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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조 (계약 사항의 변경 및 정보 보유/이용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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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계약 해지 제9조 (계약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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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 (자격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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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 서비스의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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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5.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게시, 게재, 전자메일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전송 하여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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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7. 정보통신설비의 오 작동이나 정보 등의 파괴를 유발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프로그램 등을 유포하는 경우
  9. 8. "연구원", 다른 회원 또는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
  10. 9.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 외부기관의 시정요구가 있거나 불법선거 운동과 관련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은 경우
  11. 10. 타인의 개인정보, 이용자ID 및 비밀번호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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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2. 전기통신 관련법령 등에 위배되는 경우
  14. 13. 본 약관을 포함하여 기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한 이용조건 및 관계법령에 위반한 경우

제4장 책임 제11조 ("연구원"의 의무)
  1. 1."연구원"과 제휴를 맺은 사이트와 "연구원"의 사이트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정보를 제휴 사이트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공유를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컴퓨터에 쿠키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2. 2. "연구원"은 "서비스" 제공으로 알게 된 "회원"의 신상정보를 본인의 승낙 없이 제3자에게 누설, 배포하지 않습니다. 단,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합니다.
    1.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 사업법, 지방세법, 소비자보호법, 한국은행법, 형사소송법 등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2. - 통계작성/학술연구 또는 시장조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서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
  3. 3. "연구원"은 "회원"의 전체 또는 일부 정보를 업무와 관련 된 통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4. "연구원"은 "서비스"가 계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부득이한 이유로 "서비스"가 중단되면 지체 없이 이를 수리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단, 천재지변, 비상사태, 시스템 정기점검 및 "연구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거나 중지할 수 있습니다.

제12조 (회원의 의무)
  1. 1.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관리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2. 2. "회원"은 자신의 아이디를 타인에게 양도, 증여, 대여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3. 3. 자신의 아이디가 부정하게 사용된 경우, "회원"은 반드시 "연구원"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합니다.
  4. 4. "회원"은 게시물에 등록된 데이터를 이용한 영업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5. 5. "회원"은 "연구원"이 보내는 공지 메일을 수신해야 합니다.

제13조 (회원의 게시물)
  1. 1. 게시물이라 함은 "연구원"의 각종 게시판에 회원이 올린 글 전체를 포함합니다.
  2. 2. 회원이 게시하는 정보 (및 질문과 대답)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이나 문제는 전적으로 회원 개인의 판단에 따른 책임이며, "연구원"의 고의가 아닌 한 "연구원"은 이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습니다.
  3. 3. 회원의 게시물로 인하여 제3자의 "연구원"에 대한 청구, 소송, 기타 일체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회원은 그 해결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연구원"을 위하여 분쟁을 처리하여야 하며, "연구원"이 제3자에게 배상하거나 "연구원"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회원은 "연구원"에 배상하여야 합니다.
  4. 4. "연구원"은 "회원"의 게시물이 다음 각 항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사전통지 없이 삭제 합니다. 그러나 "연구원"이 게시물을 검사 또는 검열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1. 1) 제3자를 비방하거나 중상 모략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우
    2. 2) 공공질서,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인 경우
    3. 3) "연구원"의 저작권, 제3자의 저작권등 기타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
    4. 4) "연구원"에서 규정한 게시기간을 초과한 경우
    5. 5) 상업성이 있는 게시물이나 돈벌이 광고, 행운의 편지 등을 게시한 경우
    6. 6) 사이트의 개설취지에 맞지 않을 경우
    7. 7) 기타 관계법령을 위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5. 5. "연구원"은 "회원"이 등록한 게시물을 활용해 가공, 판매, 출판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제5장 정보제공 제16조 (정보의 제공)
  1. "연구원"은 "회원"에게 필요한 정보나 광고를 전자메일이나 서신우편 등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회원"은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가입신청 메뉴와 회원정보수정 메뉴에서 정보수신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정보 수신 거부한 "회원"에게도 제13조5항의 "연구원" 공지 메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제6장 손해배상 및 면책 제14조 (책임)
  1.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연구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회원"에게 발생한 어떠한 손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2.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한 정보, 제품, 서비스, 소프트웨어, 그래픽, 음성, 동영상의 적합성, 정확성, 시의성, 신빙성에 관한 보증 또는 담보책임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제15조 (면책)
  1. "연구원"이 천재지변 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서비스"를 중단할 경우, "회원"에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제16조 (관할법원)
  1.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소송이 제기될 경우 "연구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법원 또는 대한민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른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니다.
  2. 본 약관의 해석과 적용 및 본 약관과 관련한 분쟁의 해결에는 대한민국법이 적용됩니다.

부 칙
  1. 이 약관은 2008년 10월 6일부터 시행합니다.

개인정보수집 및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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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Collection구술테마 컬렉션/경제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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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락 / 1931.09.02

생산기관 한국외대 면담자 홍현웅 면담자정보
검독자 이숙화 면담 총시간 10시간 33분40초
조회수 804 스크랩수 3
면담일(장소) [ 총5회 ]
  • 2013-07-02 (서울 종로구 내수동 구술자 자택)
더 보기 ▼
간략 소개

  • 구술자료 상세
1. 과제개요
1960~70년대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국제적 배경 및 외교적 동인에 대한 구술채록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동안 한국 경제성장과 관련된 외교적 측면의 연구 공백 및 문헌자료 상의 한계를 국내외 경제외교 관련 인사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수집․보완한다. 구술채록의 세부 영역에 대한 사전적 조사 및 체계를 수립함과 아울러, 국내외 관련 인사에 대한 방대한 사전조사를 기반으로, 문헌자료를 통해 얻기 힘든 배경 및 요인, 과정에 대한 상세한 구술을 채록한다. 아울러 1960~70년대 한국 경제정책과 연관된 세계 각국과의 외교에 대한 상세 내역을 관계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채록함으로써, 기존의 외교학 및 역사학 분야의 연구에서 확보가 어려웠던 사료군을 창출한다.
