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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이 약관은 서비스 화면에 게시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공시함으로써 효력을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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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조 (약관 외 준칙)
  1. 이 약관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이 관계법령에 규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규정에 따릅니다.

제2장 회원 가입과 서비스 이용 제4조 (이용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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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조 (계약 사항의 변경 및 정보 보유/이용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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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계약 해지 제9조 (계약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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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 (자격상실)
  1. 다음 각항의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 "연구원"은 사전통보 없이 이용계약을 해지하거나 기간을 정하여 서비스 이용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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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 서비스의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한 경우
  4. 3.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을 고의로 유포시킨 경우
  5. 4. 회원이 국익 또는 사회적 공익을 저해할 목적으로 서비스이용을 계획 또는 실행하는 경우
  6. 5.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게시, 게재, 전자메일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전송 하여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한 경우
  7. 6. 수신자의 의사에 반하는 음란, 저속, 위협적인 내용이나 광고성 정보, 전자우편 등을 지속적으로 전송하는 경우
  8. 7. 정보통신설비의 오 작동이나 정보 등의 파괴를 유발시키는 컴퓨터 바이러스프로그램 등을 유포하는 경우
  9. 8. "연구원", 다른 회원 또는 타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
  10. 9.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 외부기관의 시정요구가 있거나 불법선거 운동과 관련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을 받은 경우
  11. 10. 타인의 개인정보, 이용자ID 및 비밀번호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경우
  12. 11. "연구원"의 서비스 정보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연구원"의 사전 승낙 없이 복제 또는 유통시키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경우
  13. 12. 전기통신 관련법령 등에 위배되는 경우
  14. 13. 본 약관을 포함하여 기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한 이용조건 및 관계법령에 위반한 경우

제4장 책임 제11조 ("연구원"의 의무)
  1. 1."연구원"과 제휴를 맺은 사이트와 "연구원"의 사이트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정보를 제휴 사이트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공유를 위해 "연구원"은 "회원"의 컴퓨터에 쿠키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2. 2. "연구원"은 "서비스" 제공으로 알게 된 "회원"의 신상정보를 본인의 승낙 없이 제3자에게 누설, 배포하지 않습니다. 단,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합니다.
    1.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 사업법, 지방세법, 소비자보호법, 한국은행법, 형사소송법 등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2. - 통계작성/학술연구 또는 시장조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서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
  3. 3. "연구원"은 "회원"의 전체 또는 일부 정보를 업무와 관련 된 통계 자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4. 4. "연구원"은 "서비스"가 계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부득이한 이유로 "서비스"가 중단되면 지체 없이 이를 수리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단, 천재지변, 비상사태, 시스템 정기점검 및 "연구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거나 중지할 수 있습니다.

제12조 (회원의 의무)
  1. 1.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관리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2. 2. "회원"은 자신의 아이디를 타인에게 양도, 증여, 대여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3. 3. 자신의 아이디가 부정하게 사용된 경우, "회원"은 반드시 "연구원"에 그 사실을 통보해야 합니다.
  4. 4. "회원"은 게시물에 등록된 데이터를 이용한 영업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5. 5. "회원"은 "연구원"이 보내는 공지 메일을 수신해야 합니다.

제13조 (회원의 게시물)
  1. 1. 게시물이라 함은 "연구원"의 각종 게시판에 회원이 올린 글 전체를 포함합니다.
  2. 2. 회원이 게시하는 정보 (및 질문과 대답)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이나 문제는 전적으로 회원 개인의 판단에 따른 책임이며, "연구원"의 고의가 아닌 한 "연구원"은 이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습니다.
  3. 3. 회원의 게시물로 인하여 제3자의 "연구원"에 대한 청구, 소송, 기타 일체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회원은 그 해결에 소요되는 비용을 부담하고 "연구원"을 위하여 분쟁을 처리하여야 하며, "연구원"이 제3자에게 배상하거나 "연구원"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회원은 "연구원"에 배상하여야 합니다.
  4. 4. "연구원"은 "회원"의 게시물이 다음 각 항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사전통지 없이 삭제 합니다. 그러나 "연구원"이 게시물을 검사 또는 검열할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1. 1) 제3자를 비방하거나 중상 모략하여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우
    2. 2) 공공질서,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내용인 경우
    3. 3) "연구원"의 저작권, 제3자의 저작권등 기타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
    4. 4) "연구원"에서 규정한 게시기간을 초과한 경우
    5. 5) 상업성이 있는 게시물이나 돈벌이 광고, 행운의 편지 등을 게시한 경우
    6. 6) 사이트의 개설취지에 맞지 않을 경우
    7. 7) 기타 관계법령을 위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5. 5. "연구원"은 "회원"이 등록한 게시물을 활용해 가공, 판매, 출판 등을 할 수 있습니다.

제5장 정보제공 제16조 (정보의 제공)
  1. "연구원"은 "회원"에게 필요한 정보나 광고를 전자메일이나 서신우편 등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회원"은 이를 원하지 않을 경우 가입신청 메뉴와 회원정보수정 메뉴에서 정보수신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정보 수신 거부한 "회원"에게도 제13조5항의 "연구원" 공지 메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제6장 손해배상 및 면책 제14조 (책임)
  1.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연구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회원"에게 발생한 어떠한 손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2. "연구원"은 "서비스" 이용과 관련한 정보, 제품, 서비스, 소프트웨어, 그래픽, 음성, 동영상의 적합성, 정확성, 시의성, 신빙성에 관한 보증 또는 담보책임을 부담하지 않습니다.

제15조 (면책)
  1. "연구원"이 천재지변 또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서비스"를 중단할 경우, "회원"에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제16조 (관할법원)
  1. "서비스" 이용과 관련하여 소송이 제기될 경우 "연구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법원 또는 대한민국의 민사소송법에 따른 법원을 관할법원으로 합니다.
  2. 본 약관의 해석과 적용 및 본 약관과 관련한 분쟁의 해결에는 대한민국법이 적용됩니다.

부 칙
  1. 이 약관은 2008년 10월 6일부터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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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Collection구술테마 컬렉션/경제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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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식 / 1934.09.18

생산기관 한국외대 면담자 정도영 면담자정보
검독자 정도영 면담 총시간 12시간 11분08초
조회수 2739 스크랩수 2
면담일(장소) [ 총5회 ]
  • 2009-12-04 (동부금융센터 34층)
더 보기 ▼
간략 소개

  • 구술자료 상세
1. 과제개요
1960~70년대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국제적 배경 및 외교적 동인에 대한 구술채록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동안 한국 경제성장과 관련된 외교적 측면의 연구 공백 및 문헌자료 상의 한계를 국내외 경제외교 관련 인사에 대한 구술채록을 통해 수집․보완한다. 구술채록의 세부 영역에 대한 사전적 조사 및 체계를 수립함과 아울러, 국내외 관련 인사에 대한 방대한 사전조사를 기반으로, 문헌자료를 통해 얻기 힘든 배경 및 요인, 과정에 대한 상세한 구술을 채록한다. 아울러 1960~70년대 한국 경제정책과 연관된 세계 각국과의 외교에 대한 상세 내역을 관계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채록함으로써, 기존의 외교학 및 역사학 분야의 연구에서 확보가 어려웠던 사료군을 창출한다.
