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제개요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국가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온 군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군이 담당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발전과 한국군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군과 국가안보, ‘한국군과 경제발전, ‘한국군과 민주화, ‘한국군과 인력양성, ‘한국군과 군사문화’ 등을 규명한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2. 구술개요
공군 입대까지와 입대 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받은 훈련
비행기 조정 훈련과 한국전쟁 초기 상황
한국전쟁 초기 비행기 전투 이야기
한국전쟁 시 후방으로 밀렸던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조종과 정찰, 훈련 이야기
한국전쟁 후반기 티식스(T6)를 몰기까지
티식스(T6) 훈련과 에프오십일(F51) 임무출격 이야기
휴전 당시 두 가지 에피소드
조종사 임무 수행 이후 일과 생활
조종사 간의 관계와 철도 파괴 작전 관련
티에이시피(TACP) 활동
안 대위와 해방 후 훈련된 조종사 이야기
선배 조종사 이야기
건국호 구매운동과 비행기 월남, 월북 사건
월북사건과 공군 숙군과 북에 삐라 살포 관련
지리산 공비토벌 간접지원과 해인사사건의 내막
한국전쟁기 공군의 역할과 차단작전 폭격
백(100)회 출격과 조종사들의 폭격 과정과 거부
북한 야간 습격과 빨간 마후라 기원 관련
수원 전투비행대대장과 월남 시절 이야기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군 인식과 한국공군 중요성 강조
1회차 면담 / 2011-01-14 / 02:06:03
1. 면담개요
공군 입대까지와 입대 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받은 훈련
비행기 조정 훈련과 한국전쟁 초기 상황
한국전쟁 초기 비행기 전투 이야기
한국전쟁 시 후방으로 밀렸던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조종과 정찰, 훈련 이야기
한국전쟁 후반기 티식스(T6)를 몰기까지
티식스(T6) 훈련과 에프오십일(F51) 임무출격 이야기
휴전 당시 두 가지 에피소드
조종사 임무 수행 이후 일과 생활
조종사 간의 관계와 철도 파괴 작전 관련
2. 주요색인어
제이오씨(Joint Operation Center, JOC) 에프오십일(F51) 티식스(T6) 엘포(L4) 엘파이브(L5) 미그15 한국전쟁 공군 미군사고문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공군 입대까지와 입대 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받은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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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에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군사기지 징용을 했음. 해방된 다음해에 친척 덕분에 비행기 탈 기회가 있었음. 부모님은 대구에서 장사를 했음. 수창소학교를 졸업했음. 1949년 2월에 공군에 입대함. 김포에서 훈련 받다가 여의도로 감. 공군 모집 포스터가 난 걸 보고 지원했음. 같이 입대한 사람이 한 300명 정도 됨. 49년에 비행기 조종을 위해 26명이 훈련을 시작했다가 50년에 11명으로 줄어듦. 자질 없는 조종사를 도태시킴. 50년 초에 11명이 비행기를 타는 훈련생이었는데 6.25가 발발함. 훈련 비행기종은 L4였는데 주로 연락이나 정찰용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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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7:55 ~ 00:2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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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행기 조정 훈련과 한국전쟁 초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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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포(L4)와 엘파이브(L5)를 이용해서 훈련한 이야기. 비행기를 한번 타면 보통 5, 10분 정도 연료밖에 없고 비행기 대수도 적어서 한달 받을 훈련을 1년동안 받았음. 엘포와 엘파이브는 20대 정도 있었음. 이 20대가 한국전쟁 시 한국공군 전력의 거의 전부였음. 1949년 공군이 이 육군 항공대에서 독립된 이야기. 비행기 훈련 때는 미군고문관도 연관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훈련받은 선배들이 한국 조종사를 훈련시켰음. 구술자는 미군한테 훈련 받은 기억은 없음. 전쟁 전까지 50여시간 탔음. 이 비행기는 무기장착이 불가능했음. 북한군 야크기를 봤는데 비행기 공습이 처음이라 당황했던 에피소드. 한국전쟁 발발시 훈련생 신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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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40 ~ 00:4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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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한국전쟁 초기 비행기 전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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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발발했을, 발발직후에 기지가 폭격당한 이야기. 맥아더 장군을 보진 못했음. 대한민국의 공군이 오늘날 이렇게 육성된 거는 일제시대 군대지만 거기 갔다 온 사람들과 미군의 군사원조로 전투기를 준 덕분이었음. 수원비행장에서 구술자 본인은 야크기 공격을 받지 않았음. 여의도 상공에서 미군 비행기 에프팔십이(F82)의 뛰어난 성능 이야기. 미그 십오(15)하고 에프 팔십육(F86)의 성능 차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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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00 ~ 00:5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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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 시 후방으로 밀렸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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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포와 엘파이브 비행기 모두 복좌 구조였음. 남쪽으로 피난갈 때 본인은 기차를 타고 고참들이 비행기 타고 내려갔음. 후퇴해서 영천까지 갔다가 밀려서 대구 경마비행장으로 왔음. 엘포(L4) 경마장. 티식스(T6), 에프오십일(F51)이 동촌비행장. 엘파이브(L5)가 동명비행장에도 있었음. 구술자는 경마비행장에 있었음. 주로 중부전선 정찰활동을 했음. 인민군이 탱크의 기관포를 쏘지는 않았음. 