2. 구술개요
오일육(5·16)군사혁명 이후 한국경제 상황과 대미의존도에 대하여,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가 한국 경제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수출제일주의를 수정하고 내수공업 강화로 돌아선 배경에 대하여, 포항제철 설립 및 출자금에 대하여, 사(4)대의혹사건에서 워커힐사건, 빠칭코사건, 새한자동차사건에 대하여, 수입쿼터제 실시와 관련된 부정사건에 대하여, 경제협력국의 구조, 외자수급과 업무 및 외자도입, 차관증가에 따른 법률 개정 그리고 부실기업에 대한 대책, 박정희 대통령 독일방문과 고속도로 건설 배경, 외자도입 관리에 대한 정부의 계획, 한일 청구권 자금 지불과 관리, 부실기업 개선책 방안, IMF가 일어난 배경과 대책 그리고 국내외 상황에 대하여, 중화학공업 사(4)대사업 추진, 중화학공업 추진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시각,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관심과 경제지식, 오일쇼크 당시 국내 대책, 국제유가 상황 그리고 한국과 산유국의 관계, 청구권사절단장으로 일본으로 발령받는 배경, 석유화학공업, 오일쇼크, 경부고속도로건설, 새한자동차,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칼라 텔레비전, 삼(3)저호황, 공정거래위원회, 금융통화위원회, 동력자원부, 해외개발, 석탄산업, 카지노
1회차 면담 / 2013-07-02 / 01:51:38
1. 면담개요
공직자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 고향, 어린시절의 기억에 대하여, 중·고등학교, 대학교 생활에 대하여, 전시연합대학에서 공부했던 일에 대하여, 밴더빌트 대학으로 유학가서 겪었던 일들에 대하여, 오일육(5·16)군사혁명 이후 한국경제 상황과 대미의존도에 대하여,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가 한국 경제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수출제일주의를 수정하고 내수공업 강화로 돌아선 배경에 대하여, 포항제철 설립 및 출자금에 대하여
2. 주요색인어
밴더빌트 대학, 부산전시연합대학, 일민주의(一民主義), 대충자금, 팔삼(8·3)조치, 잉여농산물원조, 적산관리, 원조망국론, 한일회담, 청구권자금, 포항제철, 수출제일주의, 내수공업, 산업은행, 재건계획프로그램, 물동량.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최근생활과 건강에 대하여
  • 구술 시작 선언
  • 일상을 무료하게 지내고 있음.
  • 특별한 건강관리 없이 다소 불편하게 지내고 있음.
  • 전직 경제관료들과 모임을 하지만 활발한 편은 아님.
00:00:01 ~ 00:03:47 동영상 재생
2. 공직자로서의 길을 결심한 동기와 사명감에 대하여
  • 공무원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부흥부의 인재선발에 응시했다가 길을 걷게 됨.
  • 특별한 사명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님.
  • 현지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공직생활을 해왔음.
00:03:48 ~ 00:09:00 동영상 재생
3. 고향,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하여
  •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함.
  • 방학 때 집에 갈 때는 서울에서 용인까지 하루 종일 걸려서 도착했음.
  • 고향은 지금도 큰 변화 없는 작은 마을로 유지되고 있음.
  • 수리시설이 잘 되어있지 않아 논에 물대는 일로 마을사람들이 고생했던 기억이 있음.
00:09:01 ~ 00:15:32 동영상 재생
4. 고등학교 생활과 서울대 입학 동기에 대하여
  • 중앙중학교에서 근로동원에 의해 일하다가 해방이 되었음.
  • 해방 후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학교는 공부보다 싸움터가 되었음.
  • 미군정 하에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여전히 일본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함.
  •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지원은 아버지 추천으로 선택하게 됨.
  • 외조부께서 국회의원 입후보하여 선거 치루는 것을 보면서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야 겠다는 생각으로 정외과 지원함.
  • 명륜동에서 생활하면서 매일 서울대학교 앞을 지나다보니 자연스럽게 입학의 꿈을 키웠음.
00:15:33 ~ 00:26:34 동영상 재생
5. 육이오(6․25) 전시상황 하에서의 대학생활에 대하여
  • 서울대 입학하자마자 교사 수리를 했기 때문에 동창생들을 거의 모르고 지냄.
  • 전쟁으로 수원 소재 전시연합대학에서 육(6)개월 동안 수업을 하다가 부산 연합대학에서 수학함.
  • 대학 졸업 무렵 에스오(SO)학도병으로 훈련에 참석했다가 대학원 진학하는 학생은 군면제가 된다고 하여 대학원 입학하게 하게 됨.
  • 대학원 교재는 일본 서적으로 공부함.
  • 대학원 다니는 도중에 부흥부에 취직하게 됨.
00:26:35 ~ 00:35:32 동영상 재생
6. 대학생활 중 읽었던 책들과 동아리 활동에 대하여
  • 오일육(5·16) 이후 어지러운 정국으로 대학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
  • 학문적 관심보다 빨리 졸업해서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음.
  • 대학생 당시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학도가 꿈이었음.
  • 일민주의적 교육방침 하에서 새로운 역사관을 가질 수 없었고 흥미 위주의 학습을 함.
  • 교수 중심으로 서클활동이 생기면서 이용희 교수의 국제정치 스터디 그룹에서 정치학 관련 책들을 많이 읽데 됨.
00:35:33 ~ 00:49:39 동영상 재생
7.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 대하여
  • 밴더빌트 대학은 중부의 아이비리그로 불리우는 명문대학임.
  • 밴더빌트로 유학 가게 된 배경에 대하여
00:49:40 ~ 00:50:45 동영상 재생
8.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가 한국경제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을 생각 외에는 프라이어티에 대한 생각이 전무했음.
  •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로 밀이 들어오면서 제분업자들이 금전적 이익과 이득을 많이 봄.
  • 미국산 대규모의 밀을 수입하면서 국내의 밀 생산이 피폐해짐
  • 원조금으로 충당했던 대충자금은 한국산업화의 동력이었음.
00:35:32 ~ 00:45:17 동영상 재생
9. 포항제철 설립 및 출자금에 대하여
  • 철광석이 안 나는 우리나라에서 포항제철 설립은 무리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순서를 밟아가지고 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임.
  •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으로 지원하여 이루어진 사업임.
  • 산업은행의 포항제철 출자금이 약 삼십(30)퍼센트인데 포항제철은 정부로부터 빌린 돈이라는 생각이 없었음.
00:56:42 ~ 00:59:53 동영상 재생
1-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밴더빌트 대학으로 유학가게 된 동기와 미국의 인상에 대하여
  • 1958년 미국대학으로 유학 보내는 기술원조가 있어 부흥부 내에서 시험을 치러 밴더빌트 대학으로 유학허가를 받음.
  • 유학프로그램은 정확히 1년 간 진행되었음.
  • 미국행 직항로가 없어 동경
  • 시애틀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함.
  • 시애틀 공항에서 경유하는 동안 공항외부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문이 열리지 못해 한참 애먹었던 일을 겪고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불편한 나라라고 생각함.
  • 워싱턴에서 아파트의 기계자동화 된 모습을 보고 잘사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음.