2. 구술개요
한국의 경제발전에 있어 국가경영연구소, 경제교육프로그램, 예산부, 물가안정책, 수출주도, 중화학공업정책, 경제성장의 성과, 금융자율화 과정
1회차 면담 / 2009-12-04 / 02:31:34
1. 면담개요
최근의 근황에 대한 설명, 고향에 대한 기억과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 학창시절 및 공무원이 되게 된 계기, 한국은행의 입행과 시라큐스대학교로 가게 된 이야기, 공직생활중에 업무적으로 외국을 많이 다녔는데 그 때에 기억에 남는 국가에 대한 소개, 경제기획원의 대충자금계에서 일했을 때 대충자금에 대한 설명, 유학을 마치고 경제기획원에서의 활동, 총괄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의 활동, 예산업무전산화작업과 이코크총회, 예산국에서의 활동, EDI프로그램에서의 활동
2. 주요색인어
시라큐스(Syracuse University) 행정대학원, 『경제학 발전과 함께한 나날들』, 『가난구제는 나라가 한다』, 동부그룹, 부산, 국가경영전략연구소, JA코리아, 풍기, 부산고등학교, 멕시코 컨벤션센터, 양산ICD, 삼성승용차공장, 한국은행, 사법고시, 행정고시,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대통령특사, 아프리카, 중남미, 구소련, 모스크바 올림픽, WHO, 계획경제, 프랑스, 영미법, 대륙법, 마다카스라르, 에디오피아, 대충자금, 경제기획원, 세금, 유섬(주한경제협조처), ADB(아시아개발은행), 수입대체산업, 경제안정시책, 경제안정화정책, 수출주도형, 주계과, 예산국, 농수산투자예산과, 예산, 『비사 경제기획원 33년: 영욕의 한국경제』, 전산화, 공공차관, 민관차관, 경제협력국, 제네바, 이코크(대한국제경제협의체), 예산총괄과장, 키스트(한국과학기술연구원), PPBS, OMB(미국백악관관리예산처), EDI(세계은행 경제개발원)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1-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구술개요 및 준비
  • 구술장소, 구술 일시, 구술자, 면담자, 면담보조자 등 소개
  • 구술 준비
00:00:00 ~ 00:05:06 동영상 재생
2. 최근의 근황에 대한 설명(1)
  • 최근 시라큐스(Syracuse University)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음.
  • 저서중에 『경제학 발전과 함께한 나날들』이라는 책은 『가난구제는 나라가 한다』라는 책과 같은 내용임. 부산에서 선거용으로 급조해서 만든것이니, 본인의 저서 목록중에서는 빼주기를 요청함.
  • 2000년 낙선 후 정치쪽에 활동은 일체 안하고 있음.
  • 동부그룹에서는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음.
  •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연구소의 이사장 직을 맡고 있으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음.
00:05:07 ~ 00:15:46 동영상 재생
1-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최근의 근황에 대한 설명(2)
  • Junior Achievement Korea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교육사업을 하고있음. 이것은 비영리 단체이며, 아이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이해를 목표로 하는 단체이다.
  • 우리나라 아이들은 외국의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잘 하는 편이다.
  • 2007년부터 도자문화협회 활동을 하고있음.
00:15:47 ~ 00:31:45 동영상 재생
2. 고향에 대한 기억과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
  • 영주군 풍기면 풍기읍이 고향임.
  • 정감록의 십승지가 될 정도로 매우 살기 좋은 곳이며, 도전정신, 개척정신이 강한 마을임.
  •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누나가 있던 부산으로 내려가서 수정동 집 근처에 있던 부산고등학교를 입학.
  • 대통령 비서실장 지내고 난 후 전국구 국회의원 할 당시 정책중앙실장을 맡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산에 재정난, 용지난, 교통난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으로 부산에 내려갔는데, 본격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기능의 발전 쪽으로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을 만들어서 지역균형발전기획단장을 맡아서 여러 가지 활동을 약 2년정도 하게 됨으로서 부산으로 출마를 하게 되고 이로서 부산과의 인연이 시작됨.
  • 부산에 있으면서 멕시코 컨벤션센터, 양산ICD, 삼성승용차공장 등 여러 가지를 많이 바꾸려고 노력을 하였음.
00:31:46 ~ 00:44:51 동영상 재생
1-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학창시절 및 공무원이 되게 된 계기
  • 학교다닐때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었다. 학창시절에 미술, 음악 등도 잘 하였음. 고등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였는데, 형의 권유로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음.
  •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안가는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반드시 군대는 가야겠다는 생각에 학도병으로 군에 지원하여 연천 대광리에서 군생활.
  • 군 제대 후 고등고시를 보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동안 4․19혁명이 일어남.
  •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대학을 졸업한 후 사법시험을 먼저 본 후 행정고시를 보았음. 또한, 추천을 받아서 한국은행에 입행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였음. 고시도 합격을 했지만, 결국 한국은행에 입행하게 되었음. 당시의 입행동기로는 박승, 이경재가 있음.
00:44:52 ~ 00:52:42 동영상 재생
2. 유학을 마치고 경제기획원에서의 활동(2)
  • 『비사 경제기획원 33년: 영욕의 한국경제』이것은, 경제기획원사를 야사를 쓰고싶었는데, 정부로 들어가게 되어서 김흥기총재가 경제기획원사의 총책임을 맡게되었음. 결과적으로는 야사쪽은 많이 반영되지 않았음.
00:00:00 ~ 00:06:28 동영상 재생
3. 학창시절 및 공무원이 되게 된 계기(2)
  • 학교다닐때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었다. 학창시절에 미술, 음악 등도 잘 하였음. 고등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였는데, 형의 권유로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음.
  •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안가는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반드시 군대는 가야겠다는 생각에 학도병으로 군에 지원하여 연천 대광리에서 군생활.
  • 군 제대 후 고등고시를 보기 위해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동안 4․19혁명이 일어남.
  •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대학을 졸업한 후 사법시험을 먼저 본 후 행정고시를 보았음. 또한, 추천을 받아서 한국은행에 입행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였음. 고시도 합격을 했지만, 결국 한국은행에 입행하게 되었음. 당시의 입행동기로는 박승, 이경재가 있음.
00:00:00 ~ 00:04:13 동영상 재생
4. 한국은행의 입행과 시라큐스대학교로 가게 된 이야기
  • 한국은행에 입행을 해서 좋았던것은 월급이 다른곳보다 많았음. 하지만 이후 5․16이 일어나면서 은행원들의 월급이 매우 낮아졌음. 그러던 중 하동선이라는 유학동기 고시동기가 연락이 와서 재무부에 사무관자리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함. 따라서 1961년 11월에 재무부로 가게 되었다.
  • 시라큐스 대학교에 가게 된 계기는 원래 하기로 한 사람이 시험을 못봐서 그 대신으로 시험을 봐서 높은점수로 합격이 되어서 시라큐스 대학교에 가게 되었음. 후진국 관리들을 모아서 연수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으로 가게 된것임 그렇지만, 이왕 간 김에 행정대학원코스까지 입학하게 되었음.