정찰은 주로 메인도로 위주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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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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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조종과 정찰, 훈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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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부대는 대구에 있었음. 정찰전대에 소속됐음. 일련번호는 없었음. 일본에 가서 에프오십일(F51)을 이다즈끼에서 인수 해왔던 이야기. 하루 만에 가져온 것을 대단하게 여겼음. 정찰기 탔을 때 후방석에 앉아서 수루탄을 인민군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던졌음. 51년 2월부터 여의도에서 교과과정을 가지고 훈련을 하기 시작했음. 전투부대는 미군하고 같이 미군육일사륙(6146)부대하고 같이 평양까지 올라갔음. 에프오십일 비행기는 조종 미숙으로 사고가 많이 났음. 그래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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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31 ~ 00: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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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전쟁 후반기 티식스(T6)를 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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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8월달에 오퍼레이션 레디 인스펙션(Operation Ready Inspection) 오알아이(ORI), 작전검열을 받고 비행기도 미국에서 더 많이 받게 됨. 북진할 때 에프오십일 주무기는 네이팜 탄이 아니라 로케트와 폭탄이었음. 미군을 많이 썼으나 한국 비행사들은 우군이 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쓰지 않음. 민간인 지역을 불태우는 소각작전을 하지 않았음. 5인치 로켓트 위력이 강했음. 오십일(51)년 유(6)월부터 사천기지에서 티식스(T6)를 몰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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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21 ~ 00:3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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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티식스(T6) 훈련과 에프오십일(F51) 임무출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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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창기에 한국공군의 전력은 보잘것없었으나 점차 일본으로부터 군원을 받아서 강화됐음. 사천기지에서 티식스를 맡으면서 이제 기종전환 훈련을 단계적로 받았음. 선배들이 처음에 교관으로 가르쳐줬음. 오십일(51)년 시(10)월부터 에프오십일(F51)을 본격적으로 몰기 시작했고 주요 임무는 목표물 찾아 공격하고 오는 것이었음. 임무출격 횟수 관련 이야기. 북한군이 밥해먹는 연기를 보고 공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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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1:05 ~ 00:4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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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휴전 당시 두 가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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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노란색이 칠해져 있으면 휴전협정상 공격하면 안됐지만 공격을 한 적이 있었음. 제이오씨(JOC)에서 확인하여 처벌을 받으려 했으나 당시 미군과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관련한 입장차이로 이틀간 비행중지만 당하고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음. 미그기를 맞닥뜨렸다가 재빠른 회피동작으로 살아남았으며 당시 컨츄레일(contrail)이라고 제트기가 고공에 뜰 때 상황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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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1:16 ~ 00:5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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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종사 임무 수행 이후 일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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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격시 목표물 확인은 새벽이 제일 좋고, 정밀한 지도를 가기 때문에 목표물 조준이 정확함. 임무수행 이후 하루 일과는 대부분 술먹으러 갔음. 나창준 선배가 해주 임무 수행중에 죽은 이야기를 하면서 조종사 생활이 생명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불안한 삶임을 토로함. 미군들은 장교 클럽에서 술 먹고 총 쏘는 싸움이 많이 벌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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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1:21 ~ 01:0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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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조종사 간의 관계와 철도 파괴 작전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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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조종사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음. 52년 2월 달에 장교로 임관하여 강릉 갔음. 사관학교 생활은 따로 없었음. 계급이 중시되기보다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선후배와 친구 와 전우 사이 관계였음. 낮에 철도 교량을 부숴놓으면 밤 사이 전부 복구가 됐음. 열 번 중에 두세번 정도 차단작전을 했음. 타케트는 유엔 작전본부인 제이오씨(JOC)가 조인트 오퍼레이션 센터(Joint Operation Center)에서 명령을 하달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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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26 ~ 01:1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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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면담 / 2011-02-09 / 01:53:48