00:00:01 ~ 00:11:12 동영상 재생
2. 네쉬빌에서의 경험과 학교 생활에 대하여
  • 네쉬빌은 조용한 도시로 영화에서 보던 느낌과는 달랐음.
  • 아스팔트 포장하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 한국의 생활수준과 비교하게 됨.
  • 한국은 적산관리가 있어 상당히 부패현상이 심했음.
  • 밴터빌트의 한 클래스 당 약 30명이 수업을 받았음.
  • 영어 트레이닝이 안 된 상태에서 유학을 갔기 때문에 언어문제로 난관이 많았음
00:11:13 ~ 00:18:50 동영상 재생
3. 밴더빌트에서 유학생활 중 경험했던 일에 대하여
  • 유학 경험으로 한국내 US AID 직원들과 친분을 쌓아 일하는데 수월했음.
  • 유학 생활 동안 각국 학생들과 운동을 하며 친교를 맺음.
  • 밴더빌트 근처 어느 초등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한국에 대한 강의를 했던 경험이 있었음.
  • 내셔널 데이(National Day) 기념으로 야구시합 도중 일본인 학생을 다치게 하여 지역신문에서 한일 국가 감정으로 오보했던 일이 있었음.
00:18:51 ~ 00:27:49 동영상 재생
4. 오일육(5·16)군사혁명 이후 혼란 상태와 산업의 대미 의존도에 대하여
  • 5·16 군사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상태에서 사회발전의 장기계획을 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음.
  • 부흥부에서 물동계획3개년계획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함.
  • 한국의 산업계획은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황이었음.
  • 사일구(4·19) 이후 재정적자 상황에서 한일회담이 급진전하게 됨.
00:27:50 ~ 00:35:31 동영상 재생
5. 수출제일주의를 수정하고 내수공업 강화로 돌아선 배경에 대하여
  • 오일육(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최고위원의 선택은 수출이 아니고 내수를 강화하여 민족자본 형성에 있었으나 미국의 압력에 의해 개방적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을 질문함.
  • 이승만 대통령의 자문기관으로 산업개발위원회를 두어 경제학 교수들로부터 자문을 받음.
  • 이승만 대통령 사비로 재건계획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수대체산업을 만들 계획이었음.
  • 최고회의에서는 수출유지로 정책을 바꿨으나 재정적 난관에 부딪혀 한일회담으로 방향을 잡은 것임.
  • 수출제일주의 기치 하에서 한일회담 청구권 무상자금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상금으로 돌아가지 않고 포항제철에 투자함.
  • 청구권 자금으로 구로공단, 울산공업단지를 세웠으나 경제성장은 결과적으로 마이너스 가까이 되면서 수출제일주읠 하되 경공업부분은 자족 수준까지 올려야 한다고 계획을 수정하게 됨.
  • 박충훈 씨가 수출중심으로 역점을 두어 수출에 성공은 했지만 원조자금을 착복한 부실기업 속출하게 됨. 팔삼(8·3)조치로 채무변제 조치를 했지만 포항제철에 더 투자했으면 수출은 더 빨리 되었을 것임.
00:45:18 ~ 00:56:41 동영상 재생
2회차 면담 / 2013-07-09 / 01:53:26
1. 면담개요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하여, 산업개발위원회의 경제개발정책 추진에 대하여, 오일육(5·16)혁명 직후 정국의 상황에 대하여, 상공부 수입과장직을 담당하면서 겪게 된 일에 대하여, 사(4)대의혹사건에서 워커힐사건, 빠칭코사건, 새한자동차사건에 대하여, 수입쿼터제 실시와 관련된 부정사건에 대하여, 경제기획원의 물자수급과가 상공부로 옮기게 된 배경에 대하여, 아이비알디(IBRD)주최 고급공무원 연수원으로 미국에서 유학하게 된 점에 대하여, 농업통계업무가 통계국이 아닌 농업국에서 계속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2. 주요색인어
미국원조, 경제개발계획정책, 산업개발위원회, 유솜(USOM), 물자수급과, 자유승인품목, 수입과장, 사(4)대의혹사건, 빠칭코사건, 새한 자동차사건, 워커힐사건, 녹다운(knock down), 통계국, 경제기획국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정책 배경에 대하여(1)
  • 1948년 정부수립이후 1959년 경제상황은 점점 나아지는 상황이었음.
  • 이한빈 씨가 재무부 예산국 제2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성과주의예산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예산의 체계화 및 국가재정에서 경제개발계획에 중심되는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게 됨.
  • 1955년 정부기구 개혁을 통해 미국원조가 들어오고 경제전망이 밝아지기 시작함
00:00:01 ~ 00:10:47 동영상 재생
2.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정책 배경에 대하여(2)
  • 유원식 대령이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하고 교수들을 중심으로 산업경제위원회가 구성됨.
  •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오억(500,000,000)불이 들어오면서 시장경제로 운영하느냐 관치경제로 운영하느냐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했음.
  • 원조자금은 조선은행에서 담당해서 관리하기로 결정됨.
  • 정부와 재계의 합의는 재정자립을 중심으로 농업과 산업의 균형발전을 도모할 것과 시장경제 쪽으로 줄거리를 잡아 정부에 건의하게 됨.
  • 장면 정부 당시 정치적 싸움의 극심화로 경제정책에 대해 제대로 정책추진이 불가능했음.
  • 미국에서 ICA라는 기구를 만들어 1954년부터 한국 원조가 시작됨.
  • 장면 정부는 1961년 중순부터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만든 경제개발삼(3)개년계획 안을 수용하여 경제안정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함.
00:10:48 ~ 00:25:07 동영상 재생
3. 장면 정부의 개혁정치에 대하여
  • 장준하 씨가 산업개발위원회의 한 파트를 담당하면서 새정부에 근간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혁명이 일어남.
  • 중석불 수출과 관련하여 부정사건이 일어나고 외화대출제도를 만들어 운영했지만 효과가 없었음.
  • 송인상, 신현확 씨를 주축으로 하여 경제부처가 정리되면서 경제개발 삼(3)개년계획을 추진하게 됨.
  • 양곡특별회계의 적자로 인해 통화량이 매일 늘어나고 환율이 매일 상승됨.
00:25:08 ~ 00:32:58 동영상 재생
4. 오일육(5·16)군사혁명 직후의 정국 상황에 대하여
  • 이코크에 참석하여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현실적 능력을 절감함.
  • 오일육(5·16)혁명 직후 정부 관료들이 혁명공약을 암기함.
  • 군사정부에서 경제개발오(5)개년 계획을 시행한다고 공표함.