  • 점차 영어에도 익숙해지고 많이 열의가 올라있었는데 총 36학점에서 30학점까지를 이수하게 된 상황에서 본국에서 다시 들어오라는 요청을 받음
  • 추후 시라큐스 맥스웰 행정대학원에 편지를 써서 석사학위증을 받게됨
00:04:14 ~ 00:17:18 동영상 재생
5. 공직생활중에 업무적으로 외국을 많이 다녔는데 그 때에 기억에 남는 국가에 대한 소개
  • 대통령특사로 아프리카, 중남미 등 후진국들을 약 40여개 정도로 많이 다녔음. 후진국에 가게되면, 옛날 1960년대의 우리나라 생각이 들었음
  • 가 본 나라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는 구소련이었음. 1980년도에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회의를 많이 유치를 할 때 WHO총회를 카자흐스탄에서 개최했었는데 당시에 우리 나라 경제운영방식을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꿔야 겠다는것을 본인이 고민을 하고 있을땐데, 그 때 총회에서 계획경제의 말로에 대하여 실감을 하게 되었음.
  • 선진국의 경제개발을 배우게 될 때 구소련과 프랑스는 매우 대조적인 경우임. 여기에서 국정폐쇄와 국정개방이라는것의 차이를 절실히 느끼게 됨.
  • 재무부는 프랑스와 일본, 경제기획원은 미국과 독일 방문.
  • 마다카스카르나 에디오피아를 갔을때에는 나라의 경제력, 경제수준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짐을 느꼈음.
00:17:19 ~ 00:28:00 동영상 재생
6. 경제기획원의 대충자금계에서 일했을 때 대충자금에 대한 설명
  • 1960년대 전반에 우리나라는 원조자금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음. 예를들어, 우리나라에 정유공장이 하나도 없이 모두 미팔군에서 얻어썼던 상황이었음. 따라서 원조가 없었더라면 당시에 우리나라는 견뎌내지 못했을 것임. 즉, 경제개발원의 사업도 모두 대충자금을 가지고 하였음.
  • 우리나라에서 세금이 걷히기 시작한것은 1960년대 후반에 이낙선 장관이 국세청장이 되면서 부터임. 당시 이낙선 장관은 자동차번호판을 700을 달고다닐정도로, 세금을 칠백억을 걷는것을 목표로 하였음.
  • 대충자금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쓸 때 유섬(주한경제협조처)와 합의를 해야함 하지만, 특별히 까다로운 점이 없이 다만 경제개발이외의 목적에는 쓰지 않도록 하였음.
  • 우리나라 경제개발시 중점적으로 했던 세부사항 중에는 ADB자금으로 경인고속도로를 하는것을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부족한 교실의 건설, 농촌의 수리시설 건설, 산지 개간, 항만 건설 등이 대충자금으로 사용되었음. 즉, 대충자금은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음.
  • 5․16이후 우리나라도 수입대체산업을 시작하는데 점차 재정적자가 커져서 1963년 즈음에는 엄청난 인프레가 발생하였음. 이 때 유섬(주한경제협조처)에서 경제안정시책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넣게 됨. 따라서 이 때부터 박정희대통령의 경제 정책인 수출주도형으로 바뀌게 됨.
00:28:01 ~ 00:40:43 동영상 재생
1-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유학을 마치고 경제기획원에서의 활동
  •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면 큰 일을 할 줄 알았는데 크게 맡는일은 없었음. 당시 주계과에 발령이 나서 근무를 하는데 최각규 투자예산과장이 예산국 농수산투자예산과 사무관 자리로 오라고 제의를 하여 받아들임.
  • 예산국은 예산편성할때는 바쁘고 편성이 끝나면 한가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공부할 시간도 많아서 그 때 공부를 여러 가지 많이 하였음.
  • 예산국에서 한국 정부의 예산 편성과정은 3월말에 내년예산 편성지침이 국무회의 의결을 받아서 5월 말까지 각 부처에서 예산요구서를 내면, 그 금액을 깎아서 가용자원에 맞춘 후 국무회의 의결을 맡아서, 9월에 국회심의를 받아서 12월 초까지 통과를 시키는것임. 만일 통과가 안되면 그 다음에 준비를 해서 예산집행이 들어가는것임.
  • 1977년에 1978년의 예산규모가 처음으로 일조가 되었음. 일조가 되고나니까 그 전보다 예산편성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음.
  • 박정희대통령이 지시사업을 많이 내리긴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 지시사업이라고 해도 반영안되는것이 많이 있었음.
00:40:44 ~ 00:52:45 동영상 재생
2. 총괄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의 활동
  • 1967년에 총괄사무관으로 재직하였는데, 나라에서 전체적인 예산을 배분할 때 세분야에 대한 기준에 의해 배분하는 기준은 없었음. 사업의 중요도에 따라서 예산이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수도 있는것이었음.
  • 예산총괄과장 때 예산은 예산재분류작업을 하고 전산화작업을 하게되는데, 이 전산화작업을 하게 된 근본 원인중에 하나가 예산편성하는 과정에서 예산항목의 분류가 안되있어서 예산편성의 전체적인 틀을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산화를 추진하였음.
  • 경제개발과정에서 외자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는데, 실질적으로 예산이라고 하면 예산국과 경제협력국 외자를 활용한 경제회복으로 이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00:06:29 ~ 00:15:18 동영상 재생
1-5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예산업무전산화작업과 이코크총회
  • 1970년 제네바에서 열린 이코크(대한국제경제협의체)회의에 참여를 했는데, 이것은 속된말로 표현하면 채권자회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준 나라들이 한국경제에 대해서 점검하는 회의이다.
  • 원래, 협력국쪽에 직원들이 이 회의에 참여해야 하지만, 유일하게 구술자가 참석을 한 경우였음. 그 이유는 예산업무전산화작업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음.
  • 예산총괄과정으로 발령이 되었을 때 키스트의 성기수박사와 고려대학교 안문석교수와 함께 엉망인 상태의 예산항목을 체계적으로 재분류 하기 위해 PPBS를 도입하여 예산업무전산화작업을 시작하였음.
  • PPBS란 국가의 기본목표를 다 써놓은 다음 국가목표에 따라서 단위사업별로 체계적으로 분류해 들어간 후 인푸트와 아웃푸트를 관리하는 책임이 분명하게 되도록 정리하는 작업임.
  •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가 발달이 안되있을 시기인데, ‘컴퓨터의 활용’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음. 이것이 추후 경제기획원의 특별보고로서 발표가 되어, 그것으로 인하여 박대통령이 앞으로 고등학교에서 컴퓨터교육을 하라는 지시까지 내리게 됨. 이 일로 김학렬 부총리가 굉장히 잘 보게 되어 보상으로 이코크총회에까지 보내주게 된것임.
00:15:19 ~ 00:30:02 동영상 재생
1-6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예산국에서의 활동, EDI프로그램에서의 활동
  • 예산국에서의 활동 중에 OMB(미국백악관관리예산처)에 구경을 간 적이 있다. 당시에는 미국의 예산업무전산화 수준이 우리보다 앞서지 않아 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앞서있었는데, 예산국장을 지내고 난 5년 뒤에 다시 가보았을때는 개인용 피씨를 모두 쓰고있을정도로 우리보다 훨씬 앞선 상황에 있었다. 따라서 예산업무전산화 사업 때 많은 직원들이 충분히 공감할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지 않고 작업을 한것이 매우 후회가 됨.
  • EDI(세계은행 경제개발원)프로그램에 6개월동안 참석하게 되었음. 그것은 송인상씨를 비롯한 매우 고위직 관리들이 갔던 것인데 1972년도에는 구술자가 혼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이것도 이코크 총회때와 마찬가지로 김학렬 부총리 덕에 참석하게 된 것임.