1. 면담개요
티에이시피(TACP) 활동
안 대위와 해방 후 훈련된 조종사 이야기
선배 조종사 이야기
건국호 구매운동과 비행기 월남, 월북 사건
월북사건과 공군 숙군과 북에 삐라 살포 관련
지리산 공비토벌 간접지원과 해인사사건의 내막
한국전쟁기 공군의 역할과 차단작전 폭격
백(100)회 출격과 조종사들의 폭격 과정과 거부
북한 야간 습격과 빨간 마후라 기원 관련
수원 전투비행대대장과 월남 시절 이야기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군 인식과 한국공군 중요성 강조
2. 주요색인어
유엔공군, 한국전쟁, 공비토벌, 숙군, 빨간마후라, 베트남전쟁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티에이시피(TACP)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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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이면서 육군에 육개월 파견 나갔음. 전폭기 폭격 유도를 위해 오사단 십오사단 오피(OP)에 나갔음. 날아오는 비행기에 대한 목표물 확인 작업을 하는 택티컬 에어 컨트롤 파티(Tactical Air Control Party, TACP)에서 활동했음. 통신병 하나 데리고 산에 가서 비행기와 교신하여 목표물을 확인시킴. 통신병은 계속 한명이 같이 활동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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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15 ~ 0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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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 대위와 해방 후 훈련된 조종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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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서 인민군들 초소나 진지의 목표물을 타켓으로 배정받았음. 목표물을 백퍼센트 조종사들이 맞추지는 못했음. 당시 포사령관 안대위와 친했는데 오일육 때 광주에서 살인사건 났을 때 죽었음. 기존에 다섯명 정도가 이천 시간 이상 비행을 했다는 사실은 잘못된 것임. 장덕창과 장성환 씨 정도가 이천 시간 이상 비행했음. 김정렬은 비행시간 별로 없었음. 이근석은 일제 강점기 특공대 출신으로 비행시간이 많은 편이었음. 일제시기 활동했던 장군들이 미국에 가서 비행기를 받아올 수 있었음. 김영환도 초창기에 비행기를 일본에 가서 미국 비행기를 인수받아 온 사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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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38 ~ 00:1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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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배 조종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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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은 중국 공군 출신인데 비행기를 별로 많이 안 탔음. 여의도에 처음 비행기를 타러 갔을 때 김영환, 김신, 장성환 세 사람이 비행 중대장이었고 이근석 장군이 단장이었음. 각각 인물들의 성격은 민항 출신은 점잖은 반면 군대 출신은 과격한 사람이 많았음. 전투중에도 상관과 부대원이 총 겨누며 싸우기도 했음. 왜냐하면 공군은 육군과 달리 선후배 간에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 김영환과 김신은 전투기 조종사인 반면 장선환 장군은 수송기 조종사 지휘관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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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56 ~ 00:2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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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건국호 구매운동과 비행기 월남, 월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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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기 헌납운동이라는 건국호 도입 관련하여, 49년 9월에 이승만 정권이 안정되어 가고 있을 때 공군의 필요성이 커져가고 있었지만 인식이 잘 바뀌지 않았음. 당시 건국호 구입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정부에서 티식스(T- 6) 건국호 열(10)대를 확보함. 그래서 10월 1일에 공군으로 독립함. 50년 4월에 아이엘 텐(IL
- 10)을 가지고 북한에서 이건순이 귀순함. 이후 이건순을 구술자가 데리고 있었는 또다시 북으로 넘어갈까봐 비행기를 태워주지 않았음. 한국전쟁 때 노금석이 미그십오를 타고 넘오왔는데 이때는 바로 한국공군에 안 오고 미국으로 갔음. 미국이 미그 십오기에 대한 분석에 관심이 많았음. 53년 4월에 김성배 대위가 에프오십일을 가지고 월북했는데 이유는 동료 사이에서 천대받는 것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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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39 ~ 00:3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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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월북사건과 공군 숙군과 북에 삐라 살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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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 전에 발생한 연락기 월북사건은 완전히 공산주의 사상에 따른 사건이었음. 일본군대 출신인데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된 사람들이었음. 박용호와 백 누구였음. 박용호는 대우를 잘 받았는데도 사상 때문에 넘어갔음. 사십구년 가을에 조종사들이 김창룡에게 11명 붙들려 가는 숙군이 공군에도 있었음. 동기생 중 박용만이 끌려 갔다가 나왔고 끌려갔던 10명 정도도 모두 돌아왔음. 삐라를 북에 살포하는 과정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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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8:42 ~ 00:4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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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지리산 공비토벌 간접지원과 해인사사건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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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공비 토벌 당시 연락기를 이용하여 육군 사령관을 태워주는 정도의 간접지원을 했음. 