  • 오일육(5·16)군사혁명 이후 육군보병학교를 제대한 학도병들도 군대재입대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음.
00:32:59 ~ 00:41:02 동영상 재생
5. 경제기획원이 만들어진 소식과 군 생활에 대하여
  • 언론을 통해 예산국을 기획처에서 재무부로 옮긴다는 뉴스를 듣게 됨.
  • 육군본부의 지시로 예전에 제대명령이 난 사람은 유효하다고 판정이 나서 다시 제대하게 됨.
  • 군대에서 사무용품이 부족하여 사병이 구입해 오는 것으로 조달하는 형편이었음.
00:41:03 ~ 00:47:20 동영상 재생
6. 상공부 수입과장직을 담당했던 당시 상황에 대하여
  • 제대 후 기획원의 경제협력국으로 재취업을 함.
  • 상공부 상무원 모집에 응모하여 상공부로 전출하여 수입과장을 맡게 됨.
  • 수출드라이 정책을 시작하면서 수입이 늘어나고 외화도피가 되면서 중앙정보부와 경찰 등에서는 상공부 수입과에 상주하는 현상이 생겼음.
00:47:21 ~ 00:53:43 동영상 재생
7. 사(4)대의혹사건 중 워커힐 사건에 대하여
  • 사대의혹사건이 터지면서 수입과장의 업무상 워커힐, 자동차, 빠칭코 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름
  • 워커힐 사건의 이면에 무역법 개정이 있었던 점.
  • 무역법 법률개정에는 장관을 대신하여 차관이 참석했음.
00:12:13 ~ 00:21:44 동영상 재생
8. 사(4)대의혹사건 중 새나라 자동차 사건에 대하여
  • 새한자동차의 녹다운(knock down)형식으로 자동차 부속품 수입하여 완제품으로 조립한 사실로 인해 조사를 받음.
  • 새한자동차에서 제공한 자동차를 받지 않았던 구술자.
00:21:45 ~ 00:26:43 동영상 재생
9. 수입쿼터제 사건으로 해임되고 경제기획원으로 옮기게 된 사정에 대하여
  • 수입쿼터제 사건에 연루되어 수입과장 직에서 해임됨.
  • 역대 수입과장들의 불행한 결말에 자극을 받고 기획원 국제수지 담당으로 자리를 옮겨 오(5)개년계획에 참여하게 됨.
  • 경제기획원 기구개혁으로 물자수급과장직을 맡았고, 당시 장기형 부총리와 김학렬 차관의 체제로 들어감.
00:37:18 ~ 00:45:41 동영상 재생
2-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수입과장 재직 시 빠칭코 수입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른 사건에 대하여
  • 수입과장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수입허가서를 검토하게 됨.
  • 아이엠에프(IMF) 사절단이 들어와서 한국경제는 처음부터 시장경제 자유화 방안을 권고함. 그러나 실제 경제는 정부주도로 진행됨.
  • 군정연장에 대해 박충훈 장관과 논쟁을 벌이면서 군정연장에 대한 반대의 뜻을 주장함.
  • 빠칭코 수입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출석하게 됨.
  • 수입과장을 속여서 학교 체육시설 도입을 사칭하고 빠칭코를 수입한 사실이 밝혀짐.
00:00:01 ~ 00:12:12 동영상 재생
2. 수입과장 전결로 수입품목이 결정되면서 허가품목제의 비리가 많이 발생하게 된 점에 대하여
  • 수입허가 품목은 자동수입품목과 상공부 수입과를 거쳐서 승인받는 허가품목 두 가지가 있었음.
  • IMF는 취지는 자유무역이므로 수입품목에 대해 자동승인품목으로 처리할 것을 권고함.
  • 허가품목 승인에서 수입과장 전결로 처리된 배경과 그로 인한 불법관행이 많아진 점.
  • 수입쿼타제를 실시하면서 수입과 직원에 의해 특정 기업에 독점이익을 제공한 사실이 있어 감사원이 감사를 받게 됨.
00:26:44 ~ 00:37:17 동영상 재생
3. 경제기획원 물자수급과에서 경제기획관으로 옮기게 된 배경에 대하여
  • 경제기획원 예산관리담당관을 맡았지만 실제 경제기획원 예산을 편성해본 적이 없음.
  • 유솜(USOM)이 만들어지면서 원조가 줄어들고 물자수습과의 업무도 줄어들었음.
  • 업무 감소로 물자수급관리를 상공부로 이관하고 경제기획관으로 발령받아 각 부처의 업무를 파악하게 됨.
00:45:42 ~ 00:50:19 동영상 재생
4. 농업통계법을 농수산부에서 계속 담당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 아이비알디(IBRD)주최 고급공무원 연수에 참여하여 미국유학길에 오름.
  • 미국연수 오(5)개월 뒤에 통계국장으로 발령받음.
  • 미국 통계국장의 초청으로 미국통계국을 방문함.
  • 국내에 농업통계법에 대한 논란이 있어 논쟁이 있었는데 미국 통계국장은 실용적 통계업무를 진행하도록 조언을 함.
  • 귀국 후 농업통계는 농수산부에서 그대로 진행하도록 조정함.
00:50:20 ~ 00:59:43 동영상 재생
3회차 면담 / 2013-07-17 / 01:53:32
1. 면담개요
통계국장으로 발령 후 담당했던 통계업무에 대하여, 경제협력국의 구조, 외자수급과 업무 및 외자도입, 차관증가에 따른 법률 개정 그리고 부실기업에 대한 대책, 박정희 대통령 독일방문과 고속도로 건설 배경, 외자도입 관리에 대한 정부의 계획, 한일 청구권 자금 지불과 관리, 부실기업 개선책 방안, IMF가 일어난 배경과 대책 그리고 국내외 상황에 대하여
2. 주요색인어
경제협력국, 민간차관, 공공차관, 외자도입, USAID, USOM, 차관망국론, 사채금융, 한비 사카린사건, 외자관리, 프라자협정, 고속도로 건설, KFW, 이불(伊不)차관, 김-오히라 메모, 신일본제철소, 부실기업 관리, IMF사태, 8․3조치, 경제기획원, 오일쇼크, 금융실명제도, 복지연금제도, KDI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3-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통계국장으로 발령 후 담당했던 통계업무에 대하여
  • 우리나라에서 처음 국부통계조사가 준비 중에 있을 때 통계국으로 발령 받음.
  • 통계에 대한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업무를 시작했음.
  • 여직원 2천명을 선발하여 통계업무를 관리하도록 했지만 업무효과 면에서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했음.