  • EDI(세계은행 경제개발원)프로그램에 일환으로 멕시코에 갔을 때에도 반면교사로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음
00:30:03 ~ 00:47:48 동영상 재생
2회차 면담 / 2009-12-10 / 02:33:15
1. 면담개요
물가정책국장으로 가게된 계기, 팔삼조치가 진행된 계기와 과정,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물가동향과 한국은행, 3%수치를 맞추기 위한 과정과 물가안정화시책에 대한 생각, 물가안정화는 허구이다, 석유파동,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대한 법률, 경제기획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과정과 활동,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의 자문단들과의 관계, 1975년도 당시의 상황
2. 주요색인어
예산국, 물가정책국, 8․3조치, 경제개발, 공장건설, 부실기업, 부실기업특별전담반, 대통령 긴급명령,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물가상승, KDI(한국개발연구원), 석유파동, 공정거래법,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 비계획사업,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KAIST, 국제수지전망표, Inflation, 중동의 건설붐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2-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구술개요 및 준비
  • 구술장소, 구술 일시, 구술자, 면담자, 면담보조자 등 소개
  • 구술 준비
00:00:00 ~ 00:02:46 동영상 재생
2. 물가정책국장으로 가게된 계기
  • 1973년에 예산국에서 물가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과정은 서석준 물가정책국장이 기획국장으로 옮겨가고 나서 자리가 비게되어 구술자가 승진이 되어 가게 된것이다.
  • 늘 예산관계에서 있다가 생소한 물가국에 가게됨
  • 물가국 국장으로 가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동향이나 물가쪽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00:02:47 ~ 00:08:30 동영상 재생
3. 팔삼조치가 진행된 계기와 과정
  • 팔삼조치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진행된것이다. 팔삼조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구술자는 예산쪽에서 근무를 할 땐데, 사치품같은 것들의 세율을 조정하고 재정경직성을 완화한다고 해서 지방교부세나 내국세 주는것을 없애는 등에 작업을 했었음.
  • 민간쪽에서 5․16이 났을때는 재벌에 대해 굉장히 적대적이었는데, 1960년대에 장기영 부총리가 되면서부터 수출주도로 바뀌고 또한 다함께 화해적으로 경제기획원 건설에 동참을 하겠다해서 함께 경제건설을 해가자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음.
  • 경제건설 하는 과정에서 내자가 없다보니 실제 민간쪽에서 적극적으로 경제 개발하는 사업에 참여를 하면서 민간차관으로 공장을 많이 건설하게 되었음. 즉, 돈 없이도 공장을 짓게 되니 많은 사람이 그 쪽으로 뛰어 들게 되었다.
  • 1960년대 후반기에는 전 세계에 경제자체도 상당한 호황기였기 때문에 너도 나도 이런저런 시설을 많이 했지만 1960년대 말 접어들면서 세계경기가 후퇴하며 건설쪽에서 부실기업화가 일어났다. 당시 외국에서 온 전문가가 “한국경제는 부실기업으로 망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하는 극단적인 얘기를 할 정도로 굉장히 경기가 안좋았다.
  • 따라서 부실기업을 정리하기 위한 특별전담반을 만들게 되었다. 기업을 관에서 주도한다는것 자체가 힘든것이었지만, 지금상태로 간다면 사채가 상당한 高利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 없는 상태가 오게되어 일종의 모라토리엄을 선포한것이 1972년에 8․3조치가 내려지게 된것이다.
  • 8․3조치를 통해 기업입장에서는 금리도 낮아지고 상환기간도 연장이 되니까 기업들이 도산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 하지만, 사채를 빌려준 이른바 중산층 쪽에서 상당히 큰 타격을 받게 됨. 따라서 정부에서는 금리를 낮추는 것에 대한 타당성으로서 물가를 3퍼센트 수준으로 안정을 시켜서 사채를 빌려준 사람에게도 손해가 없다는 논리로 진행하게 되었다.
  • 즉, 8․3조치로 인하여 물가국 쪽에서는 물가정책을 3퍼센트로 안정시켜야 할 절대절명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술자가 물가정책국장으로 가게 된것이다.
00:08:31 ~ 00:18:01 동영상 재생
4.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물가동향과 한국은행
  • 1973년 물가정책국장에 취임할 즘에 한국에 물가동향에서 지수같은것은 기억이 안나지만, 아마 10%는 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10%에서 3%로 떨어뜨린다 하는것은 매우 힘들었던 일이었다.
  • 한국경제에서 물가상승은 기본적으로 초과수요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모든 물자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왠만한 물건은 만들면 다 팔리는 상황이었는데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의 상황은 뭐든지 부족한 경기였다 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건설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통화량 가지고 물가를 조절한다는 것은 1970년대에 구술자가 안정화시책을 할 때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 물가정책국과 한국은행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물가대책회의를 할 때에는 한국은행에서는 반드시 참여를 한다. 하지만, 한국은행에서 물가 안정화를 위해 요구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00:18:02 ~ 00:29:11 동영상 재생
5. 석유파동(2)
  •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되어서 결국엔 석유파동까지 가게 되었음. 석유파동을 계기로 정부에서 통제했던 것들을 풀어주게 되었다. 어떻게보면 우리나라 당시의 상황에서 석유파동은 적시에 잘 왔다고 생각함.
  •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원자재값이 매우 올라가게 되었다. 따라서 품귀현상이 오게 되었다.
00:00:00 ~ 00:06:49 동영상 재생
6. 3%수치를 맞추기 위한 과정과 물가안정화시책에 대한 생각
  • 3%라는 수치에 대한 설정은 기억이 나진 않지만 KDI에 의뢰를 해서 KDI측에서 어떻게 하면 3%맞출수 있다는 전제를 주었음. 3%는 현실성, 실현가능성이라기 보다는 사채금리를 낮추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8․3조치를 한 다음해 8월달에 월간경제동향보고할 때 3%가 성공한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물가를 안정시켰다기 보다는 물가지수를 안정시켰다고 볼 수 있다.
  • 물가국장으로서 공산품값을 5% 낮추는 것을 진행하였다.
00:29:12 ~ 00:43:15 동영상 재생
7. 물가안정화는 허구이다
  • 물가안정화라는것은 실질적인것하고는 안맞는 허구라고 생각함. 하나의 물건이 품질이 떨어지고 양을 줄이고 반대로 가격을 올려버리니까 물가지수에 잡히는 물건은 생산이 줄어들게 됨. 즉, 눈가리고 아웅하는격이었음.
  • 즉, 물가를 통제한다는것 자체는 절대로 성립이 될수 없다.
  • 가격통제보다도 생산량을 늘릴수 있도록 공급을 확대해서 물가를 자동적으로 안정시키고자 하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이다. 따라서 당시에 통제정책은 경제학의 기본을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00:43:16 ~ 00:53:35 동영상 재생
2-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석유파동
  • 1974년도 중반 이후로 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원자재 값이 뛰기 시작하였음. 몇 년간 침체국면에 있던 세계경제가 1973년도 후반부터 1974년에 들어서면서 상승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5%물가안정 가격 인하를 하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지켜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당시부터 장사가 되기 시작하였다.
  • 지나고 보니까 8․3조치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경기부양책을 한다 했을 때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안하는쪽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정부가 경제부양책을 할 때쯤 되면 벌써 실제 경기는 부양국면에 들어갔을 경우가 많다. 즉, 선제적 대응이 되지 못한다.
00:53:36 ~ 00:58:18 동영상 재생
2.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대한 법률
  • 공정거래법은 가격에 대한 직접통제가 안되니까 경쟁을 촉진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따라서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생기게 되었다.
