정하고 심사받는 과정에서 불만이 많았음. PPBS 시스템을 활용.
  • 장관은 김동신이었고,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군인이었음. 업무수행에서는 별다른 트러블이 없었으나, 정권이 바뀐 후 연평해전 대응 미비 등 당시의 국방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하게 됨.
  • 전임 차관이었던 문일섭(23기)는 2001년 4월 비리 문제로 해임되고, 권영효(23기)가 차관으로 보직이 됐을 때 구술자가 기획관리실장으로 들어옴.
  •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북한과의 분위기가 좋았고, 이로 인해 연평해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
00:18:16 ~ 00:34:52 동영상 재생
3. 국방부 차관 근무와 제주4·3위원회
  • 2003년 2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구술자는 내부승진으로 국방부 차관이 됨. 노무현 정권은 육사 출신을 싫어하여 간부후보생 출신의 조영길 장관을 임명하고, 차관은 그대로 육사 출신을 썼음. 대체로 각 부서의 기획관리실장이 차관이 됨.
  • 노무현 정권의 성향과 국방부의 방향이 잘 맞지 않아 충돌이 잦았음.
  • 제주 4·3사건 재평가를 위해 4·3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장관을 대신해서 차관이 참석함. 4·3사건과 공산주의자들의 연관이 명확한데, 이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뒤집는 것에 대해 반대했음. 국방부에서는 마지막까지 사건 재규정 서류에 서명하지 않음.
  • 제주4·3위원회에서 박원순을 처음 봤고, 너무 생각이 급진적이라고 생각함. 고건 총리도 반대의견은 받아들이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만 일을 처리하여 업무방식에 불만이 있었음.
00:34:53 ~ 00:48:02 동영상 재생
4. 차관 시절 노무현 정권과 국방부의 갈등
  • 노무현 정권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해 애썼는데, 이는 군 관련 인사들의 큰 반발을 샀음. 국방부뿐 아니라 재향군인회, 예비역 등이 주로 반대함.
  • 국방부에서는 자주국방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을 반영하면서도 기존 한미동맹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표현을 썼음.
  • 노무현 정권에서는 군 사법권을 없애려 하고, 신일순(26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 주요 인사들을 강제예편 시키는 등 군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음.
00:48:03 ~ 00:56:10 동영상 재생
5-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차관 시절 자주국방 문제
  • 당시 장관 조영길도 노무현 정권의 주요 정책에 명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음.
  • 남북군사회담에서 확성기, 입간판 등 전방에서 심리전 도구들을 상호 사용하지 않기로 협의했는데, 이는 남한에서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대했음.
  • 구술자는 노태우 정권 때 전작권 환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직책이 올라가고 국방 전반에 대해 많이 알수록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됨.
  • 김대중 정권 때는 정책이 급격하게 변화한다고 많이 느끼지 못했고,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친화적인 대북정책에 큰 불만이 없었음. 근무 시에도 업무 자체에 몰두함.
  •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서는 급진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고, 북한과의 신뢰도 많이 깨졌기 때문에 여러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차관 업무에 임하였음.
  • 정권에서 자주국방 기조를 보이자, 한국에 무기를 수출하고자 하는 각국의 무기 관련 인사들과 접촉이 많았음.
  • 자주국방의 일환에서 국산 헬기를 개발하는 KMH사업이 추진됨. 공군 출신 박성국을 사업단장으로 임명함. 국방과학연구소(ADD)도 함께 참여하였음.
  • 자주국방 과정에서 ADD의 역할이 매우 컸고, 미사일 전문가인 안동만이 국장으로서 방위산업 문제를 다루게 됨. 현역 출신이 아닌 ADD출신이 들어오게 된 것은 정권의 자주국방 의지를 보여줌.
00:00:00 ~ 00:21:12 동영상 재생
5-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 활동과 가정사
  • 남북 간에 유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국방부 차관이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장을 맡음. 국군포로송환문제 논의를 위해 북한에 억류된 포로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1·4후퇴 때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던 구술자의 아버지가 3년 전까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
  • 구술자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납치된 남자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였음. 납치된 두 명의 형제들 중 한명이 북한에서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자식들을 만남. 그 자식들도 구술자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 상봉 후 브로커를 통해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했으나, 구술자가 일절 보내지 못하게 함.
  •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 활동은 전혀 성과가 없었음. 북의 공식입장은 국군포로가 없으며, 모두 전향해서 북한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임.
  • 국방부에서 파악한 국군포로 생존자는 500여 명이었음.
00:21:13 ~ 00:35:37 동영상 재생
2. 차관 시기의 이슈들
  • 본래 미군을 전방에 분산배치하여 남침에 대한 인계철선 역할을 하도록 했으나, 정권의 자주국방 기조와 전방의 미군 시설 및 예산 문제가 맞물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가 추진됨.
  • 평택의 지역주민들 및 시민단체의 반대가 극심했음. 반면 평택 지자체에서는 기지 이전을 찬성하는 대신 지역에 혜택을 줄 것을 요구함.
  • 구술자는 직접 평택 지역을 방문하여 주민설득을 했음.
  • 국방부에서는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을 만들고, 미군과 여러 협의를 진행함.
  • 신행정수도 이전 TF를 만들어, 국방부 관련 시설들의 이전 문제를 다룸.
  • 삼청교육피해자, 북파공작원, 6·26 참전용사,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민원이 많았고, 삼청교육피해자 보상지원단도 만들어짐.
  • 정권과의 잦은 갈등으로 인해서인지 1년 여만에 장관, 차관이 모두 교체됨. 다음 장관으로는 해군 출신 윤광웅이 임명됨.
00:35:38 ~ 00:49:49 동영상 재생
3. 교육계에서의 활동
  • 차관이 끝난 지 1여년 후에 동양대학교에서 국방기술대학장을 맡게 되어 6년을 근무함.
  • 국방기술대학에서 4년 간 기술장교 교육을 시킨 뒤에는 장교로 정식 임관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기 위해 구술자가 나서서 국방부에 요구하였으나, 행정적인 문제들에 부딪히며 실현되지 못함. 대신 장교시험을 준비시켜 한 해에 30
  • 40명씩 임관을 시킴.
  • 구술자는 먼 곳에서 근무하는 것이 힘들어서 후임을 구하고 학장 일을 그만두고자 함. 김관진을 불렀으나 갑자기 장관으로 명령받아 하지 못하게 되고, 다른 후배를 앉혀 놓고 나옴.
  • 이후 2년간 쉬면서 이라크에 용병 파견하는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불발됨.
  • 신흥대학과 한북대학이 통합되는 시점에 신한대학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5년 째 근무 중임.
  • 구술자의 군사유학 경험은 구술자에게 경험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군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됨.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역할을 함.
00:49:50 ~ 01:00:49 동영상 재생
5-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군과 정치의 관계
  • 군과 정치는 필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짐. 그러나 기본적으로 군은 기본적인 임무로서 국방에 충실해야 함.
  • 군사정권, 하나회 등을 통해 만들어진 군과 정치의 관계는 군인들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고, 승진을 위해 군인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야 하게 만듦. 군대의 성격이 변질되었던 과거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
00:00:00 ~ 00:06:22 동영상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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