  • 통계치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발표문은 있었지만 실행준비가 미비하여 중간에 그치고 말았다.
00:00:01 ~ 00:11:43 동영상 재생
2. 경제협력국의 조직 구조에 대하여
  • 경제협력국의 기구는 3개과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가 나중에 외자도입이 늘어나면서 5개과로 재편됨.
  • 쌍용시멘트의 민간차관을 시작으로 외자가 도입되기 시작함.
  •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을 포함한 차관이 시작되면서 데모가 심해짐.
  • 북에 대한 미국의 견제, 민주화에 대한 개념으로 상업차관보다 공공차관이 유리했던 상황.
  • 한일수교이후 차관에 대해 국민적 반대가 심했고, 차관망국론까지 거론되었음.
  • 지불보증한 차관의 부정행위 문제로 장기영 부총리가 국회불신임을 받은 상황.
00:11:44 ~ 00:23:32 동영상 재생
3. 외자수급과 업무 및 외자도입에 대하여
  • 외자수급과는 20명 정도의 인원으로 업무 수행
  • 오개년계획의 ’외자도입 촉진 및 증가‘ 계획에 따라 처음 초반은 중석을 중심으로 수출, 투자가 이루어짐.
  • 농수산물 수출가운데 김 수입, 수출문제로 일본과 마찰이 있었음.
  • 재무위원장 김성곤, 재무 담당자 김진만, 부총리 세 사람이 동의에 따라 차관이 들어옴.
00:23:33 ~ 00:28:19 동영상 재생
4. 차관증가에 따른 법률 개정 그리고 부실기업에 대한 대책
  • 83년까지 1억 정도의 차관이 들어오면서 최고회의에서 차관 관련 법률을 개정함.
  • 은행대출법, 세법 등 차관 관련된 법의 개정이 많았음.
  • 차관으로 기계를 도입했으나 국내시장의 저축률이 낮고 내자부족으로 사채금융이 활성화 되기 시작함.
  • 현금차관이 도입되었고, 60년대 부실기업 정리하던 와중에 삼성의 한비 사카린 사건이 터짐.
  • 해외 기업들에게 한국투자를 홍보하기 위해 국제회에 참석함.
  • 미국이 채권국으로써 채무국에 대해 프라자협정을 체결하고 관리하는 조치를 취함
  • 외자관리 및 부실기업 정리에 대한 국내 여론이 일어남.
00:28:20 ~ 00:35:52 동영상 재생
5.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방문과 고속도로 건설 배경에 대하여
  •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방문을 하게 된 배경
  • 한미 안전계획합의(CCC)를 하면서 한미간에 갈등이 일어남
  • 케네디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던 점
  •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서 에르하르트 수상이 조언을 듣고 고속도로 건설을 기획하게 됨.
00:35:53 ~ 00:43:30 동영상 재생
6. 외자도입 관리에 대한 정부의 계획에 대하여
  • 장기영 부총리는 외자도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선호함.
  • 이불차관(伊佛借款)협정 후의 문제점
  • 차관도입이 늘어나면서 생겼던 문제점
  • 한일각료회담 정식으로 설립되면서 일본으로부터 공공차관이 본격적으로 들어옴.
  • 이코크의 차관액을 관리하기 위해 차관국에 조정관을 설치함. 한국 이코크 대표부는 백두신, 경제부총리, 미국 유솜처장의 협조로 진행이 됨.
  • 유솜 회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00:43:31 ~ 00:55:35 동영상 재생
3-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한일청구권자금 지불과 관리에 대하여
  • 한국에 대해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미국의 입장
  • 한일어업협정은 한일회담 당시 어업협력으로 체결되고 청구권 자금 제도가 생김.
  • 국교정상화로 한일 경제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됨.
  • 청구권 자금에 대해 김
  • 오히라 메모로서 타결지음.
  • 경제기획원에서 청구권 관리위원회를 신설하여 동경으로 사절단을 파견함.
  • 청구권 자금 마무리 당시 한국은 청구권자금 백서를 만들었음.
  • 일본에서도 청구권자금 백서를 만들다고 약속했지만 아직 발간되지 않고 있음.
  • 포항제철에 대해 전 세계가 반대한 이유
  • 신일본제철소의 포항제철 찬성으로 청구권 자금을 통하여 운영 가능함.
  • 60년대 후반 부실기업 관리
00:00:01 ~ 00:12:26 동영상 재생
2. 부실기업 개선책 방안에 대하여
  • 부실기업 대상업체 선정과 그에 따른 기업들의 대처 방식
  • 부실기업 정리를 위해 청와대에 제3경제 수석비서관을 만듦
  • 외자 도입에 대한 구술자의 의견
  • 외자도입에 대해 IMF는 자제를 권유하여 정부 요구 금액보다 적은 금액을 차관해 오도록 노력함.생
  • 차관을 제지하기 위해 타당성 조사와 민간연구기관에 레포트를 제출하도록 함.
00:12:27 ~ 00:22:38 동영상 재생
3. IMF가 일어난 배경에 대하여
  • IMF 직전 일본이 한국에 꿔준 단기자금들을 회수하기 시작했음.
  • 미국에서는 한국 국제수지 문제에 시비를 걸어와 한국 통화정책이 굉장히 어려움을 당했음.
  • 한국은행에서 제출한 한국 외환보유에 대한 레포트에서 외환보유고에 대해 특별히 신경 써서 구입해야 한다고 젼했던 점.
  • IMF가 일어나기 직전 두 가지 상황; 일본의 단기자금 철수, 부채가 너무 늘었던 상황과 미국 경제의 위축으로 혼란 계속, 팔삼(8․3)조치로 사채금융을 정리
00:22:39 ~ 00:32:58 동영상 재생
4. IMF 발생을 둘러싼 국내외의 상황
  • 브론버그 통신이 한국 경제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한국정부에서 대응을 했으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IMF가 올 줄은 상상도 못함.
  • IMF 이전에 경제 문제로 관료들간의 의견 교환, 정책들이 있었으나 낙관론에 근거한 관점이어서 시행효과는 미비했다.
  • 김영삼 정부 당시 안정화정책이 탁상공론 되어 부작용이 나기 시작했으나 대통령 자신은 경제 정책에 대해 잘 몰랐다.
  • 금융실명제 실시는 경제기획원에서 그전부터 계획하고 있었으나 김영삼 정부에서는 본래 취지를 정확히 파악 안된 상황에서 실시되었음.