  • 법을 만들 당시 전윤철사무관을 물가국에서 스카웃하였다.
  • 다른 나라에 비해 조금 늦은 편인 1980년 공정거래법이 만들어 질 때 정상적인 국회가 아닌 입법회의에서 만들어졌다. 아마 정상적인 국회에서는 통과되기 어려웠을것이다.
  • 법을 만들 당시 일본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전문가 한사람이 “중앙집권으로 살아왔던 나라에서 시장경제라는것이 제대로 기능을 하기 굉장히 어렵다”라는 비판적인 코멘트를 했다. 일리 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 북한과 우리를 비교해서 우리나라가 시장경제를 꽃피울 수 있는것도 그와 같은 측면에서이다.
00:06:50 ~ 00:18:44 동영상 재생
3. 경제기획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과정과 활동
  • 기획차관보가 건설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기획차관보 자리에 서석준 기획국장이 앉게되고, 따라서 물가정책국장을 하던 구술자가 그 자리로 가게 된것임. 바로 시작한 일이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이었다.
  •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은 이때까지 경제개발계획과는 다른것이 ‘사회’라는 명칭이 들어가게 된것이다. 우리나라 발전단계가 경제만가지고는 안되겠고, 교육, 노동, 보건, 복지, 의료 이런분야가 달라지지 않고는 발전단계로의 진입이 힘들것이라고 생각함.
  •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의 경제분야에서 핵심적인것은 중화학공업니다.
  •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을 편성하는데 KDI의 도움을 받았다. 구술자는 중화학 부문에 돈을 너무 많이 써버리게되면 문제가 생기는것이 아닌가 고민을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쪽에 굉장한 치중을 두었음. 경제적인 필요도 있었지만 안보적인요인 같은 경제외적인이유가 더 컸다.
  • 중화학공업은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에서 먼저 시작한것이 아니다. 비계획사업에서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기획국장으로서 회의적이라고 생각했다.
  • 사차경제개발계획은 이전계획하고는 아주 다른 예산과 기획이 잘 조화된 경제개발계획으로 평가받는데, 실상을 아주 많이 반영한 계획이다.
00:18:45 ~ 00:34:07 동영상 재생
4.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의 자문단들과의 관계
  • 사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 편성시 유엔에서 50만달라를 지원받게 되었다. 이 돈을 어디에 쓸지 그리고 여러 가지에 대한 자문을 세계은행에서 추천한 전문가들이 각 분야별로 아젠다를 제시하였다.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따라서 물가국장으로서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것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그런면에서 4차경제개발오개년계획은 외국인 자문단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한다.
  • 사차경제개발계획을 진행하면서 직원들의 해외파견을 많이 추진하였다. 여행자금은 50만달러 안에서 쓰는것이지만, 가보고싶은 곳은 다 둘러보고 왔는데 그 결과 자체가 모두 오개년계획 안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여행자체도 직원들과 KDI와 KAIST가 모두 한 팀이 돼서 움직인 것이다.
  • 그 전까지만해도 KDI와 경제기획국하고는 거의 안면이 없었지만, 구술자가 기획국장이 되고 난 후 사이가 굉장히 좋아졌다.
00:34:08 ~ 00:48:05 동영상 재생
2-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975년도 당시의 상황
  • 1975년도 우리나라의 수출목표는 60억달라로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는 낮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달성된 금액은 50억달라로 10억달라가 미달된 금액이었다.
  • 기획국에서는 1주일에 한번씩 국제수지전망표를 만드는 어려운 작업을 하였다.
  • 1975년 당시 한해 수출은 안되고 전체적인 세계경제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경제가 어려웠던 한해였음. 따라서 오개년계획은 순조롭게 작업은 했지만 실제 경제운영면에서는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1997년도의 외환위기때와는 비교도 안되기 힘든시기였다고 볼수있다.
  • 그런 상황에서 중동에 건설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획국장으로서 그쪽분야에는 잘 모르고 지금 생각하면 중동쪽에 건설붐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 사실, 해외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에선 경험을 쌓아가는 단계인데 그나마도 미팔군이나 월남에서의 경험이 있어서 중동으로 건설사업을 벌려나가게 된것이 좋은 계기가 된것이다.
  • 중동의 건설붐은 석유파동이 없었으면 있을 수 없고, 석유파동으로 인해 수출은 안되는 대신 건설쪽으로 근로자들이 많이 나감으로서 송금해오는 돈들이 우리나라 외환수급으로 매우 도움이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전체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된것이다.
00:48:06 ~ 00:58:02 동영상 재생
3회차 면담 / 2010-12-20 / 01:56:20
1. 면담개요
기획차관부 활동 당시의 시대 상황, 안정화시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안정화시책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 안정화시책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시선, 남덕우 부총리와의 갈등, 안정화시책을 배경으로 한 농업부문의 전망,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의 정세변화
2. 주요색인어
기획차관부, 경제기획원, 안정화시책,케이디아이, 키스트, 통일벼, 경제위원회, 경제과학심의회, 다블에이치오, 월드 헬드 오르가니제이션, 프라이머리 헬스 케어, 팔삼(8.3)조치, 십이륙(10.26), 에프티에이, 육이오(6.25), 유알, 고민가정책, 월드뱅크, 변동환율제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3-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구술개요 및 준비
  • 구술장소, 구술 일시, 구술자, 면담자, 면담보조자 등 소개
  • 구술 준비
00:00:00 ~ 00:02:57 동영상 재생
2. 기획차관부 활동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하여 (1)
  • 활동 당시의 기획차관부 역할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을 계획할 당시의 정책적 변화 배경에 대하여
  • 5개년계획을 만들면서 안정화시책이 각 부분별로 경제운용에 바탕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에 대해 뜻있는 시기였다는 평가
00:02:58 ~ 00:09:10 동영상 재생
3. 기획차관부 활동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하여(2)
  • 기획차관부로 승진 배경과 업무기획의 배경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의 기획 과정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을 사이에 둔 주변인들의 반응에 대하여
00:09:11 ~ 00:26:21 동영상 재생
3-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안정화시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을 실현할 당시의 언론과 주변에서의 반응에 대하여
  • 각 정부부처를 설득하기 위한 슬라이드의 제작 과정에 대하여
  • 낙농업 산업과 관련한 안정화시책의 효율성에 대하여
00:26:22 ~ 00:42:43 동영상 재생
3-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안정화시책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의 필요성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했던 내용에 대하여
  • 기획차관부와 청와대의 마찰에 대하여
00:42:44 ~ 00:46:50 동영상 재생
2. 안정화시책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에 대하여(2)
  • 수출금융의 악용을 없애도록 조정했던 노력에 대하여
  • 가격안정대를 만들어 수출입을 운영했던 정부의 제도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과 관련하여 당시 청와대 입장을 대변했던 언론들의 반응에 대하여
00:00:00 ~ 00:18:26 동영상 재생
3. 안정화시책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시선에 대하여
  • 오공화국으로 이어지면서 제도적으로 보완되는 안정화시책에 대하여
  • 중복투자가 심했던 당시 중화학공업의 문제점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에서의 중화학투자조정 정책에 대하여
  • 중화학공업 정책과 관련한 이탈리아와 한국의 차이에 대하여
00:18:27 ~ 00:31:54 동영상 재생
3-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남덕우 부총리와의 갈등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남덕우 총리의 반응에 대하여
  • 프랑스로 출장 간 사이에 발표된 안정화시책의 변화 방향에 대하여
00:31:55 ~ 00:42:07 동영상 재생
2. 남덕우 부총리와의 갈등에 대하여(2)
  • <십이륙(10.26)> 이후 반대 부처의 소리가 없어져 구체적으로 많이 시행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00:00:00 ~ 00:00:30 동영상 재생
3. 안정화시책을 배경으로 한 농업부문의 전망에 대하여
  • 안정화시책과 관련한 에프티에이의 필요성에 대하여
  • 선택적 농업 운영을 실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 농사가 아닌 농외소득이 중요시되는 배경에 대하여
00:00:31 ~ 00:15:16 동영상 재생
3-5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의 정세변화에 대하여
  • 십이륙 당시의 안정화시책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하여
  • 팔십 년대의 시대적 혼란과 이에 대비한 안정화시책의 역할에 대하여
  •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과 안정화시책에 대하여
00:15:17 ~ 00:30:15 동영상 재생
4회차 면담 / 2010-03-04 / 02:31:32
1. 면담개요
기획차관부 활동 당시의 시대 상황, 안정화시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안정화시책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 안정화시책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시선, 남덕우 부총리와의 갈등, 안정화시책을 배경으로 한 농업부문의 전망,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의 정세변화
2. 주요색인어
기획차관부, 경제기획원, 안정화시책,케이디아이, 키스트, 통일벼, 경제위원회, 경제과학심의회, 다블에이치오, 월드 헬드 오르가니제이션, 프라이머리 헬스 케어, 팔삼(8.3)조치, 십이륙(10.26), 에프티에이, 육이오(6.25), 유알, 고민가정책, 월드뱅크, 변동환율제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4-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구술개요 및 준비
  • 구술장소, 구술 일시, 구술자, 면담자, 면담보조자 등 소개
  • 구술 준비
00:00:00 ~ 00:01:52 동영상 재생
2.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1)
  • 공무원과 대통령과의 관계였기 때문에 기억남는 일화라는것은 없지만, 박정희대통령은 선공후사가 매우 철저하신분이라고 생각한다.