해인사 공격은 실제 팔만대장경 보호를 위해서였는지를 모르지만 실제로는 해인사 주변 인민군이 왔다갔다 해서 그것을 공격한 것이었음. 오알아이(ORI) 때문에 출동을 했으나 해인사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지는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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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09 ~ 00:5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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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기 공군의 역할과 차단작전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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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공군이 한국전쟁 시 낙동간 전선에서 북진과 휴전선 확보에 도움을 많이 줬음. 유엔공군의 낙동간 전선 융단폭격이 전장을 한국에 유리하게 했음. 그럼에도 육군은 공군의 역할을 무시했음. 공중화력지원이 매우 중요함. 원산 사리원 해주 평양 평강 등에서 자주 활동했음. 비행기가 뜨면 원산과 평양의 모습은 조용했음. 51년 하반기 주로 차단작전에서 폭격대상이 매일 바뀌었음. 미공군은 비이십육기로 매일 사진을 찍으러 다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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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1 ~ 00:1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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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100)회 출격과 조종사들의 폭격 과정과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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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기와 마주치념 도망을 갔는데 당시 조종사는 알 수 없음. 100회 출격을 알고 있었고 매일 출격 기록이 나왔음. 100회 출격 때 축하와 꽃다발을 받았음. 100회 출격 후 휴가를 줬고 일본의 창정비로 가서 장비를 얻어가지고 왔음. 비행기는 매일 배정됐음. 당시 비행하는데 죽음의 공포를 별달리 생각지 않았음. 비행 거부 사례는 당시 한국군에 없었음. 비행기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여 돌아오는 경우는 있었음. 폭격라인을 넘어 갔다가 그냥 돌아온 경우 폭탄은 모두 바닷가에 쏟아놓고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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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36 ~ 00:2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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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한 야간 습격과 빨간 마후라 기원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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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군의 피오투(PO- 2) 경폭격기의 야간 습격 사례는 없었음. 육이오 휴전 전까지는 마후라 종류가 여러 가지 있었음. 마후라는 비행복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것이었음. 전후 한참 후에야 공군에서 유행이 됐고 이후에 빨간 마후라 영화에서 제목으로 쓰임. 빨간 마후라 기원은 각자마다 달랐음. 비행 죽음에 대한 공포로 내무반에 있지 않고 강릉 시내에서 조종사들은 대부분 술을 마셨음. 오십오(55)년부터 오십팔(58)년까지 전투비행대대장을 할 때 에프 팔십육(F
- 86) 세이버(Sabre) 기를 몰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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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2:39 ~ 00:3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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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원 전투비행대대장과 월남 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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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버기는 이전까지 몰던 프로펠러 식과 작동법이 달라서 미 공군에 가서 교육을 보통 받는데 구술자는 한국 오산에서 미국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았음. 수원에서 한국공군의 최초 에프 팔십육(F- 86) 부대가 만들어졌음. 주로 미그기 대항 위한 훈련이었음. 1967년에 월남에 주월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가서 전투부대 공군 파경 전투부태 창설준비를 했음. 베트남에서 물자 이동은 사십육(C
- 46) 수송기로 했음. 공군이 공식적으로 참전했으나 전투병력만 파견되지 않았음. 월남에서 쪼롱이라는 동네는 중국촌으로 팔십 퍼센트 이상이 베트콩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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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44 ~ 00:4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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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회 구술 상세목록 |
구술시간 |
영상 |
1.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군 인식과 한국공군 중요성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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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장 구술자 사무실까지 베트콩이 들어왔었음. 베트콩은 미군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했는데 왜냐하면 베트콩을 잡으면 그 해골을 차고 다녔기 때문임. 반면 월남사람들은 한국사람을 좋아했는데 아마 기술자들이 월남에 많이 가서였을 수 있음. 일본인과 프랑스인에 대한 감정이 월남인들은 좋지 않았음. 78년도에 소장으로 전역함. 한국 공군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재인식 해주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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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3:29 ~ 00:5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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