  • 일본은 실명제 유용성보다 유지 관리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반대하는 입장
  • 김대중 대통령 말기 토지실명제를 실시하여 재벌들의 부동산 점유를 막는데 기여함.
00:32:59 ~ 00:47:39 동영상 재생
5. 경제기획국의 삼(3)차 오(5)개년계획 준비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 중화학계획을 실천할려고 하는 청와대의 정책에 따라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실천하기가 어려운 상황
  • 3차5개년계획표에 복지증진을 위해 복지연금 제도를 만들려고 기구개편했으나 정부 반대가 심함
  • 대통령 출장 갈 때 비행기 안에서 KDI직원과 잡담중에 KDI직원이 연금제도에 대해 추천을 하자 시작해볼 때가 됐다고 찬성함.
  • 5개년계획에서 고속도로 건설은 당초부터 계획한 상황이 아니었고, 박대통령으 독일방문 이후 현대가 맡아서 건설함.
00:47:40 ~ 00:59:57 동영상 재생
4회차 면담 / 2013-07-23 / 01:51:04
1. 면담개요
한국 경제개발에서 경제기획원의 역할과 기여, 사금융 대책과 중화학공업 추진, 중화학공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시작된 배경, 중화학공업 4대사업 추진, 중화학공업 추진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시각,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관심과 경제지식, 오일쇼크 당시 국내 대책, 국제유가 상황 그리고 한국과 산유국의 관계, 청구권사절단장으로 일본으로 발령받는 배경, 김대중 사건에 대하여, 프랑스 주불공사로 발령받았던 일에 대하여
2. 주요색인어
에까페(ESCAP), 사금융 대책, 중화학공업, 닉슨 독트린, 브래튼우드 체제, 주은래4원칙, 제3차경제개발5개년계획, IBRD, 경부고속도로건설, 포항종합제철, 차관, 수출진흥확대회의, 월례동향보고, 새마을운동, USAID, IMF, 경제기획원, OPEC, 부실기업, 주일경제담당공사, 청구권사절단, 김대중사건, 주불공사, 원자력발전소, ICOCK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4-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한국 경제개발에서 경제기획원의 역할과 기여에 대하여
  • 인도의 경제개발오개년계획은 구상은 뛰어났지만 실천방안이 없었음.
  • 한국은 대통령부터 프로젝트에 집중한 나라기 때문에 오개년계획이 시행계획까지 합친 상태임.
  • 한국 계획은 예산을 기획원에서 직접 집행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운영 가능했음.
00:00:01 ~ 00:08:12 동영상 재생
2. 사금융 대책과 중화학공업 추진에 대하여
  • 사금융 대책으로 장기영 부총리가 은행장을 소집하여 금리조정을 지시함.
  • 재무부의 지시에 따라 중화학공업, 5개년개발 중심사업에 은행융자를 하겠다는 뜻에서 기금마련을 지시했음.
  • 기금마련에 대해 기획원은 반대를 했지만 상당한 기여를 한것은 사실임.
  • 경제개발오개년계획과 관계없이 청와대와 경제기획원의 협의 하에 종합제철, 경부고속도로, 석유화학 공업을 추진하면서 5개년계획은 점점 실질적 역할이 없어짐.
00:08:13 ~ 00:16:47 동영상 재생
3. 중화학공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시작된 배경에 대하여
  • 닉슨의 금태환 조치로 브래튼우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함.
  • 중국의 주은래 4원칙 발표에 따라 중국의 대외경제정책이 무역제한, 외환제한으로 진행됨.
  • 국내의 차관증가로 빚이 늘고 국방강화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되면서 중화학공업 추진하게 됨.
  • 대통령의 뜻에 따라 오원철 씨가 중화학건설에 집중적으로 진행하면서 국가중심사업이 됨.
  • 경부고속도로는 IBRD도 승산이 없다고 지원하지 않는 것을 박 대통령이 내자를 동원하여 성공시킴.
00:16:48 ~ 00:27:16 동영상 재생
4. 중화학공업 사(4)대사업 추진에 대하여
  • 60년대 하반기부터 중화학공업의 4대 사업을 추진하게 됨.
  • 중화학공업의 중점 추진사항은 첫째, 기술개발, 둘째, 민간기업 사업자로 구성하여 추진됨.
  • 조선사업을 제외한 중화학공업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음.
  • 석유화학공업은 창원공단, 여수화학공업단지 등을 설립하면서 추진 됨.
00:27:17 ~ 00:33:35 동영상 재생
5. 중화학공업 추진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시각에 대하여
  • 제일차경제개발오개년 계획은 농업에서 경공업 중심, 수출중심이었기 때문에 중화학공업에 대해서는 개념 자체가 없었음.
  • 일본은 방위산업을 통해 전후 복구를 하고 고도산업화를 추진함.
  • 70년 초 경제발전성장이 급성장하면서 장래를 전망하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음.
  • 중화학공업은 계획 당시 경제기획원과 관계없이 청와대에서 추진한 사업임.
  • 종합제철은 박태준 씨가 군인정신으로 성공시킴.
00:33:36 ~ 00:44:40 동영상 재생
6.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관심과 경제지식에 대하여
  • 장기영 부총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 이후로 박정희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짐.
  •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는 수출지원 문제를 다루면서 효과적으로 진행되었음.
  • 중화학공업을 추진하면서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대한 회의는 대통령의 관심에서 멀어짐.
  •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지식은 수출진흥회의, 월례동향보고를 받으면서 발전한 측면이 있음.
  • 박정희 대통령이 농민생활 증진에 대해서는 지속적 관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
  • 가뭄지역 파악은 관료들이 아닌 농민들을 대상으로 검사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을 정도로 농업에 대해 해박했음.
00:44:41 ~ 00:54:12 동영상 재생
7. 오일쇼크 당시 국제유가 상황 그리고 한국과 산유국의 관계에 대하여
  • 오일쇼크 당시 경제기획원 실무자대책회의에 박 대통령이 갑자기 참석하여 당황하였던 일
  • 우리 석유산업은 미국의 석유회사와 관계있고, 사우디아라비아와는 직접 관계가 없었음.
  • 석유문제를 아랍과 직접 거래하지 않기 때문에 석유파동에 대해 항상 불안한 상태임.
00:14:14 ~ 00:25:51 동영상 재생
8. 청구권사절단장으로 일본으로 발령받는 배경에 대하여
  • 청구권사절단장으로 일본으로 가게 된 배경
  • 청구권사절단장 자리를 두고 기획원과 외교부가 대립함.
  • 청구권사절단장은 차관보 급에서는 보낸다는 원칙에 따라 구술자가 발령 받음.