  • 조국근대화나 경제개발에 있어서는 철권정치라고 표현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일해가는 과정은 매우 융통성 있는 분이었다.
  • 재벌들의 노하우를 경제개발 과정에 전부 활용하는 쪽으로 바꾼것만 보더라도 매우 실용주의적인 분이었다.
00:01:53 ~ 00:16:22 동영상 재생
4-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2)
  •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에 성공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을 받아드리고 수용함.
  • 이태리와 스페인의 중화학공업과 관련된 중화학문제를 민영화를 통해 효율적으로 관리한 예.
  • 가난 극복에 현실 속에서 부딪치면서 해결과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활용한 박정희 대통령.
00:16:23 ~ 00:23:39 동영상 재생
2. 국보위의 경제정책과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의 차이점
  • 국보위는 경제뿐만 아니라 통금해제, 과외철폐, 중화학공업 등 여러가지를 짧은 기간동안 해왔다. 그것은 신군부세력이 집권하기 위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조치 중에 일환으로 된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당시에는 사북사태, 학생들의 데모, 벼의 흉작, 제2차석유파동 등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약 10․26사건가 없었다면 경제에 대해 평가 자체가 매우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 10․26이후 신군부가 나오고 이러한 정치불안 속에서 그것들이 맞물려들어가서 박정희대통령의 경제성과가 큼에도 불구하고 그 공적과는 매우 언발란스된면이 부각되었다고 생각한다.
  •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국민정서 자체를 ‘하면된다’로 바꿔놓았다 이 자체가 매우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모한 중화학건설 시도로 국민경제에 부담을 지워줬다.
  • 10․26사건으로 인하여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뭍혀버린것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평가 받아야할것은 못받고 비판방아야 될것이 오히려 뭍여진것들이 많다.
00:23:40 ~ 00:34:04 동영상 재생
3.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에 대한 전개과정
  • 구술자 또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 국보위에서나서서 지휘했던것에 대한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정부가 앞장서서 하는것은 반대이다. 그러한것들은 시장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해줬어야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통상성도 총의방식으로 진행해나갔지 직접 지휘를 하지는 않았다.
  •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부실기업정리문제까지 이어졌다. 전개는 약 7년정도가 되야 정상화가 되는것이었는데 그것을 미리미리 준비를 했었으면 과외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충분히 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00:34:05 ~ 00:42:47 동영상 재생
4. 예산실로 격상된 이야기
  • 기획차관보가 되며 예산실의 직계를 1급으로 올려야한다는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후임자인 김용환씨가 초대 예산실장이 되었다.
00:42:48 ~ 00:46:13 동영상 재생
4-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983년도 관세제도 개편과 금융개혁(2)
  • 내무부장관이 되며 목표로 삼았던 것은 첫째 세제개혁, 둘째, 관세개혁, 셋째 금융개혁이었다. 하지만, 아웅산테러사건으로 인하여 정부의 직제가 개편이 되며, 구술자는 재무부장관이 되기를 원했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직제가 바뀌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금융개혁은 진행되지 못하였다.
00:33:21 ~ 00:50:15 동영상 재생
4-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980년대 제 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5차계획은 1980년에 실질적인 계획짜기는 다 끝났다. 다만, 당시 10․26사건 이후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시도를 못했고, 그것들이 해결이 되고 난 이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을 돌아본 후 5차계획을 ‘유도계획’ 방식으로 바꾸었다.
  • 최소한 5차계획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각 부문계획을 만들 때 관계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토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쪽의 효과가 컷다고 생각한다.
  • 이 때 역점을 둔것은 안정화시책을 하며 시장경제로 돌아가는것이었다. 이것또한 각 부문계획에서의 공감대를 형성해냈다.
  • 이것이 바로 제 5공화국의 경제정책의 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당시 5차계획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업계였다. 업계에서 5차계획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것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알려지게 되는데 당시 전두환대통령은 경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이곳저곳의 얘기를 듣다보니 이 때 혼선이 오게 되었다.
  • 하지만, 결국 전두환 대통령의 결정으로 5차계획은 진행되게 되었다. 국가지도자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5차계획에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의 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가가 매우 인색한것에 대해 안타까움이 있다.
00:46:14 ~ 00:53:26 동영상 재생
2. 1980년대 제 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2)
  • 5차계획은 1980년에 실질적인 계획짜기는 다 끝났다. 다만, 당시 10․26사건 이후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에 시도를 못했고, 그것들이 해결이 되고 난 이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을 돌아본 후 5차계획을 ‘유도계획’ 방식으로 바꾸었다.
  • 최소한 5차계획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각 부문계획을 만들 때 관계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토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쪽의 효과가 컷다고 생각한다.
  • 이 때 역점을 둔것은 안정화시책을 하며 시장경제로 돌아가는것이었다. 이것또한 각 부문계획에서의 공감대를 형성해냈다.
  • 이것이 바로 제 5공화국의 경제정책의 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당시 5차계획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업계였다. 업계에서 5차계획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것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알려지게 되는데 당시 전두환대통령은 경제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이곳저곳의 얘기를 듣다보니 이 때 혼선이 오게 되었다.
  • 하지만, 결국 전두환 대통령의 결정으로 5차계획은 진행되게 되었다. 국가지도자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5차계획에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의 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가가 매우 인색한것에 대해 안타까움이 있다.
00:00:00 ~ 00:05:49 동영상 재생
3.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평가
  • 보통 5공화국에 대한 평가를 김재익 수석으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김재익 수석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거은 무용지물이다.
  • 즉, 전두환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한것은 국보위시절 전두환 정권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말하는 평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10․26을 완전히 걷어내고 전두환대통령을 평가해야된다고 생각한다.
00:05:50 ~ 00:12:19 동영상 재생
4. 1980년대의 경제 안정화와 이철희․장영자사건(1)
  • 1981년 말 차관보로 들어갔을 당시 이철희․장영자사건이 일어나서 온 나라가 들썩이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명성사건, 영동진흥사건 등 대형사고들이 많이 있엇기 때문에 그것들을 처리하는데 바빴다.
  • 이러한 여러가지 사건들은 inflation시절에 경제가 안정화로 접어들면서 생기는 여러가지 파열음이었다.
  • 1980년도에는 안정화시책과 반안정화시책이 매우 대립했던 시기였지만 이것은 5차계획을 겪는동안 제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 방향을 잡으며 1982년도에 물가를 한단계씩 올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비록 선거를 앞두고 이었지만 정부의 세출예산동결, 추곡수매가격동결, 노임동결안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르고 밀고나간것은 대통령이었다.
  • 이철희․장영자사건 등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대책은 예적금비밀보장이라는 법을 없애야 하는것이었다.
  • 구술자는 5차계획이 아닌 4차계획 때 금융실명제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4차계획 5차계획 모두에도 반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재무부에서의 논의를 통하여 금융실명제의 구상을 짜서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00:12:20 ~ 00:26:25 동영상 재생
4-5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1980년대의 경제 안정화와 이철희․장영자사건(2)
  • 금융실명제의 논의가 발표되고 난 후 재계에서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지게 된다. 하지만 점점 반대쪽으로 의견이 종합되게 된다.
  • 금융실명제를 대통령긴급명령으로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 예적금비밀에관한법률은 폐지된것으로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다.
00:26:26 ~ 00:47:51 동영상 재생
2. 1980년대의 경제 안정화와 이철희․장영자사건(3)
  • 금융실명제의 논의가 발표되고 난 후 재계에서는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지게 된다. 하지만 점점 반대쪽으로 의견이 종합되게 된다.
  • 금융실명제를 대통령긴급명령으로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 예적금비밀에관한법률은 폐지된것으로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다.
00:00:00 ~ 00:05:09 동영상 재생
3. 금융실명제
  • 구술자가 추진하려고 했던 금융실명제는 금융자산소득에 대하여 종소합산을 하기 위하여 추진하였던 것이다.
  • 금융실명제에 대하여 노태우 대통령은 매우 반대했던 사람 중에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후 금융실명제를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는데 아마 문희갑 수석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바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구술자가 추진하려고 했던 금융실명제와는 전혀 다르다. 구술자는 ‘세제개혁’측면에서 였고, 김영삼 정권이 추진하려 했던것은 ‘사회개혁’측면이었다.
00:05:10 ~ 00:21:02 동영상 재생
4. 1983년도 관세제도 개편과 금융개혁(1)
  • 당시에는 수입개방하면서 관세제도가 국산화가 되어있는 것과 안 되어있는 것의 편차가 매우 컸다. 국산화 안 되어있는 것은 제로관세, 국산화가 되어있는 것은 관세가 100%가 넘는 등 매우 편차가 컸다.
  • 구술자는 국산화가 안 되어있는 것일수록 관세를 높게 정해야 국내에서 그것을 개방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또한, 국산화가 되면 관세를 낮춰서 오히려 경쟁을 시켜서 품질개선과 원가절감을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결국, 관세율을 낮추는 안을 진행하여 성공하였는데 이로 인해 우리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10%의 경제성장이 오고 물가안정이 되는 것 자체가 이것이 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00:21:03 ~ 00:33:20 동영상 재생
5회차 면담 / 2010-03-11 / 02:38:27
1. 면담개요
정계 입문 배경과 외환위기 이후 관직 복귀 배경, 당시 경제 상황과 한국금융의 부실요인들에 대한 금융시장안정대책과 태국의 금융위기와 한국과의 연관성, 부도유예협약과 기아그룹문제와 IMF와의 협의 과정 등을 구술
2. 주요색인어
부산, 국제신문사, 삼저효과, 플라자 합의, 한보그룹, 한보그룹부도, 금융시장, 국제수지, 외환시장, 안정화, 금융개혁법안, 삼보증권, 부도유예협약, 환율, 외환보유고, 금융실명제, 긴축정책, 적자재정, 추가경정예산, 종금사, 금융개혁위원회. 신사협정, 삼미그룹, 진로그룹, 기아사태, 삼성음모설, 금융시장안정대책, 태국, IMF, 한국경제평가단. 경제부총리, 케인즈주의
3. 구술 자료 상세 목록
5-1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구술개요 및 준비
  • 구술장소, 구술 일시, 구술자, 면담자, 면담보조자 등 소개
  • 구술 준비
00:00:00 ~ 00:03:07 동영상 재생
2. 정계에 입문하게 된 배경
  • 팔십(80)년대 전반의 시장경제로서 전환으로 물가안정과 대외개방을 한 것에 대한 중요성
  • 정치에 관심이 없다가 공직선상의 연장으로 진출하게 된 정계
  • 정치의 중요성과 ‘정치는 현실이다’라는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구술
00:03:08 ~ 00:13:13 동영상 재생
3. 다시 관직으로 복귀하게 된 계기
  • 정치를 하면서도 계속 ‘관리’로의 생각을 못벗어났기 때문에 다시 입각을 하였음. 또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천을 함.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복귀를 못하고 있다가 1997년도에 경제위기를 맞이하고 나서는 ‘공인으로서 도리’라고 생각하여 복귀하게 되었음.
  • 당시 주변에서 많이 만류했지만, 신현확 총리와의 상의를 통해 복귀를 결정. 이것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음.
  • 하지만,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대때의 국회와의 관계와 착각을 하였음. 본인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금융개혁법안이 바로 통과가 되었다면 외환위기는 겪지 않았을것임. 즉, 국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정부에 없다는것을 간과
00:13:14 ~ 00:25:00 동영상 재생
4. 대기업 부도처리에 대한 원칙
  • 삼보증권과는 달리 한보그룹은 단순한 금융부도사건이 아닌 형사문제가 되다보니 관계 정치인들이 구속되는 등 상당한 데미지를 겪음. 이것은 당시 국정 최고 책임자의 미숙한 국정운영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제문제는 형사문제화 시키면 안된다고 생각.
  • 기업의 부도란 일부러 부도를 내려고 해서 나는것이 아니라 미숙한 운영으로 인하여 나게 되있는 것. 즉, 대기업 부도처리원칙이라는것이 특별히 있는것이 아니라, 부도가 난 후 정리를 잘 하면 되는 것.
00:25:01 ~ 00:32:24 동영상 재생
5. 1997년 3월 취임 이후 진행한 긴축정책을 골자로 하는 경제운영관리와 금융실명제
  • 취임 후 급하게 시작한것이 환율문제였다. 외환보유고가 부족하니 빌려오는 대책을 취하는것으로 정신없이 지냈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국제수지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수입을 줄이는 것
  • 당시 이를 위해 예산실에서는 적자재정 편성과 추가경정예산의 편성을 꾀하고있었는데 이를 반대하고 현재의 세출예산을 줄이는 쪽으로 하고 일반 국민들에게도 대대적인 소비절감운동을 하게 하였다. 여당(黨)과의 의견충돌도 있었지만 관철시킴.