00:25:52 ~ 00:31:03 동영상 재생
9. 청구권자금 사절단 활동에 대하여
  • 경제기획원사절단은 경제기획원에서 계속 임명함.
  • 청구권 자금 협상에 대한 일본 파트너는 청구권 자금을 가지고 종합제철에 투자하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음.
  • 청구권자금 전시회를 끝으로 정리함.
00:41:17 ~ 00:45:51 동영상 재생
4-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일(1)차 석유파동 당시 상황과 경제기획원의 대비책에 대하여
  • 박정희 대통령의 해박한 경제지식과 경제기여
  •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석유가격, 확보문제, 석유화학공업문제에 대해 고심하게 됨.
  • 각 부처의 직원을 모아서 석유파동 대책위원회를 구성함.
  • 박충훈 씨가 기획원 장관으로 발령받았으나 조직 장악력이 크지 못하고 종합제철에도 전력투구 하지 못했음.
  • 태완선 씨가 기획원 장관으로 발령 받아 종합제철 자금확보에 성공하지 못했음.
00:00:01 ~ 00:14:13 동영상 재생
2. 김대중 사건에 대하여
  • 청구권사절단장으로 발령 받아 일본에 도착했으나 김대중 사건이 대대적으로 일어남.
  • 김대중 사건은 당시 한국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얘기가 주류를 이루었음.
  • 김대중 사건에 대해 일본내 한국관료들은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였음.
  • 청구권자금을 총 정리하는 책임자로써, 청구권 자금은 모두 다 챙겨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됨.
00:31:04 ~ 00:41:16 동영상 재생
3. 프랑스 주불공사로 발령받았던 일에 대하여
  • 청구권자금 사절단장으로 업무 종결후 프랑스 주불공사로 나가게 됨.
  • 프랑스에서 원자봉 시설을 수입하고 기술보조도 받을 계획이었으나 이희일 대사의 반대에 부딪힘.
  • 프랑스에서 개최된 이코크(ICOCK)에 참석함.
00:45:52 ~ 00:56:52 동영상 재생
5회차 면담 / 2013-07-30 / 03:04:00
1. 면담개요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의 기능 및 박대통령 시해 전 상황, 최규하 대통령의 당선과 국보위의 활동, 전두환 대통령 집권 직후 내각 기구개편, 자동차 사업 통합에 따른 현대, 대우의 대립, 국보위의 지시로 직원감원을 진행했던 점, 상공부에서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발령받은 상황, 칼라 텔레비전 도입과정, 3저 호황과 함께 한국경제가 급성장, 미국의 공정거래법 시행 방식, 산업은행 총재 시절 산업은행 개혁추진 방안, 산업은행 본관을 롯데에 매각, 대한중기 부도처리,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추진했던 점, 동력자원부에서 추진하고 싶었던 과제, 석탄산업을 살리고자 노력한 점, 소비절약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 한국의 경제성장 원동력과 요인, 산업은행 본관 매각, 한국은행법, 한국은행 독립론
2. 주요색인어
유정회, 오일쇼크, 외자도입, 부마사태, 박정희 대통령 시해, 통일주체국민회의, 경제수석실, 자동차사업 통합, 석유화학공업, 오일쇼크, 경부고속도로건설, 새한자동차,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칼라 텔레비전, 3저호황, 공정거래위원회, IMF, 금융통화위원회, 동력자원부, 해외개발, 석탄산업, 카지노, 소비절약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5-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의 기능 및 박 대통령 시해 전 상황에 대하여
  • 국무총리행정조정실은 행정업무를 통합, 조정하지만 행정부에서 실제역할을 별로 없었음.
  •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의 상황; 정계혼란, 제2차 오일쇼크, 유정회, 부패극심, 국회에서 김영삼 의원 제적 등.
  • 부마사태가 일어나 국무총리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으나 청와대에서는 차지철 씨를 중심을 움직임.
  • 부마사태 등 노동문제는 외자도입에 지장이 있을까봐 탄압하는 상황이었음.
00:00:01 ~ 00:11:19 동영상 재생
2.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후의 상황에 대하여
  • 충남 당진 삽교천 기공식에 참가하러 가는 박정희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봄.
  •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 각의소집에 구술자가 참가하지 않은 이유
  • 10․26사태 직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각의 참석하여 긴급조치를 취함.
  • 10․26사태 소식을 접하게 된 경위.
00:11:20 ~ 00:20:26 동영상 재생
3. 최규하 대통령의 당선과 국보위의 활동에 대하여
  •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 대행의 주요업무는 장례식을 치르는 것임.
  • 통일주최국민회의를 통해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으로 당선.
  • 국보위를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면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령받음.
00:20:27 ~ 00:28:47 동영상 재생
4. 전두환 대통령 집권 직후 내각 기구개편에 대하여
  • 기구개편으로 청와대의 제1, 제2, 제3 경제수석실을 하나로 통하여 중화학공업, 부실기업정리 등을 총괄하게 됨
  • 신현확 부총리 중심의 내각이 구성되면서 조달청장 이선기 씨가 예정되어 있어서 구술자는 경제수석 일주일만에 상공부차관으로 발령받게 됨.
00:28:48 ~ 00:36:00 동영상 재생
5. 자동차사업 통합에 따른 현대, 대우의 대립에 대하여
  • 상공부 차관 발령 이후 석유화학공업 타결문제로 고심함.
  • 국보위의 지시로 대우, GM, 새한자동차의 3사 통합안을 작성하여 통합 추진함.
  • 자동차 3사 통합에서 정주영 씨가 우선 자동차 선택권을 가지겠다고 하여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음.
00:36:01 ~ 00:42:44 동영상 재생
6. 국보위의 지시로 직원감원을 진행했던 점에 대하여
  • 직원 감원 명령에 따라 장관의 해외출장으로 상공부 차관인 구술자가 대행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됨.
  • 감원직원을 색출하기 위해 투표형식을 통해 진행함.
  • 감원직원들의 불만이 심했음.
00:42:44 ~ 00:52:25 동영상 재생
5-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상공부에서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발령받은 상황에 대하여
  • 재무부와 상공부, 청와대 기획조정실에 자리 변동이 되면서 구술자도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이동하게 됨.
00:00:01 ~ 00:06:10 동영상 재생
2. 칼라 텔레비전 도입에 대하여
  • 농촌상황을 고려하여 청와대는 칼라텔레비전 보급을 금지함.
  • 문공부에서 칼라 텔레비전 방송을 허용하여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함.