  •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지정해놓을 정도의 금융실명제 이지만 사실 당시 본인에게 있어 금융실명제는 우선순위의 밖에 있었음. 그러다보니 김영삼 대통령과도 의견충돌이 있었음.
00:32:25 ~ 00:41:49 동영상 재생
5-2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양호한 편이었는데 유독 외환문제가 나빠지게 된 요인
  • 당시의 경제가 양호하다고 생각하는것이 문제. 우리나라의 종금사들의 무리한 해외진출로 인한 단기부채가 급상승하게 되었음. 이것을 외환보유고로 해결을 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연간 운영계획이 계속 적자가 날때까지 여기에 대한 국제수지 방어대책을 전혀 하고있지 않은 상태였음.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하니까 1997년부터 기업들의 줄도산이 일어났음. 이것이 외환위기랑 직결이 되었음.
  • 이때부터 유동화를 시작하여 외환보유고를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2달 사이에 경제가 안정되고 금융시장도 안정이 됨
00:41:50 ~ 00:48:15 동영상 재생
5-3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부도유예협약과 기아그룹문제(1)
  •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부도를 내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 삼미그룹이나 진로그룹 등이 부도가 나는 것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 최대한 부도를 막기 위하여 영국의 ‘신사협정’을 채용하여 ‘부도유예협약’을 만들었음.
00:00:00 ~ 00:16:52 동영상 재생
2. 한국금융의 부실요인들에 대한 금융시장안정대책과 태국의 금융위기와 한국과의 연관성
  • 금융시장의 어려움과 해외로부터의 씨니컬한 반응
  • 태국의 금융위기와 우리나라의 금융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함.
  • 태국의 금융문제가 한국까지 와서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함.
00:29:22 ~ 00:37:39 동영상 재생
3. IMF의 발생원인 음모설에 대한 생각
  • 외환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것을 일부러 겪도록 만들었음 하는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임. 분명히 우리 내부적으로도 여러 문제들이 있었음. 하지만, 우리가 그 정도로 외환위기를 혹독하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음. 상처난 데 소금뿌리는 처방도 분명히 있었음. 그것의 원인은 외부에서 온것이 크다고 생각함.
00:24:50 ~ 00:35:45 동영상 재생
5-4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금융개혁문제
  • 당시 청와대 금융개혁위원회가 운영이 되고 있었는데, 취임 후 살펴보니 작은 문제들만 다루고 있고 큰 골격을 바꾸는 것은 장기과제로서 뒤로 미뤄놓고 우선 경영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규제를 바꾸고 기조를 바꾸고 하는 식의 운영이 되고 있었음.
  • 당시 우리 경제의 문제가 부실채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금융감독문제를 바로세워야 했기 때문에 금융개혁위원회의 운영을 이쪽으로 진행시켰음.
00:48:15 ~ 00:55:15 동영상 재생
2. 부도유예협약과 기아그룹문제(2)
  • 당시 기아사태가 한국경제의 큰 화두였다. 기아는 매우 영향력이 큰 기업이었기 때문에 기아 문제를 처리해야 될 사람은 본인 밖에 없었음. 기아의 큰 영향력으로 인하여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치권에게 이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 ‘삼성 음모설’이라는 오해도 받게 되었음.
  • 결국, 100일만에 기아문제를 법정관리로 넘기게 되었음.
00:16:53 ~ 00:29:21 동영상 재생
5-5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IMF와의 협의과정
  • 10월 초에 IMF에서 한국경제평가단이 한국에 오게되었음.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기자회견때만해도 한달 뒤에 한국이 IMF의 지원을 받게될 것이라는 기미는 전혀 없었음. 한국이 금융과 관련하에 추진하려던 것을 다 하면 전혀 문제가 없는것으로 이야기 되었음.
  • 홍콩과 태국의 금융위기가 오고 난 이후 상황은 매우 달라지기 시작하였음. 주식시장을 열었는데도 해외에서 반응이 오지 않아서 대책회의를 하였는데 이 떄 처음으로 IMF 얘기가 나오게 되었음.
  • 이런 과정에서 마침 캉드쉬 총재가 동남아를 순방중이었기 때문에 연락을 취하여 한국에 들리도록 요청하였음.
  • 비밀리에 캉드쉬와 현재 외환보유고 상황과, 요청 금액에 대한 면담을 하였음. 또한, 이 때 나온 합의사항은 다음 대통령 당선자 때에도 지켜질 수 있도록 동의서를 작성하였음.
  • 캉드쉬는 한국의 금융개혁이나 정책방향이 본인의 생각과 같기 때문에 한국의 경우에는 한국정부의 운영을 따르고 IMF가 뒤에서 서포트하는 방식으로 협의하였다. 또한, 캉드쉬와의 면담에 대한 발표는 금융개혁법안의 통과 이후로 하기로 하였음.
00:37:40 ~ 00:53:35 동영상 재생
2. IMF에서 제시한 구조조정안
  • 10월 19일 개각을 하고 난 이후에 후임자인 임창열은 본인이 준비한 기자회견 내용 중 2가지를 수정하였음.
  • 첫번째는, 본인은 환율의 상한을 없애는것으로 정했는데 임창열은 환율을 낮추는 쪽으로 결정하였음.
  • 두번째는, 본인은 IMF체제로 진행하겠다고 했는데 임창열은 이 내용을 삭제하였음.
  • 본인은 준비한 기자회견 내용대로 진행이 되면 즉, IMF체제로 간다는것을 발표하고 난 후 환율을 풀게되면 그것이 제동장치가 되어 그날부터 금융시장이 안정화될것으로 예측했음. 하지만 IMF에 대한 내용이 기자회견에서 빠지게 된 후부터 금융시장이 큰 요동을 치게 되었음. 또한, 미국과 IMF는 이로인해 한국정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음.
  • 이후 다시 3일정도 이후에 청와대에서 IMF체제에 대한 발표를 하게 되었음.
00:00:00 ~ 00:10:12 동영상 재생
3. IMF에 진행에 대한 의견과 IMF 이후 빠른 경제회복의 요인
  • 당시 초긴축 예산편성과 초고금리 적용이라는 결정을 내린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 우리나라는 위기를 겪은 다른나라에 비해 재정이 튼튼했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음.
  • 우리나라가 빠른 회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재정이 건실했고, 더 나아가 한국 경제의 기본이 튼튼했기 때문임.
  • 당시 한국경제는 Dollar가 없어서 유동성의 위기였지 경제의 위기는 아니었음. 외환위기가 왔을 때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여러가지 장치들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는데, 금융개혁법안의 쓸데없는 개각으로 인하여 더 힘들게 되었던 것임.
00:10:13 ~ 00:24:49 동영상 재생
5-6회 구술 상세목록 구술시간 영상
1. 향후 한국경제성장동력과 다시 경제부총리로 임명이 된다면 제일 먼저 할 고민
  • ‘성장동력’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다. 성장으로 나갈 수 있게 인프라를 깔고 장애가 없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 역할이라고 생각함.
  • 요새 논란이 되고 있지만, 본인은 시장주의는 가고 케인즈주의가 온다는 것은 아니라고 봄. 앞으로도 쭉 ‘시장주의’라고 생각함.
00:35:46 ~ 00:49:37 동영상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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