  • 한국은 칼레 텔레비전을 미국으로 수출하면서 국내방영은 안하는 관계로 칼레 텔레비전 금수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혐
00:06:11 ~ 00:13:00 동영상 재생
3. 산업은행 본관을 롯데에 매각한 일에 대하여
  • 88올림픽 개최 당시 롯데가 산업은행 본관자리를 매입하여 호텔과 주차장으로 짓고자 계획함.
  • 산업은행은 관세청 앞의 터를 매입하여 이전계획을 세움
  • 산업은행 매각에 대해 국회의장, 전부총리 들이 찬성하여 최종적으로 매각을 결정하게 됨.
00:42:41 ~ 00:49:57 동영상 재생
4. 산업은행 총재시절 대한중기 부도처리에 대하여
  • 대한중기 제품의 품질이 나빠지고 경쟁자가 생기면서 자금운영이 불가능해짐.
  • 대한중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기시설 제작업체이므로 여러 사람이 회생시켜주기를 원했으나 기업상태로서는 복구가 불가능했음.
  • 당시로는 대한중기에 대해 부도처리를 했지만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있음
00:49:58 ~ 00:55:19 동영상 재생
5. 삼(3)저 호황과 함께 한국경제가 급성장한 점에 대하여
  • 3저 호황을 맞이하여 한국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함.
  • 공정거래위원회를 구성하고 '물가관리 및 공정거래에 대한 법률 초안 제정
  • 공정거래법에 대해서는 처음에 기업, 국회 등에서 모두 반대함.
  • 공정거래법에 대해 정주영, 박태준 씨가 찬성하면서 입법 통과가 가능했음.
  •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은 물가는 없고 공정거래에 관한 부분만 있음.
00:13:01 ~ 00:21:46 동영상 재생
6. 미국의 공정거래법 시행 방식에 대하여
    미국에서 공정거래법은 법무부 소관으로 운영되며, 전문 검사가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음.
  • 한국에서 공정거래법은 과대광고금지, 제품의 불공정성만 다루고 물가관리는 전혀 다루지 못했음.
  • 하봉수 기획조정관 조정실장이 기획조정실이 없어지면서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겸직을 하게됨. 이때부터 기획원에서 독립된 단체로 운영하게 됨.
00:21:47 ~ 00:31:11 동영상 재생
7. 산업은행 총재 시절 산업은행 개혁추진 방안에 대하여
  • 당시 산업은행 시설투자 부분이 60~70%로 감소하면서 우리나라 산업이 안정적 기조로 흐르고 있었음.
  • 장영자사거, 금융사고 등을 통해 산업은행 개편의 필요성 대두
  • 산업은행을 투자은행으로 만들어 시중은행과 융자융합을 구상했으나 정부가 찬성하지 않음.
  • 산업은행을 시중은행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시중은행이 반대하여 시행 못함.
  • 전 산업은행 총재가 산업은행 개혁안으로 투자은행을 만들자고 제안했음.
00:31:12 ~ 00:42:40 동영상 재생
5-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한국은행 독립론과 한국은행법 개정에 대하여
  • 당시 은행은 장영자 사건 등 부정대출 사고가 만연했음.
  • 한국은행의 실제 권한은 재무부장관에게 있어 한국은행으로서는 고유업무의 독립성이 없었음.
  • 학자들 사이에 중앙은행 독립론이 제기됨.
00:00:01 ~ 00:09:48 동영상 재생
2. 한국은행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추진했던 점에 대하여
  • 한국은행 창립 기념사를 통해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발표하자 각 언론 및 각계에서 지탄이 나옴.
  • 한국은행 독립론이 제기되면서 IMF가 독립론을 지지하고 세론도 지지를 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짐.
  • 한국은행의 위상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이 한국은행 총재를 겸직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함.
00:09:49 ~ 00:21:27 동영상 재생
3.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발령받고 추진했던 업무에 대하여
  • 부실기업 정리는 제일은행에서 발단이 되면서 동력자원부로 발령이 남.
  • 동자부는 상공부와 겹치는 업무가 많아서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업에 제한이 많았음.
  • 동자부 장관으로써 중점관심사는 첫째, 석탄처리문제, 둘째, 한국전력과 한국전업, 경성전기 세 회사에 대한 구조조정, 셋째, 해외개발이었음.
00:21:28 ~ 00:32:00 동영상 재생
4. 석탄산업을 살리고자 노력한 점에 대하여
  • 카지노 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석탄산업을 회복시키려는 생각은 없었음.
  • 석유공사의 석유기관관리 비리사건에 휘말리게 됨.
  • 광업자원개발공사를 만들고 산업은행의 융자를 받아 운용을 하다가 관리사장의 부정행위 사건이 있었음.
  • 우리나라는 소비억제 산업으로 가야하지만 실제 소비억제에는 관심이 없음.
00:42:55 ~ 00:53:38 동영상 재생
5. 소비절약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석유를 기본으로 세워진 것이라서 석유자원 소비절약을 해야 함.
  • 정부에서 석유절약을 위해 가로등을 끄는 일이 고작이었지만, 국민들 의식에는 소비절약에 대한 개념이 없음.
00:53:39 ~ 00:59:35 동영상 재생
5-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석유저장의 문제점에 대하여
  • 석유파동 이후로 동력자원연구소를 만들어 우리나라 4군데에 석유저장소를 만들어놓음.
  • 현재 석유 값이 100불 기준이고, 미국에서 쉘을 개발하여 석유값이 크게 인상할 요인은 없음.
  • 저장된 석유를 팔아 현금 활용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함.
00:00:01 ~ 00:05:57 동영상 재생
2. 동력자원부에서 추진하고 싶었던 과제에 대하여
  • 해외자원을 개발하고 석탄문제를 처리하도록 동자부 업무를 추진하고자 했으나 재정문제로 실현하지 못함.
  • 석탄산업진흥법을 만들어 남아있는 석탄산업을 일부나마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함.
  • 석탄광 폐공을 하면서 만들어진 조성금, 보조금은 사업단으로 넘기고, 카지노장을 만들어 광촌 수입을 증대시키기로 함.
00:32:01 ~ 00:42:54 동영상 재생
3. 한국의 경제성장 원동력과 요인에 대하여
  • 한국경제 발전에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중요한 부분이었음.
  • 엄청난 빚을 지고 경공업, 중화학공업을 일으켰지만 성공적으로 발전한 점.
  • 경제기획원은 개발 전반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이후로는 기여한 점이 적음.
  • 구술인터뷰가 개인생애를 중심으로 하지 말고 추진사업별로 진행을 하면 좋겠다고 조언함.
00:05:58 ~ 00:16:43 